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9화 〉 17. 개과천성[????](2)
* * *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주화연과 만나기로 한 주말.
끼이이익─!
멋들어진 브레이크 소리를 내며 주차장 앞에 당도한 빨간색 2인용 스포츠카.
가격만 해도 억대에 달하는 그 차는, 중산층 정도 아파트 단지에 보일만한 수준의 스포츠카는 절대로 아니었다.
물론 아파트 단지에 저 정도의 차 수준을 끌고 다니는 이들이 전혀 없는 건 아니었지만.
자태부터 등장까지 무척이나 요란스러운 그 모습에 아파트 단지를 걷고 있던 이들이 모두 주목하기 시작했다.
“아 씨! 존나 시끄러!”
“아침부터 뭔데?”
“몰라. 누군지 몰라도 돈 자랑 좀 하고 싶은가 보지.”
“야, 이놈 자식아! 아침나절부터 뭔 짓이여!”
“아이고, 할머니. 그렇게 소리치면 건강에 안 좋아요.”
등교를 하던 여고생 무리 몇 명이 그 꼴이 같잖다는 듯 흘겨보고, 아침 산책을 나온 할머니 한 명이 주차를 한 스포츠카를 보며 지팡이를 내리칠 듯 버럭 소리쳤다.
소란스러운 기색에 나온 관리인마저 화가 난 할아버지를 중재하고 있었지만, 스포츠카를 곁눈질하는 그녀의 표정도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 흉흉한 기색도 잠시.
“아, 죄송합니다.”
텅 하고 문을 닫고 내리는 청년을 본 순간, 주변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뒤바뀌었다.
“……미친.”
“와…….”
“헐, 저게 말이 되나……?”
“커, 커험. 나, 남자가 그렇게 운전을 그렇게 하면 쓰나.”
욕지거리를 하던 여고생 무리가 순식간에 입을 헤 벌리고 그 모습을 관찰하고, 당황한 할머니가 서둘러 지팡이를 내리며 운전자에게 다가가 쓴소리 아닌 쓴소리를 내뱉었다.
그런 사람들을 보며 소란을 일으킨 당사자, 현수가 다시금 쑥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오랜만에 운전대를 잡아서 그런가 좀 서투네요. 앞으로 주의하겠습니다.”
“여, 연예인이세요?”
어느덧 멀찍이 서 있던 관리인조차 어느덧 다가와 한 마디 보태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보며 현수가 싱긋 웃었다.
“아니에요. 그냥 일반인입니다.”
“그, 그렇습니까? 쫙 차려입으신 분이 이런 차에서 내리기에 전 어디 촬영이라도 왔나 하고…….”
“아하하. 감사합니다.”
“그, 그러면, 외부인이신 거죠? 외부인이시면 주차증 발급을 받으셔야 하는데, 일단 관리실에서 얘기를 좀…….”
“잠깐만 있다 갈 건데요. 10분도 안 걸리는데 해야 하나요?”
“아, 그래도 절차라는 게 있으니, 헤헤…….”
헤픈 웃음과 함께 그녀가 현수를 이끌려던 것도 잠시.
“아줌마! 10분만 있다 간다잖아요!”
“맞아요! 뭐 이렇게 유도리가 없어!”
“뭐, 뭐야?!”
주변에 있던 여고생들이 그 뻔한 관리인의 의도에 하나같이 목소리를 냈다.
당황한 관리인을 뒤로 한 채 여고생 한 명이 현수를 향해 말했다.
“괜찮아요, 오빠. 어차피 여기 아파트 입주도 다 안 차서 주차 공간 넘쳐요.”
“그래? 하지만 저 분도 절차라는 게 있으니까…….”
“괜찮다니까요! 딱 봐도 오빠랑 얘기 좀 더 하려고 관리실로 꼬시는 거예요. 그냥 여기 있어도 돼요.”
“뭐가 어쩌고 어째?!”
“그런데 오빠는 여기 무슨 일로 온 거예요? 친구? 여친?”
“이 자식들이! 너희 학교 안 가?!”
“허허, 잘생긴 총각이 고생이 많어. 아이고, 손도 보들보들하구만.”
“아니, 저기……. 이 손 좀 놓고 얘기하시면 안 될까요?”
“하이고, 내 아들 같아서 그려.”
“헐! 이 할머니 성희롱한다!”
다시금 개판이 된 상황 속에서 현수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이.
“하아.”
어느덧 아파트 단지 아래로 내려온 여성, 주화연이 그 광경을 지켜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일찍 나올 걸 그랬나……?”
***
일련의 소란이 있은 뒤.
나는 서둘러 자리를 정리하고 내 차로 향하는 화연의 손길에 이끌려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후우, 아침부터 난리도 아니네.
“미안. 이러려던 게 아니었는데.”
내 사과에 화연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쓴웃음을 지었다.
“아니야. 빨리 안 나온 내 잘못이지. 그런데 뭔 일이래? 평소답지 않게 이렇게 쫙 차려입고.”
화연의 말에 멋쩍어진 내가 슬쩍 시선을 돌렸다.
“그냥……. 기분 좀 내고 싶어서.”
화연이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평소의 나라면 적당한 청바지에 티셔츠만 입고 다녔었으니까.
하지만 오늘은 피버샵에서 팔던 가디건과 평소 입지도 않은 슬랙스 바지까지 나름대로 차려 입으려고 노력했다.
기왕 데이트라고 했는데 최소한 옷차림 정도는 신경을 써 줘야하지 않겠는가.
“그러는 너야말로.”
“아니, 뭐…….”
내 역공에 화연도 비슷한 기분이었는지 뒷목을 만지작거렸다.
쑥스러워 고개를 슬쩍 숙인 모습에서 몸에 쫙 붙은 터틀넥 긴팔티가 좌석 벨트에 조여 유난히 거대한 가슴을 한층 더 강조하는 느낌이 들었다.
거기에 날씬한 허리 라인까지 올라오는 미니스커트는 화룡정점.
학교 선생님이랍시고 정장 스타일을 유지하던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데이트라고 하니까 그냥 기분 좀 내려고 했지. 이, 이상한가?”
“아냐. 잘 어울려. 예쁘네.”
“그, 그래? 흐힛.”
가벼운 칭찬 한 번에 헤벌레 웃는 모습에 나도 덩달아 미소가 지어졌다.
일단은 오늘 스케줄부터 소화해 볼까.
“그럼 가 볼까.”
운전대를 잡으며 내가 말했다.
“일단 적당히 드라이브부터 좀 하자. 기왕 차도 렌트한 김에.”
“드라이브? 영화 보자고 안 했어?”
“아직 시간이 좀 남아서 그래.”
“뭐, 알았어. 나도 이런 차 한 번 타 보고 싶긴 했으니까.”
그리 말한 화연이 차 내부를 두리번거리더니 내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그런데 괜찮아?”
“뭐가?”
“오늘 너무 무리하는 거 같아서.”
“무리?”
“차 말이야. 이거 렌트만 해도 엄청 비쌀 텐데.”
아, 그 얘기였나.
확실히 이 정도의 스포츠카는 렌트 비용만 수십만 원이 넘어가니까.
하지만 지금의 나는 이전의 나와는 확연히 다르다.
‘어차피 돈 버는 게 그리 어렵지도 않고.’
이 세계로 온 뒤로 크게 돈 걱정을 해본 적은 없다.
패션몰 알바로 쉽게 돈을 벌 수 있기도 하고, 설령 외모가 아니라도 몸으로 충분히 떼울 수 있게 되었으니까.
하물며 내가 딱히 사치스러운 취미가 있는 것도 아닌 만큼, 지금은 전과 다르게 통장에 나름 여유롭게 자금을 저축해 두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남자라는 생물은 그런 법이지.”
“뭔 소리야?”
“가끔은 나도 내 여자 앞에서 폼 좀 부리고 싶어진다고 해야 할까.”
“……넌 가끔 여자가 할 법한 소릴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한다니까.”
고개를 갸웃하는 화연을 보며 나는 씩 웃었다.
하긴 원래 세계의 가치관을 지닌 사람이 아니라면 이해하기 힘들겠지.
“너무 신경 쓰지 마. 여자친구랑 데이트 하는데 이 정도도 못 하겠어?”
“여자친구…….”
내 대답을 곱씹으며 멍한 표정을 짓던 것도 잠시.
“히힛.”
다시금 헤벨레 웃으며 입가가 풀어지는 화연.
그 흐뭇한 광경을 머릿속 한 구석에 저장한 나는 악셀을 밟았다.
“출발한다.”
“좋아, 가자!”
금세 기분이 좋아져 방방 뛰는 화연과 함께 나는 차를 몰기 시작했다.
좋아, 오늘은 이런 분위기로 시작해서 천천히 의견을 나눠보자.
그러면 답이 나오겠지.
굳이 시작부터 무거운 얘기를 할 필욘 없으니까.
***
도심 속 한가운데에서 비까번쩍한 스포츠카를 몰고 질주하는 기분은 뭐…….
솔직히 그냥 그랬다.
애초에 천성이 아싸찐따라 그런가, 내게 이런 스포츠카를 모는 재미는 없단 말이지.
“크으, 이거지! 이게 성공의 맛이지!”
뭐, 나랑 다르게 옆에 있던 화연은 엄청나게 좋아하고 있었지만.
“딱히 성공한 건 아닌데.”
“에이, 째째한 건 내버려 두고 달리자고! 기왕 오픈카 빌렸는데 뚜껑도 열자!”
“그럴까.”
요청에 따라 뚜껑을 개방하자 화연이 잔뜩 흥분해서 소리치기 시작했다.
“호우!”
얘 이런 걸 좋아했었나?
내색은 안 했지만 조금 당황스러운 기분이다.
‘처음에는 그렇게 소심한 녀석이었는데.’
소설 속 등장인물이었을 당시의 화연은 분명 소심하기 그지없는 성격이었다.
주인공 정기발을 만난 그녀는 그 소심한 성격과 맞물려, 주인공의 막무가내스러운 성향에 휘말린 결말부에는 사실상 성노예에 가까운 모습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사실 이 세계에 처음 왔을 때의 나도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 정도였으니까.
‘물론 그 때도 그 미친 주인공만큼 할 생각은 없었지만.’
아무튼 결과적으로 이 세계의 화연은 소설 속의 화연과는 확실히 다른 변화를 보여주고 있었다.
가끔 소심한 모습을 보여주긴 해도, 조금 더 주도적이고 자기 생각을 밝힐 줄 알게 되었다.
그것이 지금의 내게 묘한 감상을 불러 일으켰다.
‘애초에 내가 사는 이곳은 소설 속이 아니니까.’
눈앞에 있는 화연은 단순한 소설 속 등장인물이 아니다.
가상이 아닌, 실제로 현실에 존재하고 있다.
그것을 깨달은 이후 진행된 삼자대면.
그 날 이후로 모두에게 그런 얘기를 했던 거기도 하다.
앞으로 모두를 진심으로 대하겠다는 마음가짐으로.
하지만 결과적으로 내가 받은 것은 최다슬의 이별 통지.
더불어 이후 윤화정의 깜짝 고백까지.
그 날의 일에 꽤나 충격을 받았던 이후 나는 여러모로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내 곁에 머무는 여자들을 향해 어떤 식으로 대하는 것이 최선일지를.
그 결과 나름대로 내가 내린 대답을, 나는 오늘 화연에게 들려줄 예정이다.
‘얘도 다슬이처럼 헤어지자고 하려나.’
내 대답을 들은 화연도 다슬과 마찬가지로 이별 통지를 날릴지 모를 일.
그 정도 각오는 하고 있다.
그러니 오늘만큼은 끝까지 최대한 즐겁게 지내도록 하자.
어쩌면 이게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일이니까.
“슬슬 들어갈까. 슬슬 영화 시작할 시간이고.”
애써 마음을 다잡은 내가 신나 있는 화연을 향해 말했다.
내 말에 화연이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어?”
“영화 보고 나서 또 타면 되지.”
“알았어.”
아쉬워하는 화연을 보며 나는 영화관 근처 주차장에 차를 댔다.
그러나 이후의 상황에 순간적으로 흠칫할 수밖에 없었다.
옆에서 내린 화연이 내게 쪼르르 달려오더니 홱하니 팔짱을 낀 것이다.
아니, 섹스할 때 말고는 그렇게 소심하던 녀석인데…….
오늘따라 되게 적극적이네?
“크, 크흠.”
의아한 내 시선에 화연도 멋쩍은지 시선을 홱 돌리며 중얼거렸다.
“아니, 뭐……. 데이트라며.”
“누가 뭐랬나.”
“네가 이상한 얼굴로 바라보니까 그렇지!”
그렇게 우리가 투닥거리며 영화관으로 향하는 사이.
“와. 진짜 잘생겼네. 연예인인가?”
“어디? ……헐, 미친. 진짜 개잘생겼네.”
“하, 나도 저런 남자랑 팔짱 끼고 걷고 싶다,”
“옆에 여자 수준을 봐라. 고작 네 정도로 되겠냐?”
“아, 이 새끼……. 그냥 말도 못 하냐?”
딱 붙어 움직이는 나와 화연의 모습에 슬금슬금 우리를 곁눈질로 힐긋거리는 사람들이 보였다.
특히 노골적으로 말하는 여자 무리들의 목소리는 나와 화연의 귀에까지 들릴 정도였다.
꽈아악.
그런 사람들의 시선에 내 팔짱에 붙들린 힘이 한층 더 조여들었다.
나는 마치 자기 것이라는 것 마냥.
“어째 오늘따라 더 쳐다보는 거 같네.”
“그러게.”
“이래서 내가 너랑 평소에 밖에 잘 안 나가는 거야. 너랑 밖에만 나가면 여자들이 침을 줄줄 흘리고 쳐다보니까…….”
“설마 매일 내 방이나 모텔에서 보는 게 설마 그런 이유였어?”
“그렇게 말하면 내가 뭐 그 짓에 환장한 거 같잖아!”
“맞잖아.”
“……그야 그렇긴 하지만, 그, 그래도 꼭 그것만은 아니라고!”
어찌저찌 부정하는 화연을 보며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흠, 그냥 섹스에 미쳐서 환장하는 건 줄 알았더니.
얘도 나름대로 나랑 밖에 나가는 것에 생각이 많았나 보다.
“그런데 오늘은 딱히 여자들만 쳐다보는 건 아닌 모양인데.”
“응?”
“봐봐, 남자들도 많이들 쳐다보잖아.”
내 말에 화연도 다시금 주변을 둘러보더니 응? 하고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네? 무슨 일이지?”
“다들 너 쳐다보는 거 아닐까.”
“에이, 말이 돼? 그럴 리가 없잖아.”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하는 화연의 모습에 나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얘는 자기 객관화가 너무 안 된다니까.’
사실 나는 둘째 치고 화연의 경우에는 평소 꾸미기는커녕 후줄근한 차림이 많았다.
하물며 고개까지 숙이고 다니는 만큼, 평소 사람들이 화연을 예쁜 녀석인 줄 알아차리지 못했을 확률이 컸다.
반면 오늘은 나름대로 꾸미고 온 대다가 아예 나랑 팔짱까지 끼고 다니고 있으니 뭐, 눈에 띄어도 안 띌 수가 없지 않을까.
“그러니까 평소에 좀 꾸미고 다녀. 너도 원판은 충분히 예쁘니까.”
“뭐, 뭐……!”
뜬금없는 칭찬 공격에 다시금 맥을 못 추는 화연.
이게 바로 전형적인 낮져밤이인가. 귀엽네.
“민망한 소리 좀 그만해, 진짜……!”
“좋으면서 뭘.”
“으으…….”
정신을 못 차리는 화연을 이끌며 나는 영화관 근처의 패션몰로 향했다.
영화관으로 향하는 게 아님을 알아차린 화연이 의아한 시선을 보냈다.
“여긴 왜 온 거야? 영화관은 6층인데.”
“아직 시간 좀 남았는데 쇼핑이라도 할까 해서.”
“쇼핑? 갑자기?”
“너 매일 후줄근하게 지내는 거 마음에 걸렸거든. 오늘은 이쁘게 입긴 했다만.”
“야, 나도 맨날 그런 옷만 입진……! 아니 잠깐, 나? 내 옷 보자고?”
“그래. 기왕 나온 거 옷이라도 좀 보자.”
“어? 하지만…….”
“내가 사 줄 테니까 돈 걱정은 하지 말고.”
“그런 뜻이 아니라……. 에, 에엥?”
생각해보면 화연이 이 녀석이랑 오랫동안 만났는데 제대로 된 선물도 못 해줬단 말이지.
“가자.”
“어, 에으윽……?!”
내 이끌림에 괴상한 소리를 내지르는 화연.
혼란스러워 하는 그녀와 함께 나는 패션몰로 들어섰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