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화 〉 승부 ( 1 )
* * *
천년전에 세상을 집어삼키려고 했던 마물과 치뤘던 전쟁은 오지에서 살던 수인종족들을 하나로 규합하게 만들었으며, 그들의 터전을 인간들의 도시로 옮기게 만들었다.
하르마디아.
칼로스 대륙에서 가장 많은 수인들이 살고 있는 낭만과 화합의 도시.
그렇기에 땅거미가 진 노을빛 하늘을 지나 영롱한 달빛이 거리에 내려앉은 때에도, 언제나 활기와 노랫소리가 끊이지 않는 것이 당연한 곳이다.
북적이는 사람들로 가득한 밤거리의 한 켠.
벽에 등을 기댄채로 서있는 체리같은 붉은 머리색의 여우귀 소녀.
루샤 아트리에는 본능적으로 여우귀를 꿈틀꿈틀 움직이면서,눈살을 찌푸린 채로 빨대로 손에 든 음료를 쪼옥쪼옥 빨아먹고는 말문을 열었다.
" 뭐 하나 제대로 되는게 없네···. "
" 응? 뭐라고 했어? 루샤?? "
자신의 말에 되물어오는 천진난만하고도 한심하게 느껴지는 익숙한 목소리.
모처럼 기대하고있었던 야시장이 골칫덩어리 하나를 끼고 다녀야하는 밤산책이 될줄 몰랐기에,루샤는 반개한 눈으로 자신의 쌍둥이 남매오빠를 한번 보고는 깊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고는 다시 라크를 바라본다.
자신들의 어머니, 여신교의 전 성녀.
리타 아트리에와 같은 체리같은 검고도 붉은 머리색을 지닌 머리카락.
쌍둥이의 얼굴은 제 어미와 쏙 빼닮았지만, 라크의 경우에는 더더욱 리타와 닮은 외형을 가지고있었다.
순진무구한 눈망울, 포근해보이는 분위기.
" 아무것도 아니야, 가자 "
그래서일지도 모르겠다, 괜시리 짜증이 난 루샤는 신경질적으로 빨대로 음료를 휘저었다.
그리고선 벽에 기댄 등을 떨어트리고는 발걸음을 옮겨서 어딘가로 향했다.
골칫덩어리였지만 괴롭히는 맛이 있는 자신의 쌍둥이 남매오빠를 데리고선 말이다.
한편,
말없이 걸어가는 여동생의 등을 바라보며 따라걷던 라크는 생각했다.
7년전에 루샤는 병에 걸렸었다.
마력 불안정화를 유발하는 희귀질환은 육체를 점점 좀먹어간다고 알려져있는 병.
치료방법은 꽤나 간단했다.
병의 근본인 마력 불안정화를 마력제어술로 이겨내는것.
그렇기때문에 루샤는 배움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엄마는 에콜 아카데미 이사장이자 자신의 스승이었던 에리스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에리스는 루샤를 받아들여 마법적 지식을 전수해주었다.
루샤는 제 어미인 리타를 닮아서 그런지 마법적 재능이 뛰어나서 스펀지가 물빨아들이듯이 실력은 일취월장하였다.
그렇게 희귀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눈치채지도 못할만큼 건강해진 루샤는 곧 집에 돌아올것이라고 나는 생각하고있었는데, 내 생각과는 다르게 루샤는 좀 더 배우고싶은게 있다며 아카데미에 있고싶다고 엄마에게 전했다고 한다.
가끔씩 몇번이고 집에 얼굴을 비추기는 했으나 이젠 집에 완전히 돌아왔다고 생각하니 실감이 나지않던 라크였지만, 줄곧 엄마와 지내왔던 집에서 루샤의 고압적인 태도와 말투를 보니 실감이 안날수가 없었다.
아카데미에 들어가기전만해도 쌍둥이 남매의 사이는 좋았는데···.
대체 왜 이렇게 된것일까?
루샤녀석이 아카데미에 들어가던 기억도 가물가물한게 아무래도 여신님이 말했던 부작용인듯싶었다.
기억이 뒤섞이는 바람에 군데군데 기억상실처럼 안나는 부분이 있겠지만 몇주간정도 지속될것이라 말씀하셨었지.
" 그건 그렇고루샤, 너 에콜 아카데미 재학생이 맞는거지? "
" 3년전에 정식으로 입학했다고 널 놀리던것도 기억이 안나나보네? 너같은 허접쓰레기는 절대 못올곳이라 그리 놀리고는 했는데, 이젠 그것도 못해먹게 됐네. 정말 아쉽다~ "
" 3년전에? 그럼 그전에는?? "
" 에리스님이랑 같이 지내면서 마법을 배웠어, 그래서 제니아랑도 알고지낸지 오래됐으니 허물없이 지내는거고. "
그게 친하게 지내는거라고?
에리스의 대저택에서 제니아와 기싸움을 벌이다가 끝내 패배하고 토라져있던 루샤의 모습이 생각났다.
우리가 발걸음을 옮길때마다 거리의 소음이 잦아들어간다.
정겨운 사람들의 말소리, 신명나는 악기소리.
이윽고 거리를 완전히 벗어나자 어린아이들이 어울릴만한 장소에 도착했다.
형형색색의 온갖 놀이기구들.
루샤는 그것들을 무시하고 그 사이를 나아가서 한 나무에 다가가서 걸음을 멈추고는 나무결을 따라 매만졌다.
그 나무에는 특이하게도 옆으로 길게 그어진 줄이 여러개 나있었다. 한줄, 두줄이 모인 여러 줄이 말이다.
놀이터의 뒤편에 심어져있는 나무는 꽤나 나이를 먹었는지 무성하게 자란 풀잎들이 놀이터를 그늘지게 만들었다.
스윽하고 뒤돌아선 루샤는 그늘에 서있었기때문인지 얼굴에 드리워진 그늘이 더욱 어둡게 보였다.
" 그러고보니··· 내가 묻고싶은게 있었는데 깜빡했었네. "
또래보다 한참이나 어려보이는 내 신장.
그 키보다 머리 두개정도 큰 루샤의 키가 지금은 위압적으로 다가온다.
루샤는 평소처럼 지어보이는 고양이상의 약올리는듯한 얄미운 미소를 한채로 내게 질문을 해왔다.
한쪽 눈 밑에 있는 눈물점이 더욱 돋보인다.
"너, 무슨 꿍꿍이야? "
" 꿍꿍이라니 그게 무슨소리야. "
" 아카데미에 뭐하려고 입학한거야? 그리고 에리스님의 저택에는 무슨일로 방문한거고?? 입학건이야 보나마나 엄마의 도움을 받았겠지만··· "
루샤는 나와 같은 에메랄드 색의 눈동자를 번뜩이며 폭포수처럼 질문을 쏟아냈다.
의문이라는 열병을 품은채로 끙끙앓던 루샤는 당사자인 내게 직접적으로 물어보고 해결하고자 한것이다.
물론 내가 바로 대답해줄리는 없겠지만말이다.
이건 오히려 역공할 기회가 아니던가.
라크는 음침한 속내를 속에 감추고선 때를 기다려야한다는것을 깨달았다.
기억이 군데군데 사라진탓에 몇년만에 보는거같은 루샤의 몸매는 빼어났다.
엄마를 너무나도 좋아하는 루샤는 엄마의 패션도 따라하는것은 당연한 일이었지만, 그렇기때문에 오늘 입은 하늘색 원피스는 그 빼어난 몸매를 부각시키는 바람에 음란한 복장으로 격하시키고말았다.
본인은 좋다고 입은것이겠지만 존재감을 과시하는 두 젖탱이에 의해 원피스는 굴곡진 형태를 이루고있어서 남자를 환장하게 만들었으니까.
아까전 하르마디아의 야시장을 돌아다닐때만해도 루샤에게 빈번하게 말을 걸어오는 남자들이 여럿있었지만, 다들 루샤의 손에 어리는 얼음창을 보고는 줄행랑쳤다.
목숨은 소중한것이니깐 미인을 한번 자빠트리는것보다는 살고싶은거겠지.
쓸데없는 생각까지 끼어든 상념을 지우고는 라크는 꾹 닫고있던 말문을 열었다.
" 그냥은 알려줄수 없지. "
" 뭐어? "
루샤는 기대하고있던 대답을 라크가 꺼내지않고 되려 자신을 약올리려하는것을 깨닫자, 분노가 치밀어올라서 짓고있던 미소를 지우고 정색하게 만들었다.
" 승부로 나한테 이기면 알려줄게. "
" 지금 무슨 말을 하는거야? 개허접쓰레기 오빠주제에 나한테 이길수있을거라고 보는거야 지금?? "
승부.
어렴풋이 기억나는 단어.
루샤와 있던 추억을 떠올리자니 라크는 ' 승부 ' 라는것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쌍둥이 남매는 어린시절에 집에서 지내는 경우가 많았고, 어머니인 리타가 자주 집을 비웠기에 둘이서 ' 승부 ' 라는 명목하에 온갖 내기를 하고 놀이를 하며 시간을 보내곤했다.
나는 이것을 이용해서 건방지기 짝이 없는 얄미운 여동생 루샤를 괴롭혀줄것이다.
마침 새로운 스킬을 이용해서 약점을 발견해냈겠다, 녀석은 좋은 실험체가 되겠지.
라크가 승부라는 단어를 꺼내니 정색한 표정을 짓던 루샤는 어느새 호승지심에 가득찬 얼굴로 라크를 노려보고있었다.
루샤 녀석도 추억이 떠올랐는지 승부에 적극적으로 임하려드는것같았다.
"···좋아! 승부 해주겠어!! 룰은 그대로 가는거지? "
" 5판 3승제에 서로 번갈아가면서 내기할 종목을 내는건 그대로 간다. "
이건 남매에게 걸린 자존심이나 마찬가지였기때문에 루샤는 마법을 써서 대답을 캐낸다는 방법을 머릿속 한켠에 내던져버렸다.
허접하기 짝이 없는 라크에게 자신이 절대 질리가 없기때문이다.
옛날과는 다르게 몸도 커졌고 루샤는 마법까지 배웠다.
' 멍청하기 짝이 없네~ 내가 개허접같은 오빠 찌끄레기한테 질리가 없잖아. 절대 못이길 내기만 계속 내면 내가 이기는거 아냐? 쿡쿡···! '
" 아주 좋은 승부가 될거야, 기대하는게 좋을걸? 오빠? "
루샤는 괴롭힐때 짓는 최고의 미소를 지은채로 허접스레기같은 오빠를 쳐다보면서, 음흉한 속내를 숨기고 속으로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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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이게 뭐야?! "
" 뭐긴 보이는 그대로지. "
" 이걸 지금 같이 하자는거야?! "
" 뭐?! 그럼 지금 승부하기 싫다는거야?! "
루샤는 이를 꽉 물고선 제 오라비를 한번 째려보고는 말했다.
" 할게! 하면 되잖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