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화 〉 발현
* * *
체육관 안은 생각했던것보다 꽤나 넓었다.
이리도 넓고 크게 체육관을 건설한 이유는 다수의 클래스가 함께 모여 합동훈련을 하기위해서라고 입학식에서 들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교실에 나 혼자 남을때까지 꽤 시간이 흘렀을거라고 생각해서 지각하는줄 알았지만, 막상 도착하고보니 수업준비에 앞서 필요한 절차가 있어서 다행히 늦지는 않았다.
봐라, 조금이나마 익숙한 얼굴들의 학생들이 자리에 앉아서 대기하고있지않은가.
일렬로 줄지어서 앉은 사람들, 두줄로 이어진 사람들의 행렬
그리고, 잊을수없는 얼굴이 보였다.
입학식, 그 날 정문에서 봤던 무테안경의 선생이었다.
잊을래야 잊을수 없으리라.
내 이름을 호명하고서는 기절해버린 사람이었으니까.
오늘도 마찬가지로 왁스를 바른 올백머리에 함부로 말걸지말라는듯 냉기를 풀풀 날리고있었고,심기가 불편한 구석이 있는것인지, 톡하고 볼펜을 나오게했다가 다시 되돌리는것을 일정한 간격으로 반복하고있었다.
" 늦었군, ...라크 아트리에. 사이좋게 손을 잡고 여기까지 천천히 걸어왔나보지? "
망할, 수업에는 늦었나보다.
" 늦어서 죄송합니다. "
우리는 뒤늦게나마 재빠르게 있어야할곳으로 들어가 앉았다.
" 라크 아트리에, 너에겐 벌점을 부과하기로 하겠다. 이유는 알고있겠지? "
무덤덤하게 말하는 안경선생의 안경은 그 어느때보다 빛나보였다.
얼핏보니 내게 벌점을 주는게 기뻐보이는것 같기도...
아니, 그런데 어째서 나한테만 벌점을 주는거지?
늦은건 에이미도 매한가지 아니던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궁금하던것이 얼굴에 그대로 다 드러났는지 이어서 안경선생이 몇마디를 얘기했다.
" 에이미는 자네를 데리러간거였다네. 이해하겠나? 거기다가 상위 클래스로 갈지도 모르는 우수생인데 함부로 벌점을 부과할 수는 없지. "
쉽게 말해서 꼬우면 우수한 성적을 내라는 뜻이었다.
망할.
선생은 목을 한 차례 가다듬더니 옷매무새를 똑바로 하고 수업을 진행했다.
" 이 합동수업은 1학년 F 클래스와 3학년 A 클래스가 참여하는 수업이다. 후배들은 각자 파트너로 지정된 선배들에게서 가르침을 얻어가는것이기에, 앞서 선배에게 감사인사를 하는것이 예의겠지. "
" 각자 옆에 있는 사람을 보도록. 이 합동수업기간동안 선후배사이가 될 얼굴을 눈에 익혀라. 인사도 하고 말을 나누는게 좋겠지. 나는 5분후에 돌아오도록 하겠다. "
선생이 사라지자 각자 할말들이 많았던건인지, 장내는 순식간에 말소리로 가득차서 활기차게 바뀌었다.
분명 처음 보는 얼굴들인데 얘기할거리가 그렇게나 많나?
귀기울여 들어보니 주된 내용이 그 안경선생에 대한 뒷담이다.
그 선생.. 이럴걸 알고선 자리를 피한건가?
" 야. "
" 야!!! "
상념에 빠져있자니 들려오는 날카로운 여인의 목소리.
선생이 편하게 얘기하라고 자리를 비웠다고 한들, 저리 우렁차게 소리를 지르다니 좀 교양이 없어보였다.
대체 누가 저리 소리를 지르는것이지?
소리가 들린곳은 분명..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이쪽에서도 잊을수 없는 얼굴이 보였다.
웨이브가 들어간 백은색의 반짝이는 머릿결.
일자로 길게 찢어진 황금색 눈동자와 설원처럼 새하얀 피부.
잠깐이지만 아카데미에서 나의 호위를 맡았던 그녀.
카르사 라이오넬이었다.
하지만 오늘의 그녀는 좀 달라보였다.
그 자신감넘치는 얼굴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있었고 눈밑에 그늘이 드리워져있었기에.
" 안녕. "
거기다가 선뜻 인사를 내게 먼저 건네오다니?
일주일이란 짧은 시간을 카르사와 보냈지만, 나는 그녀에 대한 대부분의 것을 파악할수있었기때문에 눈앞에 있는 이 여인이,내가 알고있는 카르사 라이오넬과 동일인물인지 의구심이 들 정도.
" 어.. 안녕하세요. "
마지못해 인사를 받아줬건만 내가 그만 등신같이 대답하고말았다.
안돼, 안돼지.
내가 주눅들어있는 모습을 보이면 카르사는 내게 매번 등을 한번 쳐주곤했다.
그러나, 카르사는 한번 날 쳐다보기만 할뿐, 늘 쓴소리를 내뱉던 그 입은 꾹 다물려있었다.
예상했던 것과 너무나 다른 모습.
뭐지? 어디 아프기라도 한건가?
아니라면 심각한 고민이 있는것일지도...
철컥하고 철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오자, 활기차게 떠드는 소리로 가득 메웠던 장내는 순식간에 고요해진다.
자리에 선 안경선생은 아까전에 하던 이야기를 마저 이어나갔다.
" 다들 인사는 충분히 했을거라고 생각하겠다. 그럼 합동수업을 시작하도록 하지. "
선생이 그리 말하면서 바로 옆에 있던 상자에서 여러색으로 반짝이는 영롱한 색의 피라미드처럼 사각뿔을 꺼내서 학생들에게 넘긴다.
후배들은 피라미드를 바라보며 그게 무엇일까 궁금하여 다들 인상을 팍 찌푸린채로 생각에 빠진 모습이었고, 반면에 선배들은 그 모습을 보며 히죽히죽 웃어대고있었다.
나 또한 그것을 쥔채 바라보고 있었는데, 문득 떠오르는게 있었다.
엊그제 루샤와 승부를 하면서 만졌던 동그란 구체, 체내에 담긴 마력을 알아보기위해서 만들어진 측정기.
내가 지금 손에 쥐고있는 피라미드와 구체가 어딘가 모르게 닮았다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
" 1학년들은 각자 사각뿔을 받았을거다. 그건 너희들이 앞으로 나아가야할길을 알려줄 측정기이지. 차례대로 마력을 그 측정기에 불어넣으면 된다. 3학년은 옆에서 관찰하고 기록하도록. "
안경선생이 시작하라는 말과 함께 차례대로 학생들은 마력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어떤 학생의 피라미드, 아니 사각뿔은 위로 가시를 솟아내기도 했고.
어떤 사각뿔은 돌처럼 단단하게 변하기도 했다.
불을 뿜기도하며, 풀이 자라나기도 했다.
그 변화무쌍한 사각뿔을 보면서 안경선생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학생들의 행렬 사이를 지나갔다.
정신없이 줄 앞에서 먼저 측정하고있는 모습을 구경하고있자니 별안간 내 팔을 누군가 살짝 터치해왔다.
나의 파트너가 될 그녀, 카르사.
" 너, 괜찮겠어? "
그녀는 어째선지 걱정하고 있었다.
" 예? 뭐가요? "
" 아니, 그야 난 니가 마력을 쓰는 모습을 본적이 없거든. 뭐 아카데미에 입학 할정도라면 기본적인 마력제어는 구사해낼수 있다는 거겠지만... 아니 그렇게 따지자면 너 왜 그때는 안쓴거냐? 앙?! "
그때서야 카르사의 눈빛이 눈에 들어온다.
의심이 서려있지만 분노가 어린 눈길.
그때?
카르사가 말하는 그때라면.
아마 그녀와 처음 만났을때를 말하는것이리라.
그때는 카르사에게 잡히면 죽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한움큼의 여력조차 남기지않을 생각으로 전력을 다해서 달렸던게 라크의 기억속에서 남아있었다.
나는 그 이후의 습격으로 여신님과 만났기에 마력을 다룰수있는 몸이 됐고 이지운의 기억을 되찾은것이지만, 이걸 그대로 얘기할수도 없었기에 일단 얼버무려서 넘어가야겠다.
" 그,그때는 마력제어를 못해냈거든요. 제가 다룰수 있게 된지도 얼마 안돼서. "
그말대로 나는 이제서야 마력제어를 할 수있을 만큼 마력을 갖게되었다.
마력을 운용하여 어떻게 다뤄야할지는 이제서야 배워야하는 몸.
" 그래? 난 또 날 가지고 놀린건줄 알았네. 아니라면 됐어. "
뭔가 석연치 않은 얼굴이긴 하지만 카르사는 이내 다시 손에 쥐고있던 기록지에 시선을 돌렸다.
다행히 잘 넘어간듯하다.
" 다음. "
무미건조하게 들려오는 선생의 목소리.
이윽고 내 차례가 돌아온건지 그 말소리는 내게 가까운 곳에서 들려왔다.
“ 라크 아트리에, 사각뿔에 마력을 천천히 불어넣도록. “
안경선생은 안경을 들어올린채로 사각뿔의 형태를 면밀히 관찰하려는것인지, 눈여겨보고있었다.
이거 왠지 긴장되는데..
누군가 보고있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무언가를 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꽤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지각생이라서 그런것인지 아니면 그냥 이 측정자체가 신기한것인지, 한사람도 빠지지 않고 전부 날 주목하고 있었다.
좋아, 시작해보자.
사각뿔을 바라본채로 집중하여 체내의 힘을 모은다는 느낌으로.
마력을 불어넣는다!
그러나, 사각뿔은 아무런 변화없이 묵묵히 그 형태를 고수하고있을뿐.
” 이건… 안되겠군. 이럴리가 없는데 말이지. 기준미달이라? 따로 남아서 추가 측정을 하도록하겠다. “
측정은 실패로 끝나고말았다.
나처럼 마력이 옅은 다른 학생들도 사각뿔의 색에 변화라도 주기라도 했는데.
이상하게도 나는 마력을 들이부었음에도 사각뿔은 답해오질않았다.
어떤자들은 연민을, 비웃음이라는 상반된 시선을.
그대로 차례는 넘어가고 학생들의 시선도 자연스레 사라진다.
결국 그 자리에 남은건 내 부끄러운 모습뿐이었다.
” 왠지 그럴거같더라. 마력제어할 수있게 된지 얼마 안됐다면서? 내가 알려줄테니까 이렇게 해봐. “
그런 내게 도움의 손길을 뻗어온건 나의 파트너.
카르사 라이오넬이었다.
갑자기 왜 이렇게 잘 대해주지?
그 일주일동안 날 장난감으로 여기기만 했으면서.
속내를 알 수는 없었지만 그녀가 알려준 그대로 하니, 사각뿔에 작은 변화가 보이기 시작했다.
덜덜덜.
부들부들 살짝씩 떨려오는 사각뿔.
하지만, 그정도였기에 모자랐다.
” 좋아. 아까보단 나아졌네. 근데 마력이 조금 부족한거같아. 측정을 조금 미뤄보는건 어때? 나도 선생한테 잘말해볼게. “
” 왜… “
” 응? “
” 왜 그렇게 갑자기 잘해줘요? “
일주일간의 노예생활을 그저 헛된 망상으로 치부하는 카르사의 모습.
왠지 부아가 치밀어오르기도 하지만 그녀에게 도움을 받은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물었더니 카르사는 무언가 말을 꺼내기 힘든것인지 주저하는 모습을 내게 보여왔다.
“ 아,아니 그거야… 내가 심했던거같아서… 그,그게 미,미미…! “
“ 미? “
” 미친놈아!!! 니가 잘못했잖아!!! “
장내에 있던 학생들의 시선이 집중된다.
아니 시발.
왜 날 노려보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