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6화 〉 12. 방송이 나간 뒤(3)
* * *
갑자기 서두르는 화린과 함께 다시 집으로 향했다.
“오빠, 저기…….”
현관문 앞에 도착하자 화린이 갑자기 날 보고는 다시 우물쭈물 거리기 시작했다.
“그, 저는 여기서 기다릴게요.”
“밖에 덥잖아. 안에서 에어컨이라도 쐬면서 기다려.”
“하지만…….”
대충 뭐 때문에 이러는지는 뻔하다.
화린이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 정도는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나 참. 괜찮으니까 들어와.”
피식 웃으며 문을 연 뒤 머뭇거리는 화린에게 손짓했다.
“어차피 씻고 화장실 안에서 바로 갈아입을 거니까.”
“……그건 그거대로 자극이 좀.”
“대체 뭔 상상을 하는 거야? 변태냐 진짜.”
“무슨! 오빠야말로 변태잖아요!”
“야. 설마 내가 너 같은 꼬맹이한테 덮쳐지겠냐?”
“뭐, 뭔 소리에요?! 그그그그런 생각 안 했거든요!”
변명을 할 거면 최소한 말이라도 더듬지 말던가.
여전히 망설이는 화린의 팔뚝을 잡고 반강제로 그녀를 집 안으로 들였다.
화들짝 놀라면서도 화린은 순순히 내 손길에 끌려왔다.
“헉! 오, 오빠!”
“됐으니까 들어와. 내가 신경 쓰여서 그래.”
“안 되는데…….”
아닌 척 하면서 지도 은근히 보고 싶다 이거지.
속 보인다 이년아.
“진짜 괜찮은 거죠?”
“그렇대도.”
“……오빠가 괜찮다고 한 거예요.”
“알았다니까. 됐으니까 TV나 보면서 기다리고 있어.”
“네.”
못미더운 표정을 지으면서도 화린이 얌전히 거실 구석에 앉았다.
TV를 보는 그녀의 모습을 확인한 뒤에야 나도 새 옷을 들고 화장실로 들어갈 수 있었다.
“…….”
왔다 갔다 하는 중에도 화린이 나를 힐끔힐끔 거리는 게 느껴졌다.
내가 시선을 던지자 화린이 재빠르게 TV를 보는 척 하기 시작했다.
“허, 참.”
그런 화린을 보며 나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저러면 안 들킬 줄 아는 건가?
“야, 뭘 그렇게 보냐?”
“아, 안 봤는데요?”
“다 티 나거든? 안 보기는 개뿔이.”
“크흠…….”
내 지적에 민망해진 화린이 아예 고개를 홱 돌렸다.
귀엽기는.
그래, 네 맘을 내가 왜 모르겠니.
고등학생의 성욕이란 게 참…….
무섭고도 슬프단 말이지.
아무튼 나도 이제 좀 씻을 수 있겠네.
화장실로 들어간 나는 빠르게 샤워를 마쳤다.
기다리는 사람이 있는데 평소처럼 느긋하게 씻을 순 없는 노릇이니까.
진짜 찐득거려서 뒤지는 줄 알았네.
“하, 살겠다.”
그렇게 대충 머리를 털고 간단하게 옷을 입고 나온 순간.
“허억!”
거실 구석에 앉아있던 화린이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게 보였다.
쟤 또 왜 저래?
“뭐야? 무슨 일 있어?”
“오빠, 그, 위에, 오, 옷 좀……!”
“입었는데?”
빨개진 얼굴로 내게 삿대질하는 화린의 모습에 고개를 숙여 내 몸을 살폈다.
입을 건 다 입었는데 왜 저러지.
그래도 신경 쓴다고 반바지는 걸치고 나왔는데.
“위, 위는요!”
“위?”
“가슴 다 보이잖아요!”
아예 얼굴까지 가리며 소리치는 화린의 말에 나는 더욱 의아해졌다.
뭐, 윗도리야 아직 안 입긴 했는데…….
그게 그렇게 이상한가?
이 세계의 기준이란 참으로 모호한 면이 있는데, 바로 원래 세계에서의 인식과 역전세계의 인식이 혼합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 탓에 나도 간혹 그것을 구분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 중 가장 이상했던 것 중 하나가 ‘이 세계에서는 남성의 알몸이 어디까지 허용되느냐’였다.
하지만 관찰한 결과 그 부분에 대해 나름대로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알아본 결과 원래 세계에서 그랬듯 이 세계에서도 남성의 상반신 노출 정도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처음 역전세계로 왔을 때 CF에서 본 것도 있고, 실제로 어제 간 해변에서도 상반신 정도는 벗고 다니는 남성들이 꽤 있었으니까.
애초에 해변에서도 반쯤 벗고 다녔었고.
“뭐 어때? 다 벗은 것도 아니고.”
“이, 이상하다고요!”
“이상해?”
“저도 그래도 여자라고요! 그, 그, 그런데 제 앞에서 그렇게 부주의하게……!”
네가 뭔 여자야. 그냥 애지.
그리 말하고 싶었지만 풀 죽을 거 같아서 관뒀다.
“해변가에서는 그렇게 다니는 사람 많던데.”
대신 위화감을 느끼는 부분을 집어서 말했다.
태연히 말하는 동안에도 나와 눈을 마주치지 못한 화린이 고래고래 소리쳤다.
“때와 장소라는 게 있잖아요! 그, 그렇게 아무데서나 남한테 자기 웃통 까는 걸 보여주는 남자가 어딨어요!”
음, 하긴 그것도 그런가.
원래 세계라도 아무데서나 그냥 웃통 벗고 까는 남자는 없지.
있으면 그건 변태일 뿐이고.
근데 우리 집에서 윗도리도 못 벗고 다니냐?
생각해보니 억울하네.
“아, 몰라. 귀찮아.”
괜히 오기가 생긴 나는 그대로 행동을 재개했다.
보든가 말든가.
“으으…….”
웃통을 깐 채 머리를 말리고 외출할 옷으로 갈아입는 동안, 화린은 자리에서 일어선 자세 그대로 굳어서 가만히 날 바라볼 뿐이었다.
“끝났다. 가자.”
“…….”
“뭐. 안 갈 꺼야?”
“……가, 가야죠.”
그렇게 한바탕 소동을 벌인 뒤에야 우리는 집을 나설 수 있었다.
곁에서 얌전히 걷고 있는 화린의 표정이 참으로 기묘했다.
“……오빠.”
“왜?”
“오빠 저 여자로 생각 안 하죠?”
“뭔 소리야. 네가 여자지 남자냐?”
“그런 뜻 아닌 거 알잖아요.”
“너도 내가 뭐라고 대답할지 알잖아.”
“치…….”
내 말에 툴툴거리며 화린이 돌멩이를 툭 찼다.
시무룩해진 화린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니까 괜한 걸 왜 물어보고 그래.
“그래서 뭐 하고 놀 건데?”
내 물음에 시무룩해 있던 화린이 고개를 들었다.
어린애 아니랄까봐 어느새 흥미진진한 표정을 지은 화린은 날 보며 고민하기 시작했다.
“음…….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은데.”
“일단 말해봐.”
“뭐, PC방도 괜찮고, 영화도 괜찮고, 그냥 카페 가서 수다 떨어도 되고. 아, 아니면 방 탈출 같은 거 해보실래요? 남친 있는 애들 많이 하던데.”
“내가 언제 화린이 니 남친이 됐냐?”
“에이 씨! 그냥 예를 든 거예요, 진짜! 남자들은 이런 거 좋아한다면서요.”
“난 싫어. 귀찮을 거 같고.”
“진짜 말을 말아야지.”
그렇게 화린과 잡담을 하면서 목적지를 정하는 사이.
“어?”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날 보던 여성이 갑자기 날 보고는 화들짝 놀라는 모습이 보였다.
내가 의아해하는 사이 그녀가 후다닥 달려왔다.
“우와!”
가까이서 내 모습을 보고는 감탄사를 터뜨리는 여성의 모습에 내 의구심은 한층 더 깊어졌다.
갑자기 뭐지?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인데?
의아한 나를 향해 여성이 잔뜩 흥분한 어조로 말을 쏘아냈다.
“김현수! 김현수 씨 맞으시죠?”
“네? 아, 네. 맞는데요. 그보다 제 이름은 어떻게……?”
“이번에 ‘너 혼자 산다’ 봤어요!”
“아…….”
“거기 출연하셨잖아요. 맞죠?”
“네, 맞긴 한데…….”
“저, 실례가 안 된다면 셀카 한 번 같이 찍어도 될까요?”
“셀카요? 저를요?”
“네. 인스타에 자랑하려고요.”
벌써 찍을 준비 만반이라는 듯 핸드폰을 들이미는 여성.
그런 그녀의 모습에 문득 방송 전 윤화정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방송 출연하면 아예 생활 자체가 달라진다고 했던가.
뭐, 아직 그 정도까지는 아닌 거 같지만.
그래도 방송 나간 지 이제 겨우 하루밖에 안 지났는데 벌써 알아보는 사람이 생긴 건가?
이래서 다들 TV 나온다 뭐다 하는 거구나 싶네.
“뭐, 사진 정도라면.”
그래도 아직 사진 찍는 정도는 허용할 수 있다.
날 좋아해 준다는 걸 뭐라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렇다고 찍는다고 얼굴이 닳는 것도 아니니까.
정 귀찮으면 나중에 안 찍는다 하면 그만이기도 하고.
연예인 활동 할 것도 아니고 설마 사진 몇 장 찍는다고 딱히 유명인사가 될 일은 없겠지.
“어머, 정말요? 감사합니다!”
내 말에 미소를 지은 여성이 폰을 들고는 한 손으로 쭉 들었다.
“화린아, 잠깐만.”
“네.”
상당히 적극적인 그녀의 모습을 보며 화린에게 양해를 구했다.
고개를 끄덕이는 화린을 모습을 보고 다시 그녀의 핸드폰으로 시선을 옮겼다.
각도에 잡히도록 슬쩍 다가서자 그녀가 내 쪽으로 한층 들러붙었다.
“죄송한데 안으로 좀 더 들어와 주시겠어요?”
지금도 충분히 가까운 거 같은데.
그녀의 말에 따라 약간 더 달라붙자 아예 확 다가온 그녀가 내 어깨에 딱 들러붙었다.
비스듬하게 붙은 흉근에서 그녀의 풍만한 가슴이 닿는 게 느껴졌다.
“크흠.”
이거 아무리 봐도 일부러 이러는 거 같은데…….
아냐, 진정하자 진정.
활짝 미소를 짓고 있는 그녀를 보면서 나도 어색하게나마 웃었다.
찰칵.
사진이 찍히는 소리를 들으면서 몸을 뗐다.
내가 떨어진 순간 아쉬워하는 표정을 짓는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실물로 보니까 너무 미남이세요!”
다시 호감 섞인 미소를 지은 그녀가 날 향해 적극적으로 말을 걸어오기 시작했다.
“방송도 재밌게 봤어요! 미남이신데 말씀도 진짜 잘하시더라고요.”
“아……. 감사합니다.”
“혹시 SNS는 안 하세요? 팔로우 꼭 하고 싶은데!”
“그 쪽은 제가 취미가 없어서요.”
“정말요? 너무 아쉽다.”
계속해서 말을 그녀에게 적당히 대꾸하면서 속으로 작게 한숨을 쉬었다.
여자들이 보내오는 호감 정도는 역전세계로 넘어온 뒤로 익숙해서 둘러대기도 쉬웠는데…….
그래도 방송 잘 봤다고 한 사람을 막 내치자니 좀 그렇네.
“오빠.”
곤란해 하는 내게 도움의 손길을 보낸 건 다름 아닌 화린이었다.
뚱한 표정으로 날 보던 화린이 말없이 가던 방향으로 휙 고개를 저었다.
빨리 가자 이건가.
“저기, 제가 일행이 있어서.”
“아, 네!”
내 말에 여성이 과장된 표정으로 손을 휘저었다.
“아이 참, 바쁜 분을 제가 괜히 붙잡아서!”
“아, 아닙니다.”
“혹시 관심 있으시면 디엠 남겨주세요. 아셨죠?”
“네에…….”
“여기 이건 제 아이디고요. 그리고 이건…….”
디엠은 또 뭔데.
나 그런 거 몰라.
핸드폰 액정을 들이대며 설명하는 그녀에게 대충 아는 척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서야 그녀도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
“감사해요!”
마침내 설명이 끝난 그녀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후우…….”
그녀가 떠나가고 난 뒤에야 겨우 참았던 한숨을 내쉬었다.
뭐야, 이거…….
고작 한 명 상대했을 뿐인데 벌써 피곤해지네.
그보다 내 셀카 사진이 SNS에 돌아다니는 세상이 오다니.
고작 세 달 전만 해도 아싸 일변도였던 내가 인싸들의 놀이터에 끼게 되는 날이 올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설마 나중에 진짜 SNS에 일반인 셀럽 마냥 도배되는 거 아냐?
그건 좀 그럴 거 같은데.
“좋겠네요?”
내가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화린이 다가왔다.
여전히 뚱한 표정을 지은 채,
“벌써 아는 사람도 생기고.”
“좋기는.”
“그보다 방송 나간 지 얼마나 됐다고 알아보는 사람이 있네요.”
“그러게.”
“어쩐지 시큰둥해 보이는데.”
시큰둥하다라.
확실히 그럴지도 모르겠네.
물론 좋게 봐준다면야 나쁠 거 없긴 하지만, 또 딱히 명예욕 같은 게 별로 없는 편이라 딱히 엄청나게 좋다거나 한 건 아니니까.
어떤 기분일까 싶어서 출연하긴 했다만 뭐…….
계속 이런 식이면 오히려 귀찮은 느낌이 더 클 거 같은데.
무덤덤한 내 모습에 화린의 표정이 점차 묘해졌다.
“안 기뻐요? 알아주는 사람이 있는 건데.”
“좋고 말고를 떠나서 그냥 좀 이상한 기분인데.”
“흐음…….”
내 대답에 화린이 턱을 짚으며 생각에 빠졌다.
얘는 또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고민을 마친 화린이 혼자 뭘 납득했는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오빠.”
“또 무슨 얘길 하려고.”
“오빠는 연예인 할 생각 없어요?”
“연예인?”
어째 요즘 들어서 이런 소릴 많이 듣네.
이제는 최다슬에 이어서 얘도 날 달달 볶을 생각인가?
“나 그런 거 할 생각 없어.”
“정말이죠?”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되묻는 화린의 모습에 그제야 그녀가 가진 생각을 눈치 챘다.
보아하니 내가 연예인 안 했으면 하는 눈치네.
“왜? 내가 연예인 하면 싫은 이유가 뭔데?”
“……그런 말 딱히 안 했는데요?”
“입에 침이나 바르고 거짓말을 해라.”
이게 얼굴에 다 티가 나는데 씨알도 안 먹힐 거짓말을.
얘는 일단 거짓말 좀 하는 법부터 배울 필요가 있을 거 같다.
언니 닮아서 그런지 애가 순진한 면이 있단 말이지.
“크흠…….”
그래도 자기도 스스로 거짓말을 잘 못한다는 자각 정도는 있는 모양이다.
내 대꾸에 민망한 표정으로 헛기침을 하는 화린을 보며 피식 웃었다.
“야, 알다시피 난 누구 관심 받으면서 사는 거 즐기는 타입 아냐. 오히려 귀찮으면 귀찮았지.”
“그거야 알지만……. 그럼 방송은 왜 나간 거예요?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서.”
“돈을 많이 주니까.”
그 순간 나를 바라보는 화린의 표정이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마치 한심한 것을 쳐다보는 것 같은 모습이었으니까.
“……속물.”
야! 속물이라니!
돈 버는 게 나빠?
“그러면 화린이 너는? 왜 내가 연예인이 안 됐으면 하는데?”
“그거야 뭐……. 아까 그런 여자들 앵기는 거 보면 짜증날 거 같아서 그러죠. 오빠 매력을 너무 많은 사람이 알게 하고 싶지 않기도 하고.”
“다슬이랑 정반대네.”
“네? 누구에요, 그건?”
“그런 애가 있어.”
잠시 의심스럽다는 듯 날 보는 화린.
그러나 금세 자기 할 말을 찾아 재잘거리기 시작했다.
“흐음. 아무튼 전 남친 생기면 딱 제 손에만 있게 할 거예요. 허튼 짓 못하게.”
“네가 전 남친이랑 헤어진 이유를 알 거 같다.”
“네?”
“너 전 남친한테 이거 해라 저거 해라 이러면서 통제 했을 거 같아.”
“……아, 안 그랬거든요.”
“말 더듬는 거 보니까 진짠가 보네?”
“아, 아니라고요!”
“아니라면서 얼굴은 왜 빨개져?”
“아, 진짜!”
빽 소리치며 부정하는 화린을 보면서 나는 낄낄 웃었다.
역시 이연주 다음으로 얘 놀리는 게 제일 재밌다니까.
흠, 이연주 하니까 피버샵 사람들도 못 본지 꽤 됐구나.
한동안 본사인 피버 에이전트에서 일하면서 아예 얼굴도 마주치지 못했으니까.
그럼 내일은 피버샵에 얼굴이라도 들려볼까?
하지만 뭐, 지금은 옆에 있는 여자부터 우선으로 생각하는 걸로.
피버샵 사람들에 대한 생각은 가슴 한 구석에 둔 채.
나는 남은 시간을 화린과 즐겁게 보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