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0화 〉 최종화 : 오늘부터 우리는 (3)
* * *
일 년 전의 일이다.
그 뒷모습에 마음이 끌렸다.
마력 하나 쓰지 못하는 인간의 육체로 맞서 싸우고, 끝내 승기를 붙잡는 그 모습에.
커다란 감동을 느꼈다.
아마 나는 그 모습을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이 삶이 끝난 뒤에도.
영원히.
* * *
시야가 깜박깜박했다.
사태를 파악하기까지 조금 시간이 걸렸다. 백신아는 흐릿한 시야로 고개를 들었다. 뒷머리를 단단한 것이 받쳐주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아무래도 백신현의 품에 안겨 있는 것 같다.
「검주……, 전……」
"날 이기고 나서 쓰러졌었어. 5분 정도……, 잠들어 있었지."
그의 시선이 살짝 움직인다. 검왕검은 지금 이 순간에도 조금씩 닳아 없어지고 있다. 조금 전 백신아가 쓰러진 직후 칼날의 절반 이상이 붕괴해서 사라졌고, 지금은 불과 수십 센티미터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끝에서부터 조금씩 흩어져서 사라지는 모습이 불이 붙은 양초를 떠올리게 한다.
도대체 얼마만큼의 시간이 남아 있는 것일까.
그조차 명확하게 짚어낼 수 없었다.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요……」
마력이 거의 다한 탓일까. 혈색도 나쁘게 보였다. 연분홍색 입술이 가뭄이 온 논처럼 쩍쩍 갈라졌다.
「하지만……, 만족스러웠습니다……. 재미 있었어요……. 마지막 순간, 검주의 칼날이 제 몸에 닿았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이 싸움에는 가치가 있었어요…….」
가느다란 입꼬리가 희미하게 올라간다.
백신아는 소리 없이 웃고 있었다.
검을 쥐지 않은 손으로 다시 한 번 상처에 손을 가져간다. 그것은 아주 길었지만, 동시에 매우 얕았다. 제대로 된 상처라고 보기 어렵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 누구도 해내지 못한 위업이다.
최근 1년 간 수많은 강적들이 백신아에 도전했지만, 그녀에게 활동 시간이 남아 있는 동안에는 감히 상처를 입히지 못했다.
그녀에게도 처음 있는 일이다.
백신현은 그녀에게 제대로 된 상처를 입힌 처음이자 마지막 존재였다.
그것이 기뻤다.
「지금까지 누구도 해내지 못한 일을 검주가 해내셨다는 것……, 정말로 기뻐요. 최고의 작별 선물을 받았습니다…….」
눈부신 일 년이었다.
그의 성장을 바라보는 것이 삶의 큰 기쁨이었다. 그리고 그는 지금, 다시 한 번 눈부신 성장을 보여주었다.
스승으로서 이 이상 행복한 일은 없었다.
"그건 오히려 내가 해야 할 말이야."
백신현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감정을 상당히 눌러 놓은 탓일까. 목소리가 상당히 흔들렸다.
"난 네게서……, 정말로 많은 것을 받았어. 그 절반도 갚지 못한 채 널 떠나 보내야 한다는 사실이……, 괴로울 뿐이야."
「검주……」
그런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었기에 지금까지 싸워올 수 있었다.
마지막 순간, 더 채워지지 않을 것 같았던 마음 속에 다시 한 번 새로운 감정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니까……, 다음 번에는 내가 널 찾아갈게."
이 말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모든 것을 포기한 상태였기 때문에 더더욱 이해하는데 시간이 걸렸을지도 모르겠다.
백신현은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일까.
「그건……, 무슨 소리인가요……?」
고개를 들어서 시선을 마주친다. 그의 시선은 눈물로 젖어 있었지만, 흔들림은 없었다.
명확하면서도 올곧은 눈동자였다.
"예전에, 말한 적이 있었잖아. 어쩌면 넌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게 아니라……, 허유와 같은 영역에 있는 존재일지도 모른다고."
백신현이 주먹을 꽉 쥐었다.
"그럼 검왕검이 부서지더라도……, 너는 무사하겠지……. 물론……, 허유가 그러했듯이…… 지각능력이 부족한 인간의 눈과 귀로는 널 찾을 수 없겠지만……."
설령 천변무궁류의 소유자라 하더라도 '그들'의 영역을 감지할 수는 없다.
'그들'이 스스로 허리를 낮추고 눈높이를 낮춰주지 않는 한.
백신아와 같은 '그들'과 같은 영역에 도달한 존재와 융합하지 않는 한.
어느 쪽도 까다롭기 그지없는 조건이다. 지금 가지고 있는 실력으로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포기할 생각은 없다.
"그러니까……, 난 강해질 거야."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네게 받은 천변무궁류를 더 예리하게 갈고 닦아서 너희들의 경지에 도달하고 말겠어. 그리고……, 반드시 널 데리러 갈게."
「…….」
백신아는 할 말을 잃은 듯 입을 다물었다.
착각하고 있었다.
그는 다가올 운명을 받아들였다고, 멋대로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백신현은 지금 찾아온 이별에 순응하면서도 새로운 희망을 찾고 있었다.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따지고 보면 처음 만난 그 순간부터 그는 이런 인간이었다.
가능성은 희박하다. 하지만 그는 순순히 희망의 끈을 놓지 않을 것이다.
백신현에게 있어, 백신아는 그 정도로 소중한 존재였기 때문에.
"그러니까……, 너도 '그쪽'에서 기다려줘. 내가 널 찾으러 가는 그 순간까지."
입술을 꽉 깨물며 말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더 싸우자."
「복수전……, 인가요?」
"맞아. 난 너와의 싸움을 패배한 채로 끝낼 생각이 없어. 나는 더 강해져서 네게 도전할 거야."
백신현의 그녀의 손을 살짝 잡았다.
"스승을 뛰어넘는 것이 제자의 사명이니까."
「…….」
잠시 동안 백신아는 말이 없었다. 하지만 사라지지 않았다. 검왕검은 그 짧은 사이에 상당히 짧아졌지만, 조금 남아 있었다.
「……검주라면 할 수 있을 거예요. 저도 그렇게 믿겠습니다.」
확률로 따졌을 때, 매우 희박한 가능성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백신현은 그런 남자이니까.
제자가 뜻을 드러냈다. 이런 상황에서 스승이 해야 하는 일은 그것을 신뢰하고 응원하는 일이다.
그녀가 살짝 눈을 감았다.
「루이스 아씨. 제가 사라진 뒤에도 아마 검주에게는 수많은 시련이 닥쳐올 것입니다.」
"……그렇겠지, 각오했어."
갑자기 이름이 불렸지만 루이스는 침착한 얼굴이었다. 시선을 맞추고 고개를 끄덕인다.
「검주의 곁에서 지탱해주셨으면 합니다.」
"어차피 신현이 뒷바라지 하는 게 내 일과잖아. 네게 부탁 받지 않아도……, 그건 내가 해야 하는 일이야."
루이스가 큰 한숨과 함께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러니까……, 안심하고 쉬어도 돼. 너와 다시 만나러 갈 때까지, 신현이는 괜찮을 거야.'
「역시……, 믿음직하시다니까.」
백신아가 살짝 웃었다.
지금까지 보여준 미소와는 살짝 결이 다르다.
그녀가 다시 고개를 돌린다.
「파비아 아씨.」
"……응."
「파비아 아씨가 가지고 있는 힘은 그게 다가 아니에요. 파비아 아씨는 아직, 훨씬 더 강해질 수 있습니다. 보다 적극적으로 검주와 교류하도록 하세요. 그것이……, 파비아 아씨를 좀 더 높은 경지에 도달하게 해줄 거예요.」
사실, 백신아와 파비아는 대화를 자주 나눈 사이가 아니었다. 하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공통점이 많았다. 검왕의 시대를 살아온 존재들이니까.
두루뭉실한 조언이었음에도 파비아는 크게 공감한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선생님…….」
고개를 돌려서 시선을 마주친다. 연금술사와는 매우 오랜 시간을 함께 보냈다. 호기심이 큰 연금술사에게 있어 검왕검과 백신아는 상당히 흥미로운 존재였으니까.
「지금까지 선생님께는 많은 신세를 졌습니다. 하지만 은혜에 보답할 길이 없어서 솔직히 막막했었어요.」
"……."
연금술사는 쉽게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가 보일 법한 태도였다. 백신아는 다시 한 번 미소를 지었다. 한결 같은 인간에게는 타인을 미소 짓게 만드는 힘이 있다.
「제가 사라지더라도 검집은 사라지지 않고 남을 겁니다. 이 검집은 선생님이 가져 주세요.」
"내게는 과분한 물건이지만……, 주고 싶다는 걸 거절할 이유는 없겠지……."
연금술사가 고개를 살짝 끄덕인다.
"알았어. 소중하게 쓸게."
「선생님이라면 유용하게 써주실 거라고 믿습니다.」
그 직후, 백신아가 조용히 자세를 고쳐 누웠다. 해야 할 일을 모두 끝냈다는 듯 표정에서 힘이 빠진다.
「신기한 기분이에요. 바로 조금 전까지만 해도 괴로웠는데, 괴롭고 아팠는데……. 지금 제 가슴 속에는 희망이 가득 차 있습니다.」
그녀의 시선은 백신현의 얼굴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 이외의 것을 담고 싶지 않다는 듯 시선에 흔들림이 없다.
「강해지세요, 검주.」
백신아가 힘 있게 말했다.
「천하제일의 검사가 되어서……, 절 쓰러트리러 오세요. 천하제일이 된 검주와 최고의 무대에서 실력을 겨루는 것……, 그것이 제 소원입니다.」
"그래, 하늘의 저편에서 기다려줘. 반드시 네가 있는 세계에 도달하고 말겠어."
쥐고 있던 손을 잠시 떼어낸 후 다시 한 번 세게 틀어쥔다.
이 순간, 서로의 마음이 올바른 형태로 전달되었다.
그 상태로 도대체 몇 초가 흘렀을까.
조금씩 백신아의 모습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서로 틀어쥔 손바닥에서 무게감이 점점 사라져간다. 온기가 옅어진다.
소리도 없었다.
이윽고 빛의 입자로 흩어진 육체가 흔적도 없이 이 세상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무지개색으로 빛나는 입자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기다린 후 백신현은 다시 고개를 돌려서 검왕검을 주시했다.
검왕검에는 칼날이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마치 다 타들어간 양초 같았다.
모든 칼날이 사라진 검왕검은 그 빛을 잃고 잿빛으로 색이 달라져 있었다.
파삭, 하는 소리와 함께 형태까지 무너진다.
백신아가 그러했듯 검왕검은 산산히 분해되어 하늘의 저편으로 사라졌다.
일 년 전 지하 깊은 곳에서 발굴되었던 검왕검은, 긴 시간을 거쳐 다시 한 번 자신이 존재하던 하늘로 돌아간 것이다.
"……."
"백신현……"
그는 잠시 동안 말이 없었다.
그저 검왕검이 사라진 하늘의 저편을 하염 없이 쫓았다.
하지만 그런 상태가 오래 이어지진 않았다. 크게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주먹을 꽉 틀어쥐면서 몸을 일으킨다.
"괜찮아……, 이게 완전한 이별은 아닐 테니까."
그의 목소리는 살짝 젖어 있었다.
누르고 싶어도 도저히 억제할 수 없는 감정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
"틀림없이 다시 만날 수 있을 거야."
근거는 없다.
하지만 확신할 수 있었다.
그 자신도 명확하게 설명하기 어려운 이유였다.
검왕검과 백신아가 모습을 감춘 직후 그의 감각에 희미한 연결고리가 잡혔다.
어디로 이어졌는지 알 수 없는 가느다란 실이 백신현의 혼과 이어져 있었다.
그 끈을 움켜쥐듯 주먹을 쥐고, 하늘을 보았다.
"우리들은……, 이어져 있으니까……"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