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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3화 〉 11.5. 그가 없는 사이(2) (103/152)

〈 103화 〉 11.5. 그가 없는 사이(2)

* * *

현수 오빠와 자신의 사이는 단순히 친구 사이일 뿐이다.

허나 그리 말해도 어차피 두 사람 다 믿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화정도 시원스레 말한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 있었다.

어차피 안 믿는다?

그러면 차라리 도발이라도 해서 저 다혈질 여자를 골려줘야지, 라는 생각으로.

하지만.

‘나름대로 블러핑(Bluffing)한 거였는데.’

너무도 냉철하게 자신의 처지를 파악한 주화연의 말에 화정도 내심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자신은 연예인이다.

그런 만큼 외모에 대한 자부심도 있다.

객곽적으로 봤을 때 그런 자신을 본 남성은 이성적으로 혹할 수밖에 없다.

여친 행세를 하는 이 두 여자도 마찬가지일 것이라 생각했을 테고.

하지만 저 불 같은 꼬맹이와는 다르게.

”현수도 화정 씨한테 별다른 관심을 주진 않은 거 같은데요.“

옆에 앉은 다소 헝클어진 머릿결의 여자는 그리 말하고는 무덤덤하게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의 말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하기라도 하듯이 말이다.

윤화정으로서는 알 길이 없었다.

이미 이 여자가 자신의 의도를 꿰뚫은 것인지.

아니면 그냥 바보처럼 착해서 그대로 믿고 있는 건지.

“…….”

대화 내내 입꼬리가 올라간 채 여유만만했던 화정의 표정은 어느새 바뀌어 있었다.

“후우……. 말씀하신 대로에요.”

이제 와서 사실은 깊은 사이라고 거짓말할 수도 없는 노릇.

한숨을 작게 내쉰 화정이 시인하듯 말했다.

“말했다시피 전 지금 현수 오빠랑 딱히 그런 관계가 아니에요. 그리고 오빠도 절 그런 식으로 여겼던 적은 없었어요. 친한 동료 정도로만 여기고 있지.”

그렇게 화정이 솔직하게 고백을 한 순간.

“여, 역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화연이 손뼉을 짝 쳤다.

‘역시 현수가 나한테 거짓말한 건 아니었어!’

사실 덤덤하게 말하긴 했지만 누구보다 속을 졸인 건 다름 아닌 화연이었다.

해탈했다고는 해도 솔직히 화연도 신경 쓰이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잠자리를 하는 남자가 다른 여자를 만나고 있다는 사실이.

물론 주화연도 단순히 바보처럼 화정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은 건 아니다.

화정에게 말했듯 화연도 나름대로의 단서를 담아 내뱉은 말이었으니까.

다만 지금 화정의 대답을 듣고 확신이 섰을 뿐.

“다, 다행이다.”

화연이 다행이라는 듯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런 화연의 반응에 화정이 기가 막힌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뭐야, 이 여자…….’

설마 자신의 반응만 보고 나와 현수 오빠의 관계를 유추한 건가.

지금껏 유지하던 표정 관리가 되지 않을 정도로 충격이었다.

‘저 성질머리 있는 여자만 경계하면 될 줄 알았더니.’

말수도 적고 소심해 보여서 방심하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눈치도 빠르고 관찰력도 있다.

막상 진짜 경계해야 할 대상은 다혈질 꼬맹이가 아니라 순한 범생이 쪽이었다.

“……그러면 서로 입장부터 정리하죠.”

주도권을 잃지 않으려 애써 말문을 여는 화정이었지만 이미 목소리가 살짝 떨리고 있었다.

애써 침착함을 가장한 화정이 말문을 이었다.

“말했다시피 전 오빠가 누굴 만나든 신경 쓰지 않을 거예요.”

“그게 신경 안 쓴다고 되는 거예요?”

“말했잖아요. 두 사람이랑 다르게 전 오빠랑 그리 깊은 관계가 아니라고요. 애초에 신경 쓰고 말고 할 관계가 아니란 거죠. 적어도 ‘지금’은.”

“그, 그 말은 즉슨…….”

다시금 ‘지금’이라는 말을 화정이 강조하는 것도 무색하게.

긴장된 표정으로 다음 말을 하는 다슬의 말에는 화정도 순간적으로 말문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세, 세, 섹스도, 아, 안 해 봤단 얘기죠?”

허, 이젠 아예 대놓고 물어본다 이거지.

“……제가 거기까지 대답할 의무가 있나요?”

매섭게 자신을 바라보는 다슬의 시선을 피하며 화정이 가까스로 말했다.

그런 화정의 태도에 다슬의 눈빛이 반짝 빛났다.

“하! 딱 보니까 그 정돈 아니네!”

“굉장히 무례하시네요……. 그리고 지금 대화에서 해고 안 했고가 중요한가요?”

“중요하다고요! 서로 막대동서가 되냐 안 되냐의 경계선에 있는 건데!”

“막……. 뭐라고요?”

“귀 먹었어요? 막대동서!”

“…….”

“잠까, 다, 다슬아, 진정해.”

미치겠네 진짜.

이제는 아무리 화정이라도 표정관리를 하기가 힘들 지경이다.

화연이 폭주하는 다슬을 말리는 사이 화정은 자신의 잔뜩 찌푸려진 미간을 짚었다.

“……네. 맞아요.”

결국 항복 선언을 하듯 화정이 기운 빠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오빠랑 거기까지는 안 갔어요.”

“하! 하하하!”

화정의 대답과 동시에 다슬이 돌연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우리 오빠가 누구한테 쉽사리 홀릴 사람이 아니지!’

좋아하는 이성과 그런 그에게 작업을 거는 동경하는 연예인.

다슬로서는 불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 화정의 말을 듣는 순간 가장 큰 걱정거리 하나가 시원스레 걷혀졌다.

적어도 자신이 미모의 탑스타 연예인보다는 우위에 있다는 사실.

“아하하하!”

그 사실이 다슬의 광대를 승천하게 만들었다.

주위 신경도 쓰지 않고 웃는 다슬.

그런 모습을 불쾌하게 쳐다보며 화정이 말을 이었다.

“아무튼 두 사람과 달리 저는 후발주자에죠. 두 분보다는 오빠한테 중요도도 떨어질 테고요. 거기, 짜증나니까 그만 웃어요. 아무튼 저는 지금 자리에서 만족할 생각은 없어요. 다만.”

거기까지 말한 화정이 다슬을 바라보았다.

“오빠가 누굴 만나든 앞으로 신경 쓸 일은 없을 거예요.”

그 말에는 다슬도 더 이상 웃을 수 없었다.

어느새 입꼬리가 내려간 다슬이 기가 막힌 표정을 지었다.

“제정신으로 하는 소리에요?”

“네. 애초에 그런 거에 신경 썼다면 두 사람이 있는 순간 포기했겠죠. 그런데 마인드로 따지면 저도 오빠랑 비슷하거든요.”

충격적인 발언에 화연과 다슬 두 사람이 누가 뭐라 할 것 없이 입을 헤 벌렸다.

그런 두 사람의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화정이 당당히 말을 이었다.

“저도 꼭 누구 하나만 좋아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대놓고 표현만 안 한다 뿐 연예계에서도 양다리나 삼다리, 혹은 그 이상을 걸치는 문어발 족속들은 아주 넘쳐나게 보아온 화정이다.

그래서일까.

이미 화정의 가치관은 어찌보면 원래 세계의 김현수보다도 훨씬 더 개방적인 상태였다.

상식적인 측면에서는 이미 한층 궤를 벗어나긴 했지만.

“여기 일부일처제 나라예요!”

그나마 가장 상식적인 개념을 지닌 다슬만이 그런 화정의 말에 항변하고 있었다.

‘한 명은 반쯤 포기하고 있고, 한 명은 자기도 비슷하니까 상관 없다고 지랄하고 있고…….’

가장 흥분한 상태를 보이는 다슬이었지만 스스로도 느끼고 있었다.

지금 여기서 태클을 걸 수 있는 사람이 자신뿐이라는 것.

도대체 이게 뭐란 말인가.

여기 제정신인 사람은 정녕 나뿐인 건가?

이쯤 되니 다슬도 이제는 화가 나는 걸 넘어서서 황당할 따름이었다.

“우리 지금 어디 중동에서 사는 게 아니라고요!”

“어머.”

경악한 표정으로 소리치는 다슬의 모습에 화정의 입가에 미소가 돌아왔다.

잔뜩 흥분한 상대방의 모습에 도리어 여유를 되찾은 것이다.

“설마 다슬 씨는 벌써 결혼까지 생각한 거예요?”

“지금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자, 잠깐만요. 뭐라고요? 결혼?”

“네. 결혼도 안 할 거면 거기까지 신경 쓸 필요는 없잖아요.”

“겨, 결혼……. 결혼이라니…….”

갑자기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고개를 푹 숙이는 다슬.

그런 다슬을 보면서 화정도 잠시 고민에 빠졌다.

‘생각해본 적은 없는데, 결혼이라…….’

솔직히 거기까지 갈지도 모르겠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이민 같은 거라도 생각해 봐야 되는 걸까.

애초에 너무 너무 먼 이야기라 별로 실감이 안 나긴 하지만.

그렇게 화정이 고민에 빠진 사이.

“……언니.”

어느새 고개를 든 다슬이 옆에 있던 화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멀뚱멀뚱 바라보는 화연을 향해 여전히 빨개진 얼굴로 다슬이 물었다.

“언니도 같은 생각이라고 했지?”

“응? 뭐, 뭐 말이야?”

“그러니까, 화정 씨처럼 오빠가 다른 여자 만나든 말든 상관 안 하겠다는 거 말이야. 아예 신경도 안 쓸 거냐고.”

“아니, 아예 신경 안 쓴다는 건 아닌데……. 나도 신경은 쓰여…….”

“하지만 지켜보기만 할 거라며! 그럼 뭐가 다른데!”

“응……? 그, 그게 그렇게 되나?”

“하.”

멀거니 그리 대꾸하는 화연의 반응에 다슬이 결국 헛숨을 내쉬었다.

한 명은 나사가 반쯤 풀려 있고.

한 명은 아예 나사를 조일 드라이버 자체가 없고.

‘둘 다 정상은 아냐.’

사실 이 문제의 가장 큰 원인은 바로 김현수다.

원래 세계의 가치관을 지닌 현수야말로 가장 상식에서 궤를 벗어난 인물이었으니까.

허나 이미 콩깍지가 씌워질 대로 씌워진 다슬은 거기까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적어도 나는 정신을 차리고 있어야 돼.’

주변 여자들이 모두 비정상이라면 적어도 자신만큼은 정상적으로 행동할 필요가 있다.

그리 생각한 다슬이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그래, 좋아. 좋다고요! 하다못해 두 사람까지는 넘어 간다고 쳐요.”

사실 말이 두 사람이지 윤화정 같은 경우는 어차피 오빠가 거들떠볼지 안 볼지 아직 모르는 거니 넘어가고 말 것도 없다.

일단 이 자리에 있으니까 그리 말할 뿐.

“그래도 전 이 이상 오빠가 다른 여자 끼고 다니는 꼴은 못 봐요.”

“이미 만나고 있는 여자가 꽤 될지도 모르는데도 말이에요?”

“그건 뭐 어쩔 수 없는 거고!”

“새로 만났는데 이미 만났던 여자라고 하면 어떡하려고요?”

“……그런 거짓말 할 사람은 아니거든요?”

“흐음.”

“아, 아무튼!”

이번에는 다슬도 화정의 능글능글한 태도에 쉽사리 넘어가지 않았다.

다슬이 결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화정 씨나 화연 언니와 달리 저는 오빠 옆에 더 이상 이상한 여자 꼬이는 꼴은 못 봐요.”

“뭐, 다슬 씨 뜻은 알겠는데……. 다슬 씨가 그렇게 생각한다고 해서 오빠 행동이 바뀌진 않을 걸요?”

“말할 거예요.”

“뭘요?”

“오빠한테 제 뜻을 말할 거예요. 더 이상 다른 여자 만나지 말라고.”

“흐음……. 오빠가 싫어할 텐데요.”

“저도 그 인간이 다른 여자 더 만나는 건 싫어요. 그러니까 말할 겁니다.”

지금껏 만난 여자까지는, 그래도 안 보인다면 무시할 수 있다.

천성이 그런 사람인데 뭐 어쩌겠는가.

하지만 이 이후로도 오빠가 더 여자를 만난다면…….

‘……헤어질 각오도 해야겠지.’

정말 최악의 시나리오지만…….

그렇다고 오빠가 이 이상 다른 여자들을 막 만나고 다니는 걸 보는 게 더 괴롭다.

고로 타협은 딱 여기까지다.

“…….”

지금까지 흥분했던 것이 거짓말인 것 마냥 다슬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그 모습을 본 두 사람 모두 다슬이 한 각오가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었다.

아마도 헤어지는 것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겠지.

“…….”

“다슬아…….”

그런 다슬의 태도에 화연은 물론이고 화정마저도 안타까운 표정으로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렇게 얼마를 가만히 있었을까.

“저기, 다슬아.”

한참을 고민하던 화연이 마침내 결심했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늘진 얼굴로 다슬이 화연을 슬쩍 흘겨보았다.

“왜요.”

“말했지만 나도 현수 옆에 누가 있는 건 싫어.”

“그래서요. 어차피 아무것도 안 할 거라…….”

“미안해.”

툴툴거리는 다슬의 말을 자르며 화연이 고개를 숙였다.

갑작스런 화연의 반응에 다슬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뭐, 뭐예요?”

“미안. 너한테만 너무 큰 짐을 지게 한 거 같아.”

“아뇨, 저는…….”

“그러니까.”

그리 말하며 고개를 든 화연도 마찬가지로.

다슬과 비슷한 결연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도 도와줄게.”

“도와준다니……. 어떻게요?”

“나도 현수 옆에서 최대한 노력할게. 할 수 있다면 쓴 소리도 하면서 말이야.”

“…….”

“생각해보니 괜히 이상한 여자들한테 꼬이는데도 가만히 있을 순 없는 노릇이니까……. 현수한테 악영향을 미치는 선에서라면 나도 최대한 방지하도록 할게.”

“언니……. 괜찮겠어요?”

“응. 말했다시피 너만 나쁜 년 만들고 싶지는 않은걸.”

거기까지 말한 화연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 자조적인 모습에 다슬도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진짜 나쁜 사람은 따로 있지만 말이야.”

“……그러게요. 오빠 한 명 때문에 이게 무슨 고생이람.”

“아하하…….”

힘없이 웃는 화연과 다슬.

그렇게 쓴웃음을 짓는 두 사람을 화정이 가만히 바라보았다.

‘두 사람 다 정말로 좋아하는구나. 오빠를.’

그런 두 사람을 보면서 화정도 조금씩 마음이 기우는 것을 느꼈다.

처음에는 약간의 호감 정도였다.

아니, 아마 지금도 그건 다르지 않을 터.

허나 술을 마시고 깊은 얘기를 나누면서 현수라는 남자가 유별나고 배려심 깊은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적당히 만나면서 간을 보자.

괜찮으면 만나보고 아니면 안 만나면 그만이다.

딱 그 정도.

화정의 생각하는 현수의 중요도는 딱 그 정도의 가벼움이었다.

하지만.

‘깊이 파고들면 나도 저 둘처럼 되는 걸까.’

저 둘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동하는 게 느껴졌다.

만약 현수라는 사내와 함께 하는 길을 택한다면.

그리고 여기 있는 두 여자처럼 현수를 좋아하게 된다면.

저 두 사람처럼 질투하고, 쓸쓸해하고, 또 화를 내게 되겠지.

‘그래도…….’

분명 고단한 길이 될 것임을 알고 있음에도.

한편으로는 그것을 바라고 있는 자신이 있었다.

‘살면서 그런 사람 한 명 정도는 겪어보고 싶네.’

눈앞의 두 사람을 보면서 화정은 직감했다.

어쩌면, 자신의 처지도 눈앞의 두 여자처럼 가시밭길이 될 지도 모르겠다는 것을 말이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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