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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9화 〉 16. 이미 끝난 싸움(1) (139/152)

〈 139화 〉 16. 이미 끝난 싸움(1)

* * *

화린과 정사를 하고 며칠 뒤.

나는 익숙한 카페에 앉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딸랑.

카페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보이는 익숙한 얼굴.

두리번거리던 상대방도 날 발견하고는 다가오기 시작했다.

“오랜만이네.”

어느덧 내 앞에 다가온 그녀, 박소진이 날 보며 입을 열었다.

인사를 건네는 그녀에게 나는 말없이 앉으라는 손짓을 보냈다.

“그래, 잘 지냈어?”

맞은편에 털썩 앉으며 알쏭달쏭한 미소를 짓는 소진 누나.

하지만 그보다 먼저 눈에 띄는 게 있었다.

“머리 잘랐네요.”

묶을 정도로 길었던 검붉은 머리가 어느새 어깨에도 닿지 않을 정도로 짧아져 있던 것이다.

나는 이미지가 확 바뀐 그녀를 신기한 기분으로 바라보았다.

확실히 전의 긴 머리도 좋지만 지금 같은 머리도 꽤 잘 어울리네.

“응? 아, 뭐.”

살짝 놀라 묻는 날 보며 소진이 별 거 아니라는 듯 자신의 뒷머리를 슥 흔들었다.

“너무 기니까 일할 때 거슬리더라. 귀찮아서 그냥 잘랐지.”

“진짜 바쁘긴 바빴나 보네요. 그렇게 연락해도 바쁘다고만 하더니.”

“당연하지. 설마 만나기 싫다고 그냥 한 소리겠어? 네가 일감 물어다준 것 때문에 요 몇 달 간은 거의 전쟁이었어.”

“그래도 얼굴 정도야 볼 수 있는 거잖아요.”

“뭐야? 너 설마 삐졌냐?”

뚱한 내 반응에 소진이 피식 웃었다.

삐졌냐고?

그래, 솔직히 조금 삐지긴 했다.

‘아무리 그래도 얼굴 한 번 안 본 건 너무하잖아.’

내가 마지막으로 그녀와 얼굴을 본 게 작년 8월 초.

현재 날짜는 2월 말에 달하는 시기.

즉 반 년, 거의 7개월에 가까운 시간 동안 나는 그 동안 이 누나와 얼굴 한 번 맞대지 못했던 것이다.

물론 그녀가 내가 이전에 말해준 ‘피버 에이전트’ 건의 문제로 바쁘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아무리 바빠도 그렇지, 그렇게 몸까지 섞었으면서 진짜 한 번도 안 만나줄 줄은 생각도 못 했다.

뭐, 나도 주 자매와 여행을 간 이후로 여러모로 고민이 많아서 연락이 뜸해진 것도 사실이다.

항상 내가 먼저 연락을 하면 바쁘다고 나중에 얘기하자는 말만 했으니까.

‘그 이후로 나도 괜히 오기가 생겨서 연락은 안 했다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래도 어떻게 진짜 한 번을 연락을 안 하냐고!

주변 정리를 하려고 해도 직접 마주보고 얘기를 하든 해야 정리를 할 거 아냐!

“삐질 게 뭐가 있다고 그래요.”

하지만 여기서 속내를 다 드러내는 건 악수일 뿐.

화가 난다고 열을 내 봤자 보고 싶었냐면서 득의양양하게 웃을 게 뻔하다.

그런 꼴을 보기 싫었던 나는 억지로 태연하게 대꾸하며 말을 돌리려 했다.

“그보다 바로 본론으로 들어…….”

“잠깐.”

허나 그런 날 보며 소진이 손을 들었다.

“그 전에 먼저 하고 싶은 얘기가 있는데.”

“네? 무슨 얘기요?”

“뭔 소리야. 기억 안 나? 전화로 사적인 얘기도 있다며.”

그래, 사적인 얘기야 지금도 가득하지.

다만 이 흐름에서 그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을 뿐.

“그래서 하고 싶은 얘기가 뭔데?”

그래, 저 얼굴.

마치 무슨 말을 할지 알고 있다는 것 마냥 실실 웃고 있는 저 미소!

내가 저 꼴을 보기 싫어서 나중에 얘기하려고 한 거라고!

“……저희 관계 말이에요.”

허나 먼저 운을 띄우는데 억지로 무시하고 내 얘기만 할 수도 없는 노릇.

결국 포기한 나는 준비했던 이야기를 꺼내기로 했다.

“개인적으로 그 부분을 좀 정리하고 가고 싶어서요.”

“흐음.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네.”

“그……. 알다시피 저희가 일반적인 관계는 아니잖아요.”

“일반적인 관계가 아니다?”

“그러니까……. 알잖아요.”

“으~음. 모르겠는데?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 줄래?”

“아, 좀!”

이 사람 내가 뭔 얘기할지 다 알면서 이러네.

“됐으니까 쉽게 좀 가자고요!”

“큭큭, 예민하게 굴기는.”

능글맞기 그지없는 태도에 작게 소리를 지르자 그녀의 미소가 한층 더 짓궂어졌다.

“설마 했는데 진짜 삐졌구나?”

“네?”

“전엔 쿨한 척은 다 하더니. 너도 이럴 땐 남자다 이거네? 귀엽기는.”

……아니, 잠깐만.

뭔가 뉘앙스가 이상한데.

마치 내가 꼭 삐지길 바랬던 것처럼…….

‘아니, 설마 지금 밀당이라고 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거 아니야?’

속으로 떠오르는 불길한 예감에 억지로 고개를 휙휙 내저었다.

아무리 그래도 반 년이 넘게 얼굴 한 번 안 맞댄 사이인데 설마 이런 상황에서 그런 식으로 생각할 리가 있겠는가.

애초에 섹파 관계에서 밀당이니 뭐니 생각하는 거 자체가 머릿속이 꽃밭이라는 건데, 적어도 내가 아는 박소진이라는 더더욱 그럴 리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불길한 느낌은 뭘까.

어쩌면 진짜로…….

“그래, 그러니까 그거지?”

“아뇨, 누나. 그러니까…….”

불안한 마음에 나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든 내 할 말을 하기로 했다.

곧이어 나와 소진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

“이젠 슬슬 그만하고 사귀자 이거지?”

“이제 섹파는 그만두고 일적인 관계로만 지내죠.”

그리고 동시에, 우리는 서로를 보며 그대로 굳을 수밖에 없었다.

“……응?”

“어?”

생각지도 못한 그녀의 말에 내 머리는 그대로 정지.

누나도 나와 마찬가지였는지 한동안 입만 뻐끔거리며 멍하니 날 바라볼 따름이었다.

‘아니, 이건 꽃밭보다 더한데?’

말이 안 되잖아! 누가 반 년이 넘게 밀당을 하냐고!

애초에 우리가 언제 사귀느니 마느니 했는데!

먼저 정신을 차린 내가 어안이 벙벙한 그녀를 향해 소리쳤다.

“갑자기 뭔 소리에요?!”

“어?”

내 일갈에 그녀도 정신을 차렸는지 겨우 나와 눈을 마주쳤다.

그렇다 해도 그로기 상태에 빠진 그녀의 눈은 이미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지만.

“우리 그냥 겨우 두 번 같이 잔 거 아니었어요? 근데 무슨 사귀느니 마느니!”

“그거야 그런데……! 아, 아니, 그래도 보통 이런 흐름이면 그거 아냐? 기다리는 것도 지쳤다고, 보통 사귀자고 매달리는 게 수순이잖아?!”

“네? 누가요?”

“그러니까 현수 네가……!”

“……아닌데요?”

“그럴 리가……. 하, 하지만 지금까지 만난 남자들은 전부…….”

혼란에 빠져 뭔지 모를 소리를 중얼거리는 소진 누나.

그 말을 듣고 있자니 도대체 이 누나가 왜 이런 착각을 했는지 조금 이해가 가는 듯했다.

‘하긴 이 누나, 엄청 미인이니…….’

박소진, 그녀는 소설 속 히로인 중 한 명이다.

즉, 그녀의 외모는 세계관 탑 티어라 할 수 있었다.

그 말인 즉슨.

‘남자는 그냥 아무나 골라서 잡으면 됐다는 거겠지.’

캐나다인의 혼혈인 그녀가 이 세상에서 저런 외모로 살아왔다면, 아마 그녀에게 달려드는 남자들이 한 트럭은 됐을 터.

그렇다면 소진은 굳이 남자를 위해 헌신하는 쪽이 아닌, 들이대는 남자들 중 하나를 골라서 받으면 되는 입장이었을 것이다.

그러니 아마 그녀 입장에서는 나도 기다리다 보면 알아서 붙잡을 거라 여긴 걸 테고.

이전에 살았던 세상의 이성 관계를 생각해 보면 답이 나온다.

원래 세상에서 이성 간 먹이사슬의 최정점이 초절정 미녀였는가?

아니, 그렇지 않다.

남녀가 둘 다 아름답다고 할 때, 정말로 극한의 꿀을 빨았던 건 여자 쪽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지.’

원래 세상에서의 미녀와 미남을 비교해보라고 한다면, 아마 나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단연코 후자 쪽이 조금 더 이득을 보고 있다고.

‘그리고 이 세상은 그 개념이 정 반대인 거고.’

그렇게 따지고 보면…….

지금이라면 아마 눈앞의 이 누나도…….

“후우.”

대충 사태가 왜 이렇게 된 건지 이해가 되니 절로 한숨이 푹 나왔다.

나는 혼란에 빠진 누나를 향해 입을 열었다.

“저기, 누나.”

“어, 어어……?”

“그, 누나가 미인이고 다른 남자들이 혹할 수 있다는 건 알겠는데……. 전 딱히 그렇진 않거든요.”

“……어어?”

“남자가 다 누나한테 매달릴 거라고 생각하는 거 큰 착각이에요.”

“아, 아니……. 어, 어어어?”

나는 누나가 제정신을 차릴 때까지 천천히 기다리기로 했다,

어지간히도 혼란에 빠진 걸까, 그 이지적이었던 사람이 어찌할 줄 모른 채 계속해서 고개를 홱홱 돌리는 광경이 퍽 우스웠다.

마침내 정신을 차린 그녀가 더듬더듬 말문을 열었다.

“그러면 너 나한테 연락도 없었던 게……. 그냥 관심이 없어서 그랬던 거야? 나랑 밀당 하려고 그런 게 아니고?”

“전혀 아닌데요.”

“…….”

망설임 없는 내 대답에 헤 입을 벌리고 있던 것도 잠시.

그제야 사태를 깨달은 소진의 고개가 그대로 침몰했다.

“……현수야.”

고개를 푹 숙인 채 입을 여는 누나의 목소리가 침울하기 그지없었다.

지금껏 받기만 하는 입장이었던 자신이 오히려 퇴짜를 맞은 상황의 심정이란 어떨까.

적어도 지금의 나는 그 심정을 알 길이 없었다.

그녀가 더 이상 부끄러워지지 않도록 나는 최대한 무덤덤한 어조로 대답했다.

“네, 누나. 말씀하세요.”

“정말 미안한데. 나 지금 쪽팔려 뒤질 거 같거든. 이 이야기는 다음에…….”

“말 나온 김에 정리는 하시죠, 누나.”

“윽…….”

하지만 그래도 할 건 해야지.

“누나, 저희가 처음에 그렇게 만났었나요?”

몸을 움찔 떠는 누나를 향해 나는 확인사살을 날렸다.

“제가 알기론 저랑 누나는 누나의 성희롱으로 시작된 관계였잖아요? 저도 그래서 가볍게 만난 거였어요.”

“…….”

“그래서 당연히 누나랑은 서로 딱 즐기는 수준에만 그쳤다고 생각했거든요. 밀당이니 뭐니 하는 관계 말고요. 누나도 그런 게 싫으니까 처음에 싸인 같은 것도 하고 그런 줄 알았는데요.”

“그, 그만……. 그만해……!”

“죄송해요. 그래도 누나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아야 대처를 할 수 있잖아요.”

“으으으으……!”

“그런데 세상에 밀당을 얼굴 한 번 안 보고 반 년 넘게 하는 이성 관계가 있어요? 아, 놀리는 게 아니라. 이건 진짜 궁금해서 묻는 거예요.”

“조, 좀 길긴 했지만……. 그, 그래도 두 세 달 정도 연락한 녀석들도 있었고…….”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전 아닙니다.”

“하, 하지만! 너도 평범한 편은 아닌 것 같았으니까……. 자존심도 센 거 같았고…….”

“아하, 그래서 남자답지 않게 자존심이 높은 제 콧대를 꺾을 셈이었다, 뭐 그런 거죠?”

“크윽!”

“후우.”

수치심에 고개조차 들지 못하고 어깨를 바들바들 떠는 소진 누나.

그런 누나를 향해 나는 마지막 결정타를 날렸다.

“혹시 제가 기억 못 하는 거라면 진심으로 사과드리겠는데요.”

“그, 그만…….”

“제가 누나한테 고백 비슷한 거, 한 적 없죠?”

“………….”

내 말과 함께 누나가 테이블에 그대로 푹 엎어졌다.

이견의 여지없는 완벽한 KO패였다.

“현수야.”

한참을 그렇게 엎어져 있던 누나가 작게 중얼거렸다.

모기 날갯짓보다 작은 목소리에 내가 귀를 가까이 가져다 댔다.

“네, 누나.”

“정말 미안한데…….”

거기까지 말한 누나가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나 담배 한 대만 태우고 와도 될까……?”

그리 말하며 나를 바라보는 소진 누나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빨개져 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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