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5화 〉 25. 신역??
* * *
달력에 DDAY를 표시한 뒤 다가오는 날을 하나씩 곱씹었다.
앞으로 5일.
이제 정말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 * *
아침, 나는 마그누스의 호출로 제피로스의 어느 호텔에 와 있었다.
나 뿐만 아니라 요하네스, 스텔라도 함께 호출되었는지 한 발 먼저 도착한 상태였다. 나는 그렇다 치더라도 현역으로 활동하는 최강의 특급 모험가 세 사람이 모두 집결한 탓인지 주변에 배치된 군인들의 시선에 긴장된 기색이 느껴진다.
몇 주 전에 있었던 큰 충격파, 그리고 그 지역 주민들의 집단 실신 사태.
거기다 전국 각지에서 모습을 드러낸 특급 재해까지.
제피로스를 중심으로 벌어진 수많은 사건을 근거로 삼아, 중앙에서 일개 대대의 파견이 결정되었다. 현지의 부대, 그리고 모험가들과 협력해서 사태를 해결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마그누스는 부대에 출두해서 대략적인 상황을 전했다. 물론 내가 엮여 있다는 부분은 제외하고, 최근 몇 달간 사건을 일으켜온 존재가 얼마나 무시무시한지에 대한 설명이었다.
그 존재는 현재 감옥에서 탈출한 보이드의 육체를 사용하고 있으며, 그 힘은 현역으로 활동하는 특급 모험가 전원이 달려 들어도 도무지 승산을 논하기 어려운 수준이라고.
그런 이유로 마그누스 자신을 비롯한 이 도시에 있는 특급 모험가 세 사람, 그리고 나까지 해서 대대에 합류하지 않고 별동대로 활동하겠다는 식의 의견을 전했다.
분류상 모험가는 민간인과 군인 사이에 위치해 있어서 유사시에는 군대의 지휘를 받게 되어있다. 하지만 수많은 모험가 중에서도 정점에 위치한 특급의 경우, 설령 군대라고 해도 쉬이 의견을 무시할 수 없다.
강제명령권을 행사하면 거부할 수는 없지만 가지고 있는 능력이 너무도 강력한 탓에 함부로 사용하기 어렵다.
거기다 마그누스는 성격 파탄자가 많은 특급 모험가 중에서도 특히 사교성이 높고 인맥 관리에 능한 사람이다. 영향력도 높아서 경찰, 군대 양쪽 모두에 줄을 대고 있을 정도다.
마그누스가 홀몸으로 대대에 찾아가서 설득한 결과, 우리는 간신히 부대와 별도로 활동할 수 있게 허락 받았다.
그런데 마그누스는 부대를 설득하러 들어간 그 몇 시간 사이에 벌써 대대장하고 사이가 좋아 졌는지, 형님 동생 거리면서 주접을 떨고 있었다.
도대체 뭘 어떤 식으로 대화를 나누면 그 짧은 사이에 이렇게 친해질 수 있는 걸까.
나도 사교성은 괜찮은 편이지만 마그누스는 그 정도 수준이 아니다. 무슨 최면술이라도 쓴 건가?
대대장과 마그누스의 대화를 뒤에서 듣고 있었는데, 순식간에 상대와 말문을 트는 솜씨가 장난이 아니었다. 저 사람은 다단계 영업 같은 거 시작하면 순식간에 전국구가 되지 않을까.
하지만 이 상황에서도 내 체질은 어김없이 내 발목을 붙잡았다. 마그누스를 포함한 다른 특급 모험가 세 사람은 가지고 있는 힘이 너무 큰 만큼 별동대로 활동하는 걸 이해할 수 있지만, 나의 경우에는 그럴 필요가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대대장의 시선이 나를 품평하듯이 가늘어진다.
"체격은 좋지만 외팔이 인데다가 마력량이……, 거기다가 안색도 안 좋고."
그건 부정하기 어려웠다. 나는 바로 오늘 아침까지 검왕검 내부의 가상 공간 속에서 삶과 죽음을 넘나들고 있었으니까.
3주 내내 개고생한 끝에 합격 소리를 들은 것이 바로 조금 전이다.
안색이 나쁠 수밖에 없다.
"제 능력을 증명할 기회를 주십시오."
나는 조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얕보이는 것 자체는 하루 이틀 일이 아니라서 이제 놀랍지도 않다. 아직도 내 마력은 일반인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상황이니까.
그리고 나는 언제나 나 자신의 실력으로 타인의 평가를 뒤집어왔다.
"……."
대대장은 파견 때문에 바쁜 상황에서 더 귀찮은 일을 겪는 걸 피하고 싶었는지 내 말을 거절하려고 했지만, 나보다 내 뒤에 서 있는 다른 특급 모험가들의 시선이 신경 쓰였던 것 같다.
특히 마그누스의 기세에 큰 압박을 느낀 듯, 그는 조용히 몸을 움찔했다.
이내 대대장의 시선이 옆으로 움직인다. 그의 옆에 서 있던 칼을 찬 군인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선다.
동시에 마그누스도 나를 그 자리에 두고 한 걸음 물러났다.
한 마디 말도 없이, 내 능력을 증명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었다.
그리고.
"……."
나는 검을 뽑지 않았다.
* * *
호텔을 뒤로 한다. 나는 오늘도 그들과 훈련할 생각이었지만, 본격적인 작전을 앞두고 그들도 해야 하는 일이 많은지 곧바로 해산하게 되었다.
그럼, 오늘은 혼자서 훈련할까. 그들이 빠진다고 수련을 거를 생각은 없었다. 원래 이런 건 관성으로 하는 것이라, 하루라도 빼먹으면 좀이 쑤신다.
"신현이 너, 실력이 더 늘어난 거 아니냐?"
"네? 아, 뭐, 그런 거 같습니다."
호텔을 나선 그 순간 마그누스가 의구심이 가득한 시선으로 나를 돌아본다.
대대장의 부하는 모험가로 치면 1급 정도 되는 수준이었다. 선택 받은 자가 아니면 절대로 들어갈 수 없는 특급의 영역을 제외하면 최정상 수준의 고수였지만 나는 그를 검도 뽑지 않고 제압했다.
물론, 백신아의 시련을 거치기 전에도 이 정도 퍼포먼스는 보여줄 수 있었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조금 더 수월하게 진행된 듯한 느낌이 있다.
한 차례 한계 너머의 영역을 체험한 덕일까. 현재로서는 그렇게 추측할 수밖에 없다.
오늘 아침, 백신아는 시련을 통과한 내게 한 번 한계 이상의 영역을 경험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사이에는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다고 열변을 토해냈었는데,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실력이 크게 늘어난 거 같지는 않은데 뭔가 안정감이 느껴진다.
이 감각을 잘 유지해야 한다. 곧 있을 허유와의 싸움에서 백신아가 내게 해줄 수 있는 건 코어의 한계 해제와 마력 제어 뿐.
허유와 싸우는 건 내가 직접 해야 한다.
나 자신의 실력 역시 전투의 한 축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호텔 앞에서 세 명의 특급 모험가와 헤어진 후, 연금술사의 공방을 향해 몸을 돌린다.
앞으로 5일.
결전의 날이 가까이 다가올 때마다 심장이 자꾸 뛴다. 허유와는 지금까지 두 번 부딪쳤고, 두 번 모두 나의 패배로 끝을 맞이했다.
흉터가 남은 우반신이 따끔따끔하다.
과연 이길 수 있을까. 물론 나는 이기기 위해서 이 자리에 서 있다. 하지만 허유와의 싸움이 남긴 트라우마는 진흙처럼 내 영혼에 달라붙어서 쉽게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힘내야지.'
느슨해지려 하는 투지에 다시 한 번 힘을 준다.
도망칠 수도, 즐길 수도 없다면 맞서 싸울 수밖에 없다.
다시 한 번 각오를 다진 바로 그때 나는 불현듯 위에서 다가오는 거대한 기척에 고개를 들었다. 격렬하면서도 날카로운 마력이, 전광석화처럼 내 머리 위에서 빠르게 다가온다.
주변에는 인기척이 드물었다. 나는 거리낌 없이 검을 뽑아든 후, 타이밍을 맞춰서 후려쳤다.
쿵!! 검과 검과 부딪치는 소리가 들린다. 짧은 힘 싸움을 거친 후, 날 습격 해온 쪽이 먼저 후퇴했다. 탁, 탁, 탁, 빠르게 접근해온 괴생명체는 물러서는 속도도 어마어마하게 빨랐다.
그 괴생명체는 어느 정도 물러난 뒤 네 개의 다리로 바닥에 내려섰다. 검은 입으로 물고 있었다. 발달한 송곳니가 검을 단단히 고정했다.
나는 뽑아든 검을 천천히 집어 넣으며 시선을 돌렸다. 검을 부딪치기 전부터 그 괴생명체의 정체는 알고 있었다. 마력이 가지고 있는 성질이 워낙 특이한지라 못 알아보는 게 더 이상하다.
하물며 그녀의 마력에는 내 마력이 일부 섞여있기까지 한 상황이니까.
"파비아, 갑자기 무슨 짓이야?"
"히히히."
파비아는 대답 대신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웃어 보였다. 3개월 동안 머리카락이 더 자랐는지, 삐죽삐죽한 갈색 머리카락이 엉덩이까지 내려와 있다.
입으로 물고 있던 검을 허리춤에 집어넣은 뒤, 파비아가 사족 보행으로 빠르게 다가왔다. 날 반기는 표정에 기쁨이 넘쳐 흐른다. 뿐만 아니라 꼬리도 어마어마한 속도로 흔들고 있다. 저러다가 꼬리가 엉덩이에서 뽑혀 나가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빠른 속도였다.
"사제가……, 나 없는 동안 열심히 훈련했는지 알아보고 싶어서."
"그런 이유로?"
"응응."
파비아가 순박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어차피 그런 이유일 거라고 추측했다.
그리고 파비아 역시 니르바나 사원에서 많은 소득을 얻은 것 같다. 공격에서 느껴지는 무게감이 차원이 달랐다.
그렇다면……, 자타공인 특급 모험가 제일의 천재라고 불리던 그 녀석은 어떨까.
니르바나 사원으로 수련을 떠났던 파비아가 지금 여기에 있다. 그렇다는 건 틀림없이 파비아와 함께 니르바나 사원으로 떠났던 그 녀석 역시……
고개를 든다.
높은 건물의 옥상에서 나는 내가 찾고 있던 여자의 모습을 발견했다. 마침 햇빛이 제일 높은 시간대라 역광으로 잘 보이지 않았지만 틀림 없었다.
햇빛 속에서 여성의 실루엣이 낙하한다. 실루엣임에도 분명하게 나온 곳과 들어간 부위가 구분되는 체형. 오른쪽으로 틀어 묶어 올린 금발.
지난 삼 개월 간 단 하루도 잊어본 적 없는 얼굴이 내 앞에 내려선다.
"다녀왔어. 넌 잘 지내……, 지 못한 거 같네."
루이스도 머리카락이 조금 길어져 있었다. 거기다가 왼쪽 눈을 붕대로 감고 있다. 수련 도중에 다친 것일까?
하지만 나도 남말할 처지는 아니었다. 오른쪽 뺨을 시작으로, 우반신 전체를 뒤덮고 있는 어마어마한 흉터가 내가 경험한 삼 개월을 보여주고 있었다.
"루이스 너, 눈에 그건 뭐야?"
"아, 이거? 니르바나 사원에서도 살짝 소동이 있었거든. 안구에는 별 문제 없어. 선생님에게 보이면 흉터 없이 회복할 수 있을 거야."
"니르바나 사원에서?"
루이스가 붕대로 감은 왼쪽 눈을 손끝으로 가리킨다. 그 이외에도 여기저기에 크고 작은 흉터가 보인다. 파비아도 마찬가지. 내가 싸움 속에서 몸을 사리지 않은 것처럼, 두 사람 역시 몸을 사리지 않고 수련에 집중한 증거였다.
"신현이 너는……, 역시 그 존재와 부딪친 거야?"
"맞아. 너희 쪽에도 충격파가 갔었던 건가."
"응. 삼 주 전이었어."
삼 주 전, 정확히 나와 허유가 다시 한 번 부딪쳤던 날이다.
니르바나 사원이 이 나라 바깥에 존재하는 섬이라는 걸 고려하면 무시무시한 일이다.
이 도시는 이 대륙의 최동남단이니까.
나는 갑자기 흉터 부위가 간지러워져서 오른손으로 뺨의 흉터를 살짝 건드렸다.
"일단 집으로 돌아가자. 자세한 건 가면서 이야기해줄게. 네 이야기도 좀 듣고."
"그럴까?"
루이스가 가볍게 기지캐를 켜고 나서 내 옆에 나란히 선다. 삼 개월 동안 서로 떨어져 있었지만 어색함은 느껴지지 않았다.
서로가 가지고 있는 힘의 크기는 삼 개월 간 크게 늘어났지만 우리는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내가 그런 것처럼, 루이스도 마찬가지였다.
석 주 전, 나와 허유가 부딪쳤던 일을 설명하는 게 급선무인 것 같아 그 이야기를 먼저 시작한다.
루이스와 파비아, 두 사람 모두 허유가 출현하는 순간을 느꼈다고 대답했다. 니르바나 사원에서도 허유가 나타난 순간을 감지할 수 있을 정도로 놈의 존재감은 독보적이었다.
그 순간 마음이 조급해져서 파비아는 니르바나 사원이고 뭐고 다 때려치고 제피로스로 돌아오려고 했지만, 루이스가 만류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파비아에게는 미안하지만 이건 루이스의 판단이 옳다. 물론 파비아의 심정도 이해는 한다.
그 순수한 선의를 느낄 때마다 묘하게 부끄러워진다. 나 자신의 더러운 부분을 나도 모르게 마주하기 때문일까.
나는 루이스에게 나와 스페트로의 패배를 이야기했다. 그리고 그 패배에 의해 샤를로트를 잃게 되었다는 것까지도.
샤를로트를 특별하게 여기는 건 나뿐만이 아니다. 루이스와 파비아의 표정이 조용히 굳는다.
루이스는 샤를로트가 스페트로에게 스스로 몸을 넘겼다는 사실에 특히 놀란 것 같았다.
"……신현이 너하고 나는 샤를로트가 스페트로 때문에 얼마나 괴로워했는지 알고 있잖아. 그러니까…… 그 아이가 어떤 마음으로 스페트로에게 몸을 넘겼을지 짐작이 가."
주먹을 꽉 쥔다. 루이스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간다.
"힘 내자."
"응."
내가 대답한 순간 루이스가 오른손을 내 등에 대고 천천히 쓰다듬었다. 바로 오늘 아침, 가상 공간에서 백신아가 팡 소리가 나게 두드렸던 그 위치였다.
조금 묘한 기분이 들어서, 나는 나도 모르게 눈을 깜박이고 말았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