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5화 〉 12. 방송이 나간 뒤(2)
* * *
그렇게 동생과는 담백하게 서로 할 말만 하고 딱 헤어졌다.
내 신사임당 두 장이 좀 뼈아프긴 했지만.
생각해보니 역전세계로 오고 나서 가족들한테 무심하긴 했네.
부모님에게는 몇 번 연락하긴 했지만 동생에게는 톡 한 번 하지 않았고.
아무리 서로가 소 닭 보듯 하는 관계라고는 하지만 동생도 요 몇 달 동안 오빠가 도대체 뭐 하고 사나 궁금하긴 했을 것이다.
그래도 설마 돈 좀 받으려고 한 시간이나 걸리는 거리를 온 건 아닐 테니까.
좀 덜 바빠지면 진짜 집에 얼굴 한 번 정도는 비춰야겠네.
“기다렸지?”
동생을 보낸 나는 곧바로 집으로 들어왔다.
뭔가 얘기를 하고 있던 두 사람이 내 등장에 이야기를 멈추고 나를 바라보았다.
주화연이 날 보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혼자 와? 동생은?”
“간다더라.”
“갑자기?”
“어.”
“아니, 우리랑 얘기하던 중이었잖아?”
“대충 설명하니까 납득하더라.”
사실 설명보다는 돈의 힘이 컸지만.
“그래……. 잘 해결됐으면 다행이고.”
화연이 다행이라는 듯이 말했다.
주화연 입장에서도 방금 내 동생과의 대면은 꽤 섬뜩한 경험이었을 테지.
화연과 나는 세간에서 보기에 ‘불건전’한 관계라 할 수 있었으니까.
“아, 참.”
나는 가만히 자리에 앉아 있는 화린에게 시선을 던졌다.
“아까 말 맞춰줘서 고맙다 화린아.”
“네?”
“대충 말해도 알아서 말 맞춰줬잖아.”
화린이 눈치껏 내 말을 따라주지 않았다면 신사임당 두 장 정도로는 끝나지 않았을 터.
최악의 경우에는 동생이 내 실태를 눈치 채고 죄다 부모님한테 일러바칠지도 모르는 일이었으니까.
내 말에 화린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 정도야 별 거 아닌데요 뭐. 그보다 갑자기 왜 그런 거예요?”
“그거야 뭐……. 동생 입장에서는 보기 안 좋을 수 있으니까.”
“네?”
“남자 혼자 사는 집에 여자 둘 불렀다고 뭐라고 하더라.”
“아……. 생각해보니 그러네요. 가족 입장에서는 좀 그럴 수도 있겠다.”
“그렇지. 그런데 거기서 괜히 편의점에서 만났다고 제대로 얘기하면 좋을 게 없을 거 같아서. 그냥 대충 둘러댄 거야.”
“그렇구나.”
내 말에 납득한 화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옆에 앉아 있는 화연이 묘한 표정을 지으며 그런 동생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기, 그런데……. 오빠 진짜 괜찮은 거 맞죠?”
“응? 괜찮냐니 뭐가?”
“그러니까 갑자기 와서 동생 분도 만났고……. 오빠한테 폐가 된 거 아닌가 싶어서…….”
그러고 보니 둘 다 갑자기 왜 왔는지 얘기도 못 들었네.
사실 좀 쉬고 싶은 마음이긴 하다만…….
그래도 여기까지 온 거 생각하면 대놓고 내치는 것도 좀 그렇다.
“일단 나가서 얘기할까?”
어쩔 수 없지.
일단은 두 사람 얘기부터 들어봐야겠다.
***
그렇게 나는 주 자매를 데리고 근처의 패밀리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내가 밥을 사준다는 말에 신이 난 화린이 아예 콧노래까지 부르면서 앞장서서 가는 것을 나와 화연이 따라가는 모양새가 되었다.
식당으로 향하는 와중 문득 화연이 물었다.
“괜찮겠어?”
“뭐가?”
“너 방송도 탔잖아. 한동안 바쁜 거 아니었어?”
“아, 그거? 바쁘긴 무슨. 그냥 일반인이 한 번 방송 탄 걸 가지고.”
“보통 반응 좋으면 관계자들이 연락하고 그런다던데.”
“그렇다 쳐도 나 이제 막 집 왔거든? 하루 정도는 쉬어야지.”
내일부턴 다시 바빠지겠지만 뭐, 그거야 내일 일이고.
내일의 일은 내일의 나한테 맡기면 된다.
“그래?”
무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화연.
그 모습에 약간의 위화감이 느껴졌다.
뭐랄까……,
말로 표현하긴 힘든데 애가 묘하게 차분해진 거 같은 느낌?
혹시 여행 간 사이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건 아니겠지?
“여행은 어땠어? 잘 놀다 왔어?”
“나름 재밌게 놀았지. 조금 급하게 돌아온 게 아쉽긴 하지만.”
“……좋았겠네.”
내 말에 화연이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화연의 모습에 나도 그녀가 짐작하는 바를 느낄 수 있었다.
또 다른 여자들 막 만나고 다녔다고 생각하는 거겠지.
……뭐, 사실이긴 하지만.
좀 찔리네.
그렇게 서로 말 없이 얼마 동안 걸었을까.
“현수야.”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화연이 물었다.
여전히 시선은 앞을 향한 채로.
약간 느려진 발걸음을 느끼며 나도 그런 화연과 발걸음을 맞추었다.
“다음에 여행 갈 땐……. 나도 같이 가면 안 돼?”
별 거 아닌 듯 툭 던진 물음.
하지만 나는 그런 화연의 물음에서 그녀의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
소심해 보여도 의외로 촉이 좋은 녀석이니, 내가 홀로 여행을 간 이유 정도는 이미 깨닫고 있을 터.
그러니 옆에 있으면 다른 여자한테 눈길을 주는 일은 없을 거라 생각하고 꺼낸 말이 아닐까.
나는 그런 화연의 심정을 이해했다.
그래, 당연히 싫겠지.
아무리 내가 선을 그었다고는 하지만, 사람 마음이라는 게 그렇게 자 대고 칼 긋듯 반듯하게 정해지는 게 아니니까.
말로는 다른 남자들 만나도 괜찮다고 하지만, 나도 진짜 내 섹파들이 다른 남자들 만나고 다닌다고 한다면 언짢아질 거 같긴 하다.
아마 예전의 나라면 다른 남자들과 만나겠다는 섹파들의 말을 듣는 순간, 단칼에 거절했을 것이다.
단순히 더 많은 여자와 자고 싶다는 내 이기심을 발로로 해서.
화연도 그걸 알기에 별 기대 없이 물은 것일 테지.
하지만.
“그래.”
역전 세계로 오게 된 지 약 세 달.
이 세 달 동안 많은 일들을 겪었고, 또 많은 이들을 사귀고.
최다슬과 주화연의 갈등을 처음 마주하게 되고,
나도 조금씩 생각이 바뀌게 되었다.
그리고 이번 여행을 끝으로 굳이 이 이상 여자관계를 쌓지 않기로 결심했다.
물론 처음부터 목표를 잡고 있던 여자들은 제외한다는, 아직 여전히 이기적인 심보가 남은 결심이긴 해도.
흔히들 떡정이라고들 한다.
하지만 그건 내 섹파들 뿐만이 아니라 그건 나에게도 적용되는 얘기였다.
이제는 나도 주화연이나 최다슬, 그 외의 깊은 관계를 지닌 섹파들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니…….
앞으로는 나도 최대한 자제하자.
“그러자.”
“……어?”
내 대답이 어지간히도 의외였던 걸까.
아예 발걸음조차 멈추고 날 바라보는 화연의 모습에 나도 발을 멈추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지, 진짜?”
“뭘 그렇게 놀라?”
“아니……. 좀 의외라서.”
“뭐가?”
“그러니까……. 너 혼자 놀러간 이유가 있을 거 아냐. 그래서 괜히 다른 여자 안 데리고 가는구나……. 싶었지.”
“네가 생각한 그게 아니라고는 못 하겠네.”
“…….”
“그런데 이젠 딱히 안 그러려고.”
“……어?”
“사실 여행 가서 고민 좀 했어.”
“뭐, 뭐를?”
“이대로 막 몸 굴리는 것도 좀 아니다 싶더라고.”
나는 앞서 생각해둔 바를 화연에게 솔직하게 고백했다.
“네 말대로 여행 가서 여자 만나서 논 건 사실이야. 그런데……. 그렇게 놀고 있으니까 너랑 다슬이랑, 그 외에 몇 명 생각 좀 나더라. 죄책감도 좀 들고. 떡정이라는 게 이래서 무섭다니까.”
“어, 어어…….”
“그래서 앞으로는 너무 막 여자 만나고 다니진 않으려고.”
내 말에 화연이 입을 떡 벌린 채 가만히 날 바라보았다.
말문을 잃은 채 눈만 끔뻑이는 화연을 보며 나는 차분히 그녀의 반응을 기다렸다.
한참을 그렇게 있던 화연이 믿지 못하겠다는 듯 물었다.
“……진짜야? 정말? 정말로?”
“몇 번이냐 묻냐. 진짜야.”
“……으읏.”
뭐야?
얘 설마 우는 거야?
갑자기 고개를 떨구고 어깨를 들썩이는 화연.
당황한 내가 슬쩍 앞을 살피며 작게 속삭였다.
“야, 야! 울지 마. 동생 보잖아.”
“아, 안 울어…….”
훌쩍거리며 코를 삼킨 화연이 고개를 숙이고는 눈을 슥슥 닦았다.
“뭐해요! 둘 다 빨리 안 오고!”
하지만 그것도 잠시.
“알았어, 갈게!”
앞서가던 동생의 재촉에 고개를 드는 화연.
그 표정은 언제 그랬냐는 듯 활짝 웃고 있었다.
뚱한 표정으로 기다리는 동생에게 대답한 화연이 기운차게 내 팔뚝을 잡아끌었다.
“빨리 가자, 현수야!”
“야, 알았으니까 옷 잡아당기지 마.”
“헤헤.”
바보처럼 웃는 화연의 모습에 나도 피식 웃음을 흘렸다.
역시 얘는 웃는 얼굴이 제일 귀엽다니까.
***
“여기 괜찮지? 맛있어?”
“마이어요!”
“……먹던 건 좀 삼키고 대답해라. 그러다 체하겠다.”
“여으오 어어.”
“넌 또 뭐라는 거야. 자, 물이라도 좀 마셔.”
“읍읍!”
나는 우걱우걱 음식을 먹는 두 사람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자매가 쌍으로 아주 가관이네.”
햄스터 마냥 입에 음식을 가득 물고 폭풍흡입을 하는 두 사람.
주화린이야 원체 쾌활한 아이니 그렇다 쳐도 그 얌전하던 주화연까지 이러고 있다.
그래도 잘 먹으니까 사주는 입장에서는 보람차긴 하네.
먹고 있는 도중에 미안하지만 그래도 할 말은 해야지.
“화린아.”
내가 이름을 부르자 막 스테이크를 집어든 화린이 포크를 내려놓고는 음식을 꿀꺽 삼켰다.
“후아……. 네?”
“오늘 이렇게 온 이유가 진짜 뭐야? 나한테 하고 싶은 말 있어?”
“…….”
방금 전까지 쾌활하던 것이 무색하게 눈초리가 내려가는 화린.
입을 오물거리던 화린이 내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
“말했잖아요. 까먹었다고.”
“아직도?”
“전 뭐 오빠 얼굴 보러 오면 안 돼요? 언니랑은 자주 만나면서.”
“아니, 뭐…….”
그렇게 말하니까 또 내가 할 말이 없네.
잠깐, 그런데 얘 지금 투정 부리는 건가?
어째 원래 세계 여자들이 삐지면 하는 행동이랑 겹쳐 보이는 거 같은데.
왠지는 모르겠는데 계속 보고 있자니 뭔가 그런 느낌이 든다.
“그래.”
뭐, 그래도 봐 준다.
화연이 동생이고, 무엇보다 귀여우니까.
“온 김에 얘기나 좀 하자.”
“아싸!”
내 말에 다시 신이 난 화린이 다시 포크를 들었다.
그 전투적인 모습에 다시 쓴웃음을 지을 무렵.
“휴, 잘 먹었다.”
어느새 접시를 싹 비운 화연이 입가를 닦으며 말했다.
진짜 엄청 빨리 먹네.
“그럼 난 가볼게. 밥 잘 먹었어.”
“엥?”
뭐야, 이렇게 갑자기 간다고?
“너도 같이 노는 거 아니었어?”
“됐어. 원래 딱히 할 말 있어서 온 게 아니라 얘 사고 칠까봐 따라온 거거든.”
“화린이가 사고를 왜 치냐.”
“네가 못 봐서 그래. 얘 집에서는 아주 너 꼭 봐야겠다고 얼마나 땡깡을……읍!”
어느새 식기를 놓은 화린이 화연의 입을 콱 틀어막고 있었다.
그야말로 전광석화 같은 움직임이었다.
“헛소리 하지 말고 빨리 가기나 해!”
당황한 화린과 달리 입이 막혔음에도 여유만만한 미소를 띄는 화연.
슬며시 동생의 손을 뿌리친 화연이 씨익 웃었다.
“네에, 네에. 잘 놀다 오세요, 동생님. 우리 동생님의 소중한 데이트 방해하진 않을 테니까.”
“이익……!”
실실 웃으며 놀리는 화연의 말투에 화린이 짜증난다는 듯 얼굴을 팍 찌푸렸다.
물론 그에 굴할 화연이 아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화연이 나를 보며 손을 작게 흔들었다.
“그럼 갈게.”
“조심해서 가.”
“응. 나중에 나도 밥 한 번 살게.”
“그러던가.”
“후후.”
날 보며 행복한 미소를 지은 화연이 그대로 떠나갔다.
일견 후련해 보이기까지 하는 그녀의 뒷모습을 나와 화린이 가만히 바라보았다.
“요즘 언니가 뭔가 여유가 넘치는 거 같아요.”
“여유 넘치면 좋지 뭘.”
“나쁘다는 건 아닌데……. 뭔가 기분 나빠요. 오빠는 왜 그런지 알아요?”
“……글쎄.”
사실 짐작이 안 가는 바는 아니다.
아까 내가 한 말 때문에 그런 거 같긴 하니까.
근데 이미 그 전부터 뭔가 성격이 덤덤해진 거 같기도 하고?
“아무튼 마음에 안 들어.”
투덜거리던 화린이 그제서야 포크를 내려놓았다.
싹 비워진 그녀의 접시를 본 내가 물었다.
“다 먹었어?”
“후식 먹어야죠.”
“천천히 먹어.”
“다 먹고 나면 다음엔 뭐 할까요?”
“난 아무 생각 없는데?”
“아, 그렇죠. 제가 갑자기 찾아온 거니까…….”
“아, 너 다 먹으면 집에 좀 들리자.”
“네? 왜요?”
“나 방금 집 도착했잖아. 땀 너무 흘려서 찝찝하다고.”
그리 말한 나는 앞섬을 펄럭거렸다.
하필 얇은 옷이라 옷에 자꾸 달라붙네.
땀을 흘려서 몸도 찐득하고.
“냄새 개 쩔 거 같은데.”
“케흑!”
날 보던 화린이 갑자기 크게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빨개진 얼굴로 연신 기침을 하는 화린의 모습에 놀란 나는 그녀의 옆자리로 이동했다.
“괜찮아?”
급하게 먹더니 역시 체했구만.
이럴 땐 좀 두드려 줘야지.
“그러게 물 좀 마시라니까.”
“콜록, 오빠, 자, 잠까…….”
“있어봐. 두드려줄게.”
“그, 그런 게 아니라……!”
어찌할 줄 모르는 화린의 모습을 보며 나는 그녀의 등을 작게 두들겨 주었다.
내 손이 닿을 때마다 화린의 몸이 움찔 떨리는 게 느껴졌다.
“어흑! 아으어어…….”
“아, 미안. 기분 나빴어?”
“……아, 아뇨!”
“그래? 체한 건 좀 괜찮아?”
“그, 그냥 사레 들렸을 뿐이에요!”
뭐야, 난 또.
괜히 걱정했네.
내가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사이 화린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그보다 빨리 가죠!”
“엥? 후식 먹는다며?”
“그, 그냥 안 먹을래요! 저, 저 먼저 나가 있을게요!”
자리에서 일어난 화린이 내가 붙잡을 새도 없이 가게 밖으로 휙 나갔다.
도망치다시피 하는 그녀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 피식 웃었다.
“나 참.”
언니나 동생이나 종잡을 수 없는 건 똑같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