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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8화 〉 14. 미필적 고의(4) (118/152)

〈 118화 〉 14. 미필적 고의(4)

* * *

강하게 바라보는 대표의 시선에 머리가 하얘졌다,

“잠깐……. 제가 그랬다고요?”

“네.”

아니, 내가 좋아한다고 했다고?

취한 사이에 그런 소리까지 해 버린 건가?

“방금 전에 그러셨죠.”

방금 전 눈빛이 흔들리던 대표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지금 내 눈앞의 그녀는 날 어느 때보다 올곧은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대표를 바라보는 내 심정은 패닉 그 자체.

"기억은 못 해도 거짓말은 안 한다고."

……어쩌지?

그래도 이런 건 좀 분위기 잡고 말하고 싶었는데.

거기다 내 여자관계도 복잡한 이상 나름대로 시간을 들여서 천천히 얘기하고 싶기도 했고.

그런데 하필 술에 취한 상태로 아무렇게나 고백이라니.

이건 내가 의도한 바가 아닌데…….

"어, 그게……."

"후후."

내 당황한 모습을 보며 대표가 작게 웃었다.

"그런 표정이 보고 싶었습니다."

"……의외로 짓궂은 면도 있으시네요."

”저만 당하면 억울하지 않겠습니까."

지금의 상황이 꽤 즐거운 것일까.

나를 바라보는 대표의 미소가 한층 더 짙어졌다.

"어쩐지 상황이 반대가 되어 버렸군요.”

"하하……."

그 말에는 나도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확실히 대표 말대로다.

방금 전만 해도 그렇게 당황하던 대표가 이제는 오히려 더 침착한 반면, 이 예상치 못한 상황 속에서 나는 뭐라 대답해야 할지 골머리를 썩히고 있었으니까.

아니, 그런데 이거 진짜 뭐 어떡해야 되냐.

나는 여유로운 표정을 짓는 대표를 보며 고민에 빠졌다.

만약 내가 이 자리에서 인정하고 제대로 고백을 한다고 치자.

분위기 상 지금 내가 그렇게 해도 수민은 적어도 불쾌해하거나 하지는 않을 거 같긴 하다.

아무렴 술에 취해 인사불성이 된 사람을 호텔까지 끌고 온 사람이지 않은가.

적어도 나에게 어느 정도 흑심이 있다는 건 쉽사리 추측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 고백을 한다고 쳐도 상황이 좋게 흘러갈지는 모르겠단 말이지.

만약 내가 이 자리에서 고백을 한다 치자.

그러면 나는 수민과 진짜 '연인' 관계가 된다는 거다.

그 말인 즉슨, 단순히 그녀를 섹파로만 여길 수는 없게 된다.

말 그대로 사귀자는 뜻이니까.

그리고 그건 수많은 섹파가 있는 나로서는 여러모로 곤란한 일이기도 했다.

과거의 나, 막 이 정조가 역전된 세계로 넘어왔을 시절의 나였다면?

고민할 필요도 없이 그녀의 수민을 이 자리에서 그대로 덮쳤을 거다.

이 세계에서 살기로 결심했던 그 때는 그저 난봉꾼으로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 싶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의 나는 그 때와는 또 다르다.

특히 제주도 여행 직후 화연이 보여주었던 태도.

그게 계속해서 마음에 걸렸다.

사실 화연 외의 두 사람도 묘하게 대하는 느낌이 달라졌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따로 나한테 얘기한 건 없지만, 아마 내가 여행을 간 사이에 셋이서 무슨 얘기를 나누지 않았을까.

뭐, 사실 어차피 여행 이후로는 너무 많은 여자관계는 쌓지 않을 생각이긴 했지만.

아무튼, 그래서 딱 대표님 이후로는 더 여자관계를 맺지 않을 생각이었지만…….

막상 대표님 입장은 또 다를 수도 있으니까.

내가 이토록 신중한 것도 바로 그 부분에 있었다.

단순히 내 입장만 가지고 밀어붙일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이 세상은 기본적으로 일처일부제.

연애도 둘 이상 사귀는 건 바람을 피는 게 된다.

아무리 역전세계라고 해도.

지금껏 만난 섹파들이야 내가 못 박은 것도 있기도 하고 적당히 넘어가긴 했다만, 그걸 대표님도 납득할 거라 생각되진 않았다.

하물며 대표님은 기본적으로 남자에게는 면역이 없는 사람이 아닌가.

과거 아이돌 연습생 입장에서야 연애를 할 수 없다고는 하지만, 그 전에도 남자 한 번 안 사귀었다고 했고.

그러니 나로서는 여러모로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뭘 고민하시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꽤 오랫동안 고민하는 사이 결국 대표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저로서는 여기서 제대로 결론을 내고 싶군요.”

나를 향해 대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 그렇다면 현수 씨가 대답하기 쉽게 저부터 말하죠.”

아니, 나는 아직 생각 정리가 안 됐는데?

여전히 망설이는 내게 한 발자국 다가오는 대표.

덜 마른 머릿결에서 물방울이 톡 떨어지는 게 보였다.

“저는 현수 씨를 한 명의 남자로 보고 있습니다.”

“그, 그런가요.”

또 한 발자국 가까워지는 대표.

지척까지 다가온 대표님의 오밀조밀한 이목구비가 눈앞에 보였다.

대표님이 단발에 가까운 머릿결을 한 손으로 쓸어 넘겼다.

“저는 적어도 현수 씨에게 이성적인 관심은 있다는 얘기입니다."

”어, 저기…….“

세 발자국 만에 어느새 내 코앞까지 다가온 그녀.

무릎을 굽혀 나와 눈을 맞춘 그녀가 잠시 날 응시하기 시작했다.

”이, 이런 건 익숙하지 않지만…….“

쑥스러운 표정으로 그녀가 영문 모를 소리를 중얼거렸다.

”대, 대표님?“

”후우…….“

내가 무슨 뜻인지 묻기도 전에 그녀의 양손이 내게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살짝 떨리는 듯한 숨소리와 내 목덜미를 어루만지는 부드러운 손길.

눈앞에 붉게 물든 뺨과는 대조적으로 잔뜩 정색한 대표의 얼굴.

누가 봐도 서툴기 그지없는 태도였지만……. 그래서 더 매력적인 모습잉덨다.

“……뭔가 부끄럽군요.”

“네?”

“이런 건 저도 처음이라…….”

거기까지 말한 대표가 작게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이런 건……. 여자가 리드해야 하겠죠.”

하, 진짜 미치겠네.

이 사람은 알고 있을까.

오히려 이런 ‘여성’스러운 모습이 나를 더 흥분되게 한다는 것을.

“그, 일단 대표님 생각은 잘 알겠습니다.”

당장이라도 터질 것 같은 아랫도리를 겨우 숨긴 채 더듬더듬 말문을 열었다.

“그래도 일단은 먼저 할 말이…….”

“혹시 여친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네? 어, 그게……. 여친이라고 해야 할지 뭐라고 해야 할지.”

“여친은 아니란 겁니까?”

“그, 글쎄요.”

“현수 씨 답지 않게 우유부단한 대답이군요.”

“저기, 일단 오해하지 말고 들어주세요.”

당황한 내가 그러거나 말거나 목덜미를 어루만지는 대표의 손길이 점차 야릇해져 간다.

괜시리 조급해진 나는 다급하게 말을 쏟아냈다.

“저도 수민 씨를 좋아합니다. 예, 좋아는 해요. 그런데 제가 말했다시피 다른 여자관계도 있고, 음, 이건 말하기가 좀 그런데, 아무튼 지금 상황이 좀 복잡해서요.”

“…….”

“아니, 물론 저도 수민 씨가 좋습니다! 좋긴 한데, 그, 제가 지금 상황이……. 읍!”

허나 내 변명은 더 이어지지 못했다.

내 목을 꽉 붙잡은 대표가 그대로 입술 박치기를 시전해 버린 것이다.

“흡!”

곧이어 순식간에 입 안으로 느껴지는 박하향.

“우으읍!”

“츄릅, 하으읍…….”

내 당황한 기색을 놓치지 않으려는 듯, 수민의 혀는 사정없이 내 입안으로 침투하고 있었다.

아니, 그보다 뭔 첫 키스로 혀를 넣어?

남자 경험 없다는 사람이 뭐가 이렇게 대담해?!

그래도 정조가 역전된 세계이니만큼 성욕은 성욕대로 있다 이건가?

아무튼 이런 상황에서 이미 내 아랫도리는 당연히 폭발하기 직전.

여기까지 온 이상 더 이상 참는 건 무리였다.

‘씨발, 나도 모르겠다……!’

속으로 외마디 욕을 중얼거리며 나는 그녀의 욕망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하읍……!”

갑자기 적극적으로 변한 내 태도에 수민의 눈이 동그랗게 뜨이는 게 보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본능대로 혀를 움직였다.

왼손으로는 수민의 허리를, 오른손으로는 뒷통수를 잡은 채.

“응……. 츄릅…….”

그런 내 반응을 기다렸다는 양 수민의 혀놀림도 한층 유연하게 변했다.

그렇게 우리는 잠시 본능에 취해 마구잡이로 서로의 혀를 탐했다.

마치 짐승처럼.

스르륵.

허리를 감은 손에서 유일한 방파제였던 흰 가운이 떨어지는 게 느껴진다.

그 순간 잠시 흐려졌던 이성이 확 돌아왔다.

언제까지고 이러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아직 티끌만큼 남은 양심이 그래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었다.

결국 극한의 인내심을 발휘한 나는 가까스로 수민의 얼굴을 떼어냈다.

“푸핫!”

홱 떨어진 수민의 입가에서 끈적한 타액이 주르륵 선을 만들다 떨어졌다.

“후읏…….”

입술을 뗀 수민이 아쉽다는 듯 상기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참자…….

일단 지금은 참아야 해.

다시 한 번 덮치고 싶은 것을 겨우 참으며 나는 떨어지는 침을 닦아냈다.

“후후.”

그런 날 보며 수민이 미소를 지었다.

반쯤 억지로 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바라보는 수민의 눈빛이 묘하다.

그렇게 이지적이었던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드디어 솔직해지셨군요.”

“아, 아니, 지금 건 저도 모르게 그만……. 이 아니라! 이, 일단 제 얘길 들어주세요!”

“여기까지 와서 뭘 더 말씀하시려는 건지.”

쓴웃음을 지은 대표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한 발자국 물러났다.

“뭐, 일단 들어는 보겠습니다.”

그러고는 날 향해 말해보라는 듯한 제스처를 취하는 대표.

뭐야, 이 여유로움은.

이 사람 진짜 남자 경험 없는 거 맞아?

“무슨 말을 하고 싶으신 겁니까?”

“아니, 그러니까 좋다는 건 인간 대 인간으로써 좋다는 얘기였는데!”

“그 말은……. 절 여자로 보진 않았다, 이런 얘긴가요?”

“그, 그런 건 아니지만…… 그리고 방금 말했잖아요! 여친은 아니지만 다른 여자가……!”

“그건 아직 여친은 아니란 얘기겠죠?”

정곡을 찌르는 수민의 말에 절로 말문이 턱 막혔다.

확실히 내가 제대로 걔들한테 여친이라 말한 적은 없긴 한데…….

아니, 여행 이후로는 말했던가……?

“저는 기회가 있을 때 놓치지 않는다는 주의입니다.”

패닉에 빠진 나를 향해 대표가 말을 이어갔다.

“먼저 기회가 온 이상 얼굴도 모르는 여자한테 현수 씨를 뺏길 생각은 없습니다.”

“아, 아니…….”

“싫으면 지금 확실히 싫다고 해 주세요.”

“…….”

……이 사람 진짜 추진력 하나는 쩌네.

단순히 일만 척척 해내는 게 아니라 실제로 성격이 이런 건가.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무작정 아니라고 말하기도 애매하고…….

“싫은 건 아닌데…….”

뭐, 여기까지 온 이상 나는 정당방위라고.

솔직히 난 최선을 다했다고, 진짜로.

“잘 됐네요.”

사실상의 항복 선언에 다시 한 번 미소를 짓는 수민.

이제는 거리낄 것 없다는 듯 수민이 발끝에 걸친 가운을 완전히, 천천히 벗어냈다.

“…….”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대표의 모습이 눈앞에 펼쳐졌다.

가슴과 엉덩이 자체는 그리 크지 않다.

허나 군살 하나 없이 완벽한 비율을 지닌 그녀의 몸은, 지금껏 육체관계를 맺은 다른 섹파들과는 또 다른 기묘한 매력을 뽐내고 있었다.

아마도 연습생 출신이었던 것도 저 황금 밸런스에 한 몫 하는 거겠지.

한 번 다듬은 몸은 쉽게 어디 가지 않는 법이니까.

“……저, 저기.”

지긋이 바라보는 내 시선이 부담스러웠던 것일까.

다시 원래 세계의 소녀 마냥 수민이 자신의 비부와 가슴을 슬쩍 가렸다.

“저만 벗으면 좀……. 부끄럽습니다만.”

이 사람 자꾸 결정적인 데서 부끄럼을 타네.

대담하다 싶다가도 계속 이런 원래 세계의 여자 같은 반응을 보여주니 괜히 나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음, 글쎄요.”

엉거주춤하게 서 있는 수민을 보며 나는 씨익 웃었다.

아, 이건 못 참지.

“언제는 여자가 리드해야 된다고 하셨으면서.”

“네?”

“이런 건 여자가 벗겨주는 게 국룰 아닌가요?”

“그, 그 말은…….”

“자요.”

나체로 서 있는 수민을 향해 나는 양 팔을 쫙 벌렸다.

“마음대로 하시죠.”

“…….”

내 당돌한 태도에 묘한 표정을 짓던 것도 잠시.

곧이어 그녀의 눈빛이 돌변하기 시작했다.

“마음대로 하라는 말, 후회하게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언제 부끄러워 했냐는 듯 수민이 자신의 몸을 가리던 손을 내게로 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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