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8화 〉 기회
* * *
“ 또 그런다! 또! 이 새끼야! 내가 언제 밀어내라고 했어?! 마력을 흘러가도록 유도해야 한다고 말했지! 너 솔직히 말해봐. 강의시간에 졸았지? “
불같은 성질을 죽이지 못하고 내게 일갈을 터트리는 카르사의 모습은 흡사 사자가 으르렁대는 모습과도 같았다.
눈에 띄는 미려한 외모를 묻히게 만들 정도로 잔뜩 화가 난 그녀.
“ 강의시간에 대체 누가 잠을 잘 수 있겠어요. 선생님들이 눈을 부릅뜨고 강의를 하시는데.. “
내 말은 사실이었으니까 전혀 찔릴게 없었다.
그야 나는 수업시간에 필기까지 열심히 해가며 노력하는 노력파니까.
“ 그래...? 근데 왜 이런 기초적인 걸 모르고 있는건데? “
못 믿겠다는 수상한 눈초리로, 눈을 반개하고서 날 훑어보는 카르사.
“ 선배님! 라크의 말이 사실이에요! “
무언의 대치를 이어가는 때에 불쑥 우리의 앞에 나타나서 말한 이는 F 클래스의 최우수생 에이미였다.
나보다 한참전에 실습 과제를 마친 에이미는 둥지 곳곳을 살피면서 무료함을 죽였는지,
어깨까지 오는 흑발은 먼지로 뒤집어써서 색이 바랬지만, 그녀의 천진난만한 성격을 대변하는 반짝이는 눈동자는 여전했다.
“ 아..? 에이미. 지금 라크가 수업을 성실히 듣고 있다는게 사실이라고 말한거야? “
“ 네! 항상 강의시간때마다 라크는 노트에 열심히 적고 있었는걸요! “
“ 근데 왜 이 모양이야. 마력 운용술에서 가장 중요한 기초중에 기초를 모르고 있다는게 말이 돼? “
“ 아..! 그 시간에는 라크가 없었어요. “
“ 없었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니가 방금전에는 라크가 성실하게 필기까지 했다고 말했잖아?“
“ 말그대로에요! 라크는 강의시간에 자리 비웠을 때가 더 많거든요! “
“ 아하, 그러니깐 요컨대 땡땡이를 치고 다닌다는거지? “
카르사의 질문에 어리둥절해 하던 에이미는 턱을 쓰다듬으면서 골똘히 생각하는듯 하다가 나지막이 말했다.
“ 음... 그렇게 되겠네요...? “
그 대답에 카르사는 단박에 내 앞으로 다가와 섰다.
“ 너, 대체 뭐하고 다니길래. 강의를 그렇게 빼먹는거냐? “
“ 그건.. 볼일이 있어서 그랬죠. 카르사 선배도 아시잖아요. 제가 중요인물이라는거. “
“ 알다마다, 내가 너 호위까지 했었던 몸인데 그걸 모르겠냐...? 아, 그럼 그건 됐고. 마력응축이나 제대로 해봐. 파이 게나 후딱 잡아서 끝내버리자고. “
카르사는 내가 수업을 빼먹고 돌아다닌다는 사실에 무언가 석연치 않은듯 했지만, 넘어가기로 했는지 대화를 일방적으로 끝내버렸기 때문에.
나는 그냥 고개를 끄덕이고 파이게 앞에 섰다.
파이게는 내가 잘못된 방법으로 마력응축을 시도하며 고전하고 있을 시간 동안에,
처음에 취했던 방어자세를 풀지 않고 지금까지도 웅크리고 있었다.
정말 끈기 하나는 대단한 마물이다.
“ 아까도 말했듯이 니가 처음에 시도했던 마력을 밀어내는 방식은 어지간한 보유마력량으로 해낼 수 있는 방법이 아니야. 그러니까 마력을 민다는 느낌보다는.. 그쪽으로 가도록 유도한다고 생각해봐 “
마력을 밀어내는게 아니라, 유도한다라..
나는 카르사의 말대로 내 몸속에서 이리저리 날뛰고 있는 마력의 기운들을 강압적으로 다루지 않고, 어린아이 달래듯 살살 어루만지는 것처럼 내 팔쪽으로 가도록 유도했다.
그러자, 이전과는 확실히 다른 반응이 내 몸속에서 일어났다.
계속 반발적이었기에 밀어내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었던 마력의 기운들이, 내가 보내고자 하는 방향으로 일제히 몰려들었기 때문이었다.
이리도 쉽게 따라온다고...?
그동안 낑낑대며 부단히 노력했던게 헛수고처럼 느껴질 정도로 허무감이 느껴진다.
하지만 동시에 술술 풀려가는 느낌에 자신감이 차오르기도 했다.
그리고 팔을 따라서 주먹을 쥔 손에 도달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전신에 퍼져있던 마력회로가 뜨겁게 타올랐다.
유황불을 마신다면 이런 느낌일 것이다.
어느 순간부터 눈밑이 밝게 빛나는 느낌이 들어서 고개를 내려다보니, 푸른 색으로 짙게 빛나는 내 주먹이 보였다.
“ 좋아, 바로 그 느낌이야. 그 감각을 잘 기억해둬. 자, 그럼 주먹싸움에 일가견이 있는 내가 다음 단계를 보여줄테니 보고 잘 따라해봐. “
카르사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정면을 뚫어질듯 응시하다가, “ 흡 “ 하는 기합소리와 함께 주먹을 내뻗었다.
부우웅!
쩌저적!!
매서운 바람소리와 함께 둥지의 징그러운 고기벽이 갈라지고 균열을 남긴다.
내 눈에 잘 보이지 않아서 휙하고 지나가는 느낌 뿐이었다만,
이건 분명 카르사가 만들어낸 결과가 틀림없었다.
붉게 타오르는 색을 띠는 마력흔을 피어올렸던 주먹을 허공에 털어내서 마력흔을 흩어낸 카르사는, 내게 미소를 지어보이며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 어때? 정말 쉽지? “
“ 어... 그냥 정권 지르기 아니에요? “
“ 아니거든? 하.. 됐다... 그럼 그냥 주먹을 앞으로 내질러봐. “
“ 주먹을요? “
“ 얼른. 저 파이게한테 한방 후려친다고 생각하고. “
나는 머릿속으로 이미지를 그려냈다.
방금전에 봤던 카르사의 몸동작을 그대로.
그저 팔을 휘두르는게 아니라 몸 전체를 주먹에 싣는다는 느낌으로, 능숙하게 주먹을 내지르던 카르사의 움직임처럼.
나는 그대로 따라서 움직였다.
쉬이익!
몸을 돌려서 주먹을 휘두른 순간, 내 귓가에 스치는 바람소리.
본래 내 체구는 작은데다가 단련도 하지않은 연약한 몸이었기에 , 솜방망이같은 주먹으로는 절대 낼 수 없는 소리일 터인데.
어찌된 일인지 내 움직임에서는 그 소리를 뒤따라서 발생시켜냈다.
내가 움직이는걸 보고 한층 더 웅크리는 파이게.
녀석은 맹신할 정도로 자신의 등껍질에 자신이 있는듯 했다.
그리고.
푸른 마력흔을 피어올리는 내 주먹이 파이게의 단단한 껍질에 닿는 순간.
쩌적, 쩌저적!
F등급의 몬스터이지만 두터운 방어력만큼은 F급을 상회하는 E급인 파이게의 단단한 등껍질.
그것이 유리가 깨어져 나가는 것처럼 단번에 여러갈래로 깨부수어졌다.
그리고 파이게는 ‘ 찌륵 ’ 하는 단말마를 남긴채 완전히 움직임을 멈춰섰다.
“ 이거봐라, 하면 되잖냐. 아까는 왜 빼고 그랬던거야? “
“ 제가.. 한건가요..? “
“ 그럼 니가 한거지 누가 한거겠어. 에이미는 저기 누워있고, 나는 멀찍이 떨어져서 서있었는데. “
“ 이게 어떻게 가능한거죠...? “
” 옳바른 방법을 택했으니까 그렇지. 처음에 했을때랑 다르게 느껴지지 않았냐? “
“ 네, 좀 더 온전해졌다고 해야할까요. 마력의 기운에 손실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어요. “
내 말에 카르사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별안간 삐빅대며 휴대용 수정구에서 나는 소리에 눈길을 돌렸다.
“ 딱 맞춰서 시간됐네. 자, 다들 짐싸. 나가야 할 시간이 됐으니까. “
“ 아! 드디어 나갈 수 있는거예요? 잘됐네요! 완전 심심해서 죽을 뻔 했거든요. “
드러누워있던 에이미가 기다렸다는듯 내뱉는 말.
천진난만한 그녀의 성격을 생각해본다면 악감정없이 한 말이었겠지만…
2시간동안이나 기다리게 한 죄가 있기때문에 마음이 무겁게도 느껴졌다.
***
어느 순간부터 공기가 짙게 짓누르듯 마나 기운으로 가득해지고.
그 곳으로부터 음산한 기운이 흘러나오는 것처럼 느껴진다면.
그 근처에서 반드시 둥지가 출현 할 것이라는 징조였다.
10 년 전에 나타났다고 하는 이 장소도 그 ‘ 둥지 ‘ 에 속했지만,
특별한 점이 존재했다.
둥지는 늘 땅바닥에 굴처럼 나타나기 마련이었지만, 이 둥지는 원래 있던 건물에 출현하여 건물 구조를 마계에 가깝도록 변형시켰다.
25층의 수직으로 뻗어난 건물.
그것이 전부 둥지로 변형된 것이다.
그리고 순식간에 지옥도로 변한 이 곳을 부수려 했던건 바로.
“ 우리랑 같은 아카데미의 학생이죠!? “
자신만만하게 말하는 에이미. 아예 콧김을 뿜어내며 흥분을 참지못하는 모습이다.
하긴 그럴만도 하지.
에이미는 영웅담같은 이야기를 좋아했고, 마수사냥꾼들의 이름난 자들을 속속이 꿰뚫고 있을 정도로 잘아니까.
“ 말하고 있는데 끼어들기 있기냐? 좀 조용히 해봐. “
카르사 난처한 표정을 지어보이니 그제야 에이미의 흥분이 좀 시들었고, 우리는 가던 길을 따라 계속 걸어나갔다.
“ 그래서 그게 누구였는데요? “
나는 끊어졌던 이야기의 끝을 되짚었다.
“ 그게… 그런 사람이 있었어. 혼자서 둥지를 파괴하고 다니는 사람이. “
“ 네? 혼자서요…? 그거 완전… “
“ 멋있는 사람이지? “
“ 미친 사람이네요. “
상반되는 감상.
그에 평소대로라면 카르사가 화낼법도 했으나, 이상하게도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왠지모르게 실수한것처럼 헛기침을 연이어서 하는 행동이 의심스러울 뿐.
뭔데?
“ 크흠… 아무튼 그래서 그 사람이 둥지를 파괴 했을 것 같냐? “
“ 아니 파괴하고 자시고간에 둥지가 이렇게 남아있잖아요? 그럼 실패한거 아닌가요? “
“ 땡! 틀렸어! 라크!! “
“ 뭐? 내가 왜 틀려. 증거가 이렇게 우리 눈앞에 있는데? “
“ 하나 조언해줄테니까 잘들어. 마계에 대해서는 상식을 적용시키려 하지마. 그놈들에게는 언제나 예외가 존재하니까. 이 둥지 역시도 그 예외에 속해. 10년전, 이 둥지의 핵은 이미 파괴당했거든. “
둥지의 심장인 생명 코어.
그것은 둥지 전체를 지탱하는 심장과도 같았다.
마수 사냥꾼들이 기를 쓰고 파괴하려 드는 물건이기도 하다.
심장을 부순다면 둥지는 무너지는건 필연이었다.
나 역시도 그렇게 알고 있었다.
“ 그게 어떻게 가능하죠? 파이게도 아직까지 출현하는걸 보면 둥지는 여전히 살아있는거 같은데.. “
“ 그거야 나도 모르지. 내가 마족 새끼들도 아니고.. 아무튼 이 둥지는 특이하게도 오후까지는 파이게같은 약한 마물이 나오고, 밤부터는 오우거같이 급있는 마물들이 출현하는 이상한 곳이야. “
그래서 제러미 선생이 둥지 밖으로 나올 시간을 지정해준거구나.
카르사의 말에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걸어가던 때에, 갑자기 옆에서 걷던 에이미가 말을 꺼냈다.
“ 라크, 마실 것 좀 있어? 나 목이 말라서… “
삐질삐질 흐르는 이마에 난 땀은 먼지가 달라붙은 그녀의 목을 타고 흘러내려서, 지나간 곳마다 그녀의 본래 피부색을 되찾게 해주고 있었다.
펄럭펄럭
갈증과 더불어 더위까지 느끼는지 옷의 목부분을 잡고 펄럭이는 에이미.
활동하기 편한 옷을 입어서 그런지, 헐렁한 목부분으로 그녀의 여물은 여체의 냄새와 땀냄새를 내게 풍기고, 그리고 뽀얀 속살을 아슬아슬하게 내게 보이고 있었다.
“ 야, 나도 목마르니깐 나도 물좀 줘봐. “
갈증을 느낀건 에이미뿐만 아니었는지 카르사도 내게 닦달했다.
“ 잠시만요. 가방에서 물좀 꺼내고요. “
드디어.
지금이 엿보던 기회라는걸 깨달은 나는 가방을 뒤적거려서 물병 2개를 꺼냈다.
“ 너는 무슨 물병을 두개나 들고 다니냐? “
“ 물줘! 물!! “
의기양양하게 물병을 꺼낸 나였지만, 나는 곧 난관에 봉착했음을 깨달았다.
어느 물병이 데이지의 약이 들어간 물병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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