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7화 〉 14. 미필적 고의(3)
* * *
”으, 머리야.“
모텔 구석에 놓인 의자에 앉아 아직 숙취가 가시지 않은 머리를 휙휙 털어냈다.
솔직히 좀 쫄렸단 말이지.
처음에는 그 양아치 여자한테 납치당한 건 아닐까 의심하고 있었던 상황이니까.
최다슬 걔한테 술 좀 적당히 먹으라고 그렇게 구박을 했었는데…….
나도 남 말할 처지가 아니었네.
그렇게 어지러운 머리를 부여잡으며 정신을 차리는 사이.
“물이라도 좀 갖다 드릴까요……?”
구석에서 헐레벌떡 가운을 여민 채 의자에 앉은 대표님이 물었다.
맞은편에 앉아있는 대표님은 안절부절 못하는 표정으로 내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사실 가운만 걸친 채로 드러난 허벅지가 훨씬 더 야해 보이는데 말이지…….
뭐, 나야 좋으니 모른 척 해야지.
“아, 네.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그럼 잠시만……. 꺅!”
내 말에 대표가 벌떡 일어난 순간, 다리를 삐끗한 그녀가 그대로 엉덩방아를 꿍 찧었다.
깜짝 놀란 내가 대표에게 다가갔다.
“괜찮으세요?”
“괘, 괜찮습니다.”
지척까지 접근한 내 앞으로 얼굴이 빨개진 대표가 휙 뒤돌아 냉장고로 향했다.
다행히 크게 다치진 않았나 보네.
그런데 진짜 엄청 당황하셨네.
사진 찍을 때 빼고는 감정 표현 참 드문 사람이 저러고 있자니 뭔가 신선한 기분이다.
하긴, 대표 입장에서는 당황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인사불성이 된 나를 허락도 없이 모텔에 데려왔고, 하물며 거사를 치르겠다는 마냥 샤워까지 하고 딱 마주쳤으니.
내가 기분 나빠서 신고라도 하면 어쩌나 싶은 거겠지.
역전세계이니만큼, 이런 부분에서는 남자가 법적으로 훨씬 우위에 설 수밖에 없었다.
“여, 여기 물이요.”
“감사합니다.”
대표가 건네주는 물을 받아 마시며 힐끔 그녀의 앞섶을 바라보았다.
앞서 말했듯 현재 그녀의 옷차림은 나신에 흰 가운만 달랑 걸친 상황.
나체 상태로 나와 눈이 마주친 대표가 당황해서 헐레벌떡 가운을 걸치는 모습은 아마 평생 기억에 남을 거 같다.
그 무뚝뚝한 사람이 그렇게 당황하는 꼴이라니, 사진으로 남겨두지 못한 게 안타까울 정도다.
꿀꺽.
대표가 건네준 물을 마시는 와중에도 내 시선은 잘록한 몸매에 딱 고정되어 있었다.
평소 정장이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우월한 기럭지.
허나 지금은 그 우월한 기럭지가 독이 되어 자신의 치부를 내게 가감 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딱 봐도 170 중반은 되어 보이는 커다린 키. 그에 걸맞는 튼실한 엉덩이와 길쭉한 기럭지. 아슬아슬하게 드러난, 윤기가 좔좔 흐르는 튼실한 허벅지. 막 샤워를 해서 그런지 반들거리는 피부에 유혹하듯 저 예쁘게 올라온 적당한 크기의 가슴골까지.
그야말로 조각상 같은 몸매.
내 정욕을 제하고 본다고 해도 질리지 않을 것 같은, 무척 아름다운 몸이었다.
역시 아이돌 준비하던 사람이라 그런지 몸매 하나는 발군이네.
가슴도 생각보다 큰 편이고.
나름대로 가린답시고 가리긴 했다만, 대표의 몸이 고작 가운 하나만으로 가려질 리가 없다.
내가 아는 여자들 중에서는 가장 덩치가 큰 사람이었으니까.
아, 물론 본사의 그 할망구는 여자가 아니니까 제외하고.
“……현수 씨?”
“아, 죄송합니다.”
이런, 너무 대놓고 바라봤나.
머리도 어질어질해서 그런지 어째 평소보다 판단력이 더 흐려진 느낌이다.
사실 술에 안 취해도 비슷할 거 같긴 하다만.
정신 차리고 일단 대화부터 해야할 텐데.
그런데…….
무슨 얘길 해야 되는 거지?
“대표님.”
“네, 네?!”
“잠깐 생각할 시간을 좀…….”
“아, 네! 그러시죠!”
내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당황하는 대표의 모습이 퍽 재밌다.
하지만 지금은 일단 어떻게 할지부터 생각해야겠지.
당장이라도 덮치고 싶은 본능을 겨우 억누르며 겨우 남은 이성으로 머리를 굴렸다.
솔직히 말하면 지금 상황 자체가 나한텐 땡큐다.
내 입장에서는 복덩이가 굴러들어온 셈이니까.
애초에 오늘 약속도 이런 걸 목적으로 만난 거고.
그게 설마 오늘 하루 만에 이렇게까지 진전될 거라곤 상상도 못 했지만.
그래도 아직 안심할 정도의 단계는 아니었다.
지금처럼 첫 단추가 잘못 끼워진 상황에서 본능대로 그녀를 덮쳐 버렸다가는 이후의 일이 여러모로 꼬이게 될 테니까.
무릇 훌륭한 낚시꾼은 미끼를 문 먹잇감을 바로 당기지 않는 법.
여기서 괜히 서두르다가 그르칠 필요는 없지.
일단은……. 분위기라도 좀 풀어볼까.
“뭔가 신선하네요.”
내 뜬금없는 말에 대표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네?”
“대표님이 이렇게 당황하신 건 처음 봐서요.”
“아, 그게…….”
“괜찮습니다. 누구라도 당황할 만하죠. 사실 저도 많이 당황한 상태고.”
“그, 그렇습니까? 꽤 침착해 보이시는데…….”
“이런 미인이 가운만 덜렁 입고 있는데 어떻게 침착하겠어요.”
“……!”
겨우 진정했나 싶었던 대표의 얼굴이 다시 새빨개졌다.
“죄, 죄송합니다!”
자신의 치부가 드러나는 것을 눈치챈 대표가 헐레벌떡 가운을 여몄다.
에이씨, 괜히 말했네.
“그, 뭐든 걸쳐야겠다 싶어서 짚이는 데로 입은지라……. 불편하시면 바로 화장실에서 갈아입고…….”
“안 갈아입으셔도 되는데.”
“……네?”
“예쁜데요 뭘. 저야 눈 호강하고 좋네요.”
내 말에 눈이 휘둥그레지는 대표.
나는 그런 대표의 모습을 즐겁게 바라보았다.
흐음, 이거 어째 상황이 괜찮게 굴러가는데.
이 세계에서의 내 입장을 따진다면 지금은 내가 우위에 있다고 할 수 있었다.
대표는 의식이 없는 남자를 모텔로 데리고 와서는 샤워까지 했고, 내가 정신을 차릴 때쯤에는 눈앞에서 나체로 있지 않았는가.
원래 세계라면 남자 입장에서는 누워서 떡 먹는 상황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여기는 반대로 생각해야 된단 말이지.
원래 세계에서 남자가 술에 취한 여자를 모텔로 데려와서는 샤워까지 하고 나체로 서 있다?
인생 좆망테크 타는 거지.
즉, 나로서는 몰아간다면 충분히 몰아갈 수도 있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이걸 기회로 삼을 수는 있지 않을까?
대표의 성격상 날 진짜로 덮치려고 여기까지 오진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대충 씻고 돌아갈 생각이었을 테지.
하지만 여기까지 데려왔다는 것부터가, 이미 전혀 흑심이 없는 건 아니라는 얘기다.
진짜 마음이 없었다면 날 여기 데려오고 곧바로 돌아갔을 테니까.
그러니 일단 첫 번째 목표는 ‘대표가 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이다.
그걸 확인한다면 나도 망설임 없이 움직일 수 있을 테니까.
그리고 만약 나한테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다는 걸 확인하게 된다면?
뭐…….
이건 말할 필요도 없겠지.
“저, 현수 씨.”
그렇게 홀로 야밤의 격렬한 운동을 망상하며 흐뭇해하는 사이, 가만히 있는 나를 보던 대표가 마침내 말문을 열었다.
“현수 씨는 이런 상황이 불편하지 않으십니까?”
“불편하다고요? 제가요?”
“네. 제가 말도 없이 모텔에 데리고 오지 않았습니까. 솔직히 불쾌해 하실 거라 생각했는데…….”
“그럴 리가요.”
대표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불쾌는 무슨.
지금 상황은 오히려 내가 고맙……. 아니, 미안해해야 될 입장인데.
“대표님 아니었으면 밖에서 하룻밤을 보낼 뻔 했는걸요. 어쩌면 그 여자한테 끌려가서 된통 당했을지도 모를 일이고요.”
“그건 그렇습니다만…….”
“아무튼 저는 이렇게 모텔까지 온 것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요. 이걸로 뭐라고 할 만큼 염치없지도 않고. 그러니 너무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후우, 그렇습니까.”
내 말에 대표가 그제야 긴장이 풀린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말씀해주셔서 안심했습니다.”
“설마 제가 경찰에 신고라도 하게요?”
“……솔직히 전혀 생각하지 않은 건 아닙니다.”
내 기색을 살핀 대표가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그렇지 않습니까. 저희가 연인 관계인 것도 아니고.”
역시 그 부분이 제일 걱정됐던 건가.
아무래도 이런 상황이라면 여자 입장에서는 여러모로 쫄릴 수밖에 없겠지.
참고로 이 세상에서 남자가 여자에게 먼저 달려드는 경우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이 세계의 경우 성범죄도 반대로 여자가 남자를 덮치는 역강간─이 세계에서는 강간이 되겠지만─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심지어 여성 범죄자들은 남성과의 육체적인 능력을 극복하고자 각종 흉기까지 일삼을 정도라고 한다.
그로 인해 법적인 제도도 성범죄에 한해서는 남성이 훨씬 우위에 있는 경우가 많았고.
즉,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혹여 법적으로 문제가 이어지는 경우 여성이 남성에 비해 성범죄에 훨씬 불리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나름 평화로운 세계라곤 해도 범죄가 전혀 없는 건 아니니까.
뭐, 나한테는 전혀 해당 안 되는 얘기지만.
그보다 연인 관계라…….
그렇게 따지고 가면 나로서는 걸리는 게 많은데 말이지.
아무리 남녀관념이 역전되었다고 해도 남자든 여자든 1:1로 사귀는 게 일반적인 세상이다.
반면 나는 꾸준히 만나는 여자만 해도 이미 최소 둘은 넘어가고.
그러면 내 입장에서는 뭐라고 말해야 될지 감이 안 서는데…….
“…….”
“…….”
말이 없어진 나와 마찬가지로 안절부절 못한 채 입을 닫고 있는 대표.
그렇게 한동안 서로 말도 하지 않은 채 어색한 공기가 이어졌다.
슬슬 뭐라도 말을 꺼내야…….
“현…….”
“대표…….”
그 순간 다시 동시에 열렸다 닫히는 나와 대표의 입.
거 참 타이밍 나쁘네.
“하하.”
입술을 달싹이는 대표를 보면서 나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그런 내 모습에 대표도 작게 미소를 지었다.
“괜찮으니까 먼저 말씀하시죠.”
“그러면…….”
그렇게 풀리는가 싶었던 분위기 속에서, 문득 대표가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현수 씨, 아까 저한테 했던 말 기억하십니까?”
“무슨 말이요?”
“벤치에서 했던 얘기 말입니다.”
거기까지 말한 대표가 내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깊게 반짝이는 예쁜 대표의 암갈색 동공.
나는 그런 대표의 눈빛에서 무언가 망설인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한참 동안 흔들리는 눈빛으로 날 보던 대표가 결국 시선을 맞대던 내 눈길을 천천히 피했다.
“……아니, 아닙니다.”
“네?”
“그냥 잊어주시죠. 저도 못 들은 걸로 할 테니.”
아니, 왜 갑자기 말을 하다 마는데.
그러면 괜히 내가 못할 말 한 거 같잖아.
설마 술에 취해서 되도 않는 헛소리한 건 아니겠지?
“혹시 취해서 실례라도 한 건……?”
“아뇨. 그런 건 아닙니다.”
내 말에 대표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다행히 그건 아닌 모양이군.
“제가 잘못한 게 아니면 말해주시면 안 될까요? 저도 궁금한데.”
“으음…….”
“와, 대표님. 사람 궁금하게 해 놓고 이렇게 끊기 있습니까?”
“그냥 술에 취해서 말하신 거 같으니까…….”
“그러지 말고 말씀하시죠. 저 술에 취해도 생각 없이 말하진 않습니다.”
“하지만 기억을 못 하시는 거 같은데요.”
“기억은 못 해도 거짓말은 안 합니다.”
그 말에 대표의 눈빛이 다시 한 번 흔들렸다.
“……정말입니까?”
“네. 진짜로.”
도대체 뭔 소릴 했길래 이렇게 뜸을 들이는 거람.
“……알겠습니다.”
한참을 머뭇거리던 대표가 마침내 입을 열었을 때.
이때까지만 해도 나는 아직 여유가 있었다.
실수한 것도 아니면 뭐 별 거 있겠어, 하고.
허나 이어지는 대표의 말을 듣는 순간, 나는 그녀가 뜸을 들이는 이유를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게까지 확신하신다면야.”
“네. 그래서 제가 무슨 소릴…….”
“……좋아한다고.”
“네?”
이번에는 내 눈길을 피하지 않으며.
멍하니 있는 날 향해 대표가 또박또박 말했다.
“현수 씨께서 저를, 좋아한다고 하셨습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