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2화 〉 15.5. 좋아하지만 할 수 있다고는 안 했다(1)
* * *
꽃샘추위가 슬슬 끝이 나고 완연히 봄기운이 몰려오는 2월 중순.
꽃가루가 흩날리고, 벛꽃이 만개한 밤거리에는 수많은 커플들이 웃음꽃을 피우며 거리를 가득 메우는 게 보인다.
허나 화사한 봄날의 거리와는 다르게, 내 기분은 다소 싱숭생숭한 기분이었다.
“오빠!”
……하아.
결국 이 날이 오고야 말았구나.
“오빠아~!”
저 멀리서 다가오는 소녀, 주화린을 보며 나는 억지미소를 지었다.
완연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찰싹 달라붙는 화린.
거의 반 년 만에 보는데도 여전한 모습이다.
“자.”
그런 그녀를 향해 나는 들고 있던 꽃다발을 내밀었다.
“졸업식, 축하한다.”
***
결국 화린의 졸업식 날짜만큼은 나도 도저히 무시할 수 없었다.
주화연을 생각해서 그냥 얼굴에 철판 깔고 모른 척 할까 싶기도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좀 아니다 싶었다.
따지고 보면 세상이 바뀌고 내가 처음으로 만난 사람은 그 누구도 아닌 주화린이었으니까.
“왜 아직도 교복이야?”
내게 팔짱을 낀 채 희희낙락하는 화린을 보며 입을 열었다.
“졸업식 끝난 지 한참 된 거 아냐?”
“이제 입을 일 없잖아요. 마지막인데 오늘 하루는 학생 기분으로 있고 싶어서요.”
“가족들은?”
“당연히 진작에 다 축하해주고 집에 갔죠.”
현재 시각은 저녁 11시.
이미 졸업식은 끝나고도 한참은 지난 시각.
아무리 그래도 섹파의 동생인 화린의 졸업식에 참석하는 건 부모님이나 화연에게나 눈치가 보일 수밖에 없었다.
물론 화린도 그것을 의식했기에 딱히 내게 섭섭해 하지는 않았다.
그렇기에 화린의 모든 일정을 마친 지금, 이 시각에 와서야 나는 이렇게 그녀의 얼굴을 보게 된 것이다.
나로서는 놀다가 아예 나와의 약속을 잊어버렸으면 했지만…….
뭐…….
결국은 이렇게 됐군.
“친구들이랑 안 놀고?”
“당연히 다 놀고 이렇게 온 거잖아요. 지금이 몇 신데.”
“으음…….”
어떻게든 그 쪽으로 화제가 넘어가지 않게 이런저런 말을 꺼내지만 그것도 슬슬 한계.
결국 다 떨어진 화젯거리에 나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물론 나도 이게 다 부질없다는 건 안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안 하면 영 불편해서 견딜 수가 없단 말이지…….
‘무서워서 지금 어디 가냐고 물어보지도 못하겠어…….’
현재 나는 내 팔뚝을 붙잡고 있는 화린에게 반 강제로 끌려가고 있는 상황.
허나 그럼에도 어디 가냐는 말이 쉽사리 입에서 떨어지지가 않았다.
“…….”
“…….”
함께 걸으면서 우리는 서로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빠.”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결국 먼저 침묵을 깬 것은 화린이었다.
나는 그런 화린을 떨떠름한 기분으로 바라보았다.
“어, 어어.”
“제가 어디 가는지 물어보지도 않네요?”
“…….”
“안 궁금해요?”
아니, 사실은 뭔지 알 거 같아서 묻기가 무서운데.
“어디 카페라도 가는 거 아니야?”
직설적으로 말하면 곧바로 예상대로 흘러갈 거 같아서 일부러 틀린 답을 던졌다.
그런 내 대답에 화린이 얼굴을 찌푸렸다.
“이 시간에 카페 다 문 닫는데 무슨 카페예요.”
“으음…….”
“모른 척 하지 마요, 오빠.”
그리 말하며 내게서 팔짱을 탁 풀고는 떨어지는 화린.
그러고는 날 지긋이 바라보는 게 아닌가.
“오히려 이런 건 오빠가 더 잘 알 거 같은데.”
“……저기, 화린아.”
묘해지는 분위기를 참지 못한 나는 주변의 벤치를 가리켰다.
“우리 일단 저기 앉아서 얘기나 좀 하다 가지 않을래?”
“아뇨.”
허나 그런 내 태도에도 불구하고 화린은 그 자리에서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이런 내 태도를 예상한 듯 태연한 표정.
그런 한편으로는 물러설 수 없다는 듯 결연함이 잔뜩 묻어나 있었다.
“전 갈 거예요.”
어딜 간다는 것인지 여기까지 와서 묻는 것도 한심한 짓이겠지.
그렇기에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 날.”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화린이 천천히 입을 뗐다.
“놀러가서 했던 얘기 기억하시죠?”
화린과 내가 마지막으로 만난 날.
언니인 화연까지 합세해서 계곡으로 놀러가고, 화린에게 화연과의 관계를 들켜버린 날.
그 날을 분기로 나와 화린의 관계는 묘해졌다.
실제로 그 날 이후, 이렇게 화린을 보는 게 처음이었으니까.
그럼에도 이렇게 이 자리에서 그 불편했을지 모를 날의 일을 먼저 꺼낸다는 것은, 결국 더 이상 화린과의 관계를 피할 수 없다는 걸 뜻했다.
아니, 사실은 나도 진작에 알고 있었다.
지금까지 죄책감과 불안함에 화린의 솔직한 감정을 피했을 뿐인, 내 이기적인 욕심에 불과했을 뿐.
그저 순간을 피하기 위해서 계속 비겁하게 있었던 것에 불과했다.
그러니까.
“……그래.”
이제는 더 이상 모른 척 해서는 안 되겠지.
“기억하지.”
그 날의 일을 떠올리며, 나는 순순히 그녀가 원하는 대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너 처음에 세컨드니 뭐니 할 때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분위기를 띄우고자 일부러 살짝 가벼운 어투로 툭 운을 던진다.
그런 내 말투에 날 노려보던 화린의 눈가도 살짝 풀리는 게 보였다.
“치. 저도 나름 고심해서 한 말이었거든요?”
“그렇겠지.”
“그 이후로 저 오빠한테 한 번도 연락 안 했잖아요.”
그건 나도 마침 의아하게 여기던 부분이었다.
내가 연락을 안 한 것도 있지만, 실제로 화린도 지금까지 내게 연락을 해오지 않았다.
딱히 내가 연락하지 말란 얘기를 한 것도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그랬던 거야?”
내 물음에 화린이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잠시 망설이던 기색도 찰나, 화린이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못 참을 것……. 같더라고요.”
“뭘?”
“어차피 저랑은 안 할 거면서, 언니랑은 그렇게 재밌게 놀고, 그러면서도 제 앞에서는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보면…….”
그리 말하며 눈을 질끈 감는 화린.
그제야 나는 화린이 지금까지 연락하지 않은 이유를 깨달았다.
‘그랬구나.’
자신은 나에게 아무 어필도 하지 못하는 상황인데, 반대로 자신의 언니는 동경하는 오빠와 그런 짓을 해대고 있으니.
아마 화린으로서는 속 터지는 광경이었으리라.
“아무튼.”
분한 표정으로 가만히 분을 삭이던 것도 잠시. 곧이어 눈을 뜬 화린이 천천히 말문을 이어갔다.
“그래서 꾹 참고 기다렸어요. 오빠가 딱히 연락하지 말라고 한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저 오빠한테 연락 한 번 안 했어요. 저도 나름대로 각오한 게 있었으니까.”
화가 난 듯하면서도,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의 화린.
허나 나는 그런 화린의 모습에도 불구하고 잠자코 그녀의 말을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지금 저 울분에 찬 말을 다 듣는 것이야말로, 지금껏 피해온 내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었으니까.
“이렇게 성인이 되고 당당하게 오빠에게 요구할 나이가 될 때까지, 운동도 공부도 열심히 하면서 기다렸어요. 오빠가 저를 귀여운 동생이 아닌, 한 명의 여자로 볼 수 있게 하려고.”
거기까지 말한 화린이 성큼성큼 내게 다가왔다.
손을 뻗으면 바로 닿을 수 있는 거리.
허나 여전히 주먹을 꽉 쥔 채로, 나를 지긋이 올려다본다.
내 눈앞에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을 짓는 화린의 눈망울이 보였다.
“그러니까…….”
다시 한 번 흔들리는 입가.
하지만 그 애처로운 기색에서 망설임은 느껴지지 않는다.
“여기까지 와서 안 된다는 말은 하지 마요.”
그렇게, 화린은 오랫동안 참았던 한 마디를 전했다.
“언니는 되면서, 저는 안 된다고 하지 마요.”
짓씹듯 말하는 화린의 말.
그 말이 끝난 뒤에야 나는 그녀를 품에 와락 안을 수 있었다.
“미안.”
화린을 품에 안은 채 나는 다시 한 번 말했다.
“미안해.”
은근히 허당인 주제에 예쁘고, 또 선생님이라는 반듯한 직업을 지닌 화연이다.
그런 언니답게 화린의 외모도 꿀리지 않는 훌륭한 미모의 소유자였다.
하지만 그런 언니와는 반대로, 그저 미성년자라는 것만으로 좋아하는 사람을 뺏기게 된 화린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분명 알고 있었을 텐데.’
그 날의 여행이 분기점이었다고는 하지만, 화린도 중간에 나와 화연의 관계를 대강 눈치챈 상태였다.
그런데도 티만 조금 냈을 뿐, 나한테 대놓고 화를 내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앞에서 웃어야 되는 화린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마지막으로 헤어지고 난 뒤, 도대체 어떤 심정으로 칼을 갈아온 것일까.
나로서는 그런 화린의 마음을 짐작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이젠……. 저도 어른이에요.”
내 품에 안긴 채 화린이 작게 중얼거렸다.
“저는 이제 할 얘기 더 없어요. 더 기다리지도 않을 거예요.”
“그래.”
“오빠도 저한테 그랬잖아요. 미성년자라서 안 된다고.”
“그랬지.”
“하지만 이젠 아니에요.”
“…….”
“그러니……. 이젠 오빠가 대답할 차례예요.”
“응.”
솔직한 마음을 부딪혀왔으니, 이제는 내가 솔직하게 답할 차례겠지.
마음을 굳힌 나는 품에 안긴 화린의 몸을 슬그머니 떼어냈다.
“화린아.”
내 부름에 화린이 나를 지긋이 올려다보았다.
거기에는 똘망똘망한 눈동자로 내 말을 기다리는 화린의 모습이 보였다.
‘그냥 귀여운 동생이라고만 생각했는데.’
분명 지금까지는 그랬을 터.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그렇게 보려고 해도 그리 보이지가 않는다.
지금 눈앞에 애절하게 나를 바라보는 화린의 모습은, 내가 의식적으로 동생이라 여겼던 화린이 아닌 한 명의 ‘여자’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며 망설이던 것도 잠시.
“난 누구와도 사귈 생각은 없어.”
나는 있는 그대로 그녀에게 하고자 하는 말을 솔직하게 전달했다.
“한 번 안은 여자를 소홀히 대할 생각도 없지만, 그렇다고 내가 헤프다는 건 부정할 수 없어. 너는 모르겠지만 이미 너희 언니 말고도 다른 관계의 여자들이 여럿 있고.”
지금 관계를 맺은 섹파들에게는 꼭 전했던 말.
어찌 보면 내 치부를 다 까발리는 것과 다를 바 없는 말.
하지만 이 말을 전한다는 것인즉슨, 이제부터는 나도 화린을 여자로 보겠다는 선언이기도 했다.
“그래도 괜찮겠어?”
“네.”
그런 내 말에도 불구하고, 화린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예상하고 있었는걸요.”
“그랬구나.”
“저는 오빠가 첫 사랑이에요. 첫 남자는 오빠 말고는 생각도 못 하겠는걸요. 다른 여자가 있어도 괜찮다고 생각될 정도로요.”
거기까지 말한 화린의 얼굴이 빨개졌다.
“그래도…….”
홍당무가 된 얼굴로 날 보던 화린이 양팔을 쫙 벌렸다.
“오늘밤만큼은……. 제 남자가 되어주세요.”
내 품에 얼굴을 비비며 화린이 작게 속삭이는 화린.
나는 그런 화연을 다시 한 번 기꺼이 안아주었다.
“단 하루만이라도 좋아요. 오늘만은 저만을 바라봐주세요. 저는 그걸로도 충분해요.”
“정말 괜찮겠어?”
“네. 그게 지금까지 기다린 제 소망이에요.”
그래, 정녕 그걸로 만족한다면.
나도 더 이상 망설일 필요는 없겠지.
“알겠어.”
그리 대답하는 것과 동시에 품에 안긴 화린을 더욱 강하게 끌어안았다.
그런 내 반응에 호응하듯 내 등을 껴안은 화린의 힘도 더욱 강해졌다.
주변을 바라보는 시선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봄날 오후의 따뜻한 기운을 받으며, 우리는 한동안 가만히 서로의 체온을 느낄 따름이었다.
***
그렇게 솔직한 화린의 심정을 받아준 뒤.
나는 쑥쓰러워 얼굴조차 마주치지 못하는 화린의 손을 잡은 채 내 자취방으로 이동했다.
뭐, 처음에는 모텔이라도 갈까 했지만…….
아무래도 교복을 입은 채로 갈 수는 없었으니까.
“…….”
도대체 얼마나 긴장했는지 맞닿은 손에서 땀이 진득하게 묻어난다.
심지어 우리 집에 도착할 때까지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
그렇게 마침내 현관문 앞까지 도착한 순간.
“아으으…….”
비밀번호를 누르고 문을 여는 사이 화린이 신음성을 흘리며 발을 동동 굴렀다.
그 귀여운 행동에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피어났다.
‘어째 나까지 풋풋해지는 기분이네.’
하긴, 지금까지 만난 섹파들도 몇 명을 제외하면 거의 다 남자 경험이 있는 애들이긴 했다.
더불어 거의 1년간 지낸 녀석들이라 그런지 색다른 기분은 많이 사라진 상태고.
물론 그게 싫다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렇게 풋풋한 감성으로 하는 것도 꽤 오랜만이네.
“왜, 긴장돼?”
“당연히 긴장되죠…….”
“하하.”
안절부절 못하는 화린의 모습에 웃으며 현관문을 열었다.
방문이 열리기 무섭게 행여 닫힐세라 화린이 쏙 방안으로 들어갔다.
탕.
현관문을 닫기 무섭게 나는 그녀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앗……!”
내 접근에 슬금슬금 물러나던 것도 잠시.
곧이어 당도한 벽 앞에서 도망칠 길을 잃는 화린.
쿵.
한 손으로 벽을 짚은 채, 나는 교복 차림의 화린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교복 차림이라 그런가 배덕감이 장난 아니네.
성인인 걸 아는데도 나쁜 짓 하는 기분이다.
"현수 오빠…….”
기대감이 가득한 한편, 일말의 기대감이 남아있는 표정.
그러면서도 나를 향해 양팔을 쭉 뻗는다.
“와 주세요……. 오빠라면, 저보다 더 익숙할 테니까……."
그런 그녀를 향해 나는 고개를 기울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