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4 부러진 핸들 (2)
크레타 섬은 섬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섬 안에 왕국을 세워도 될 정도로 섬의 크기가 크다.
그렇다면 크레타 섬에 사람들이 사는가?
많이 산다.
엄청 많이 산다.
최소한 수 천 명은 살 정도로 많고, 그들은 위험한 괴수들을 피해 여러 가구가 모여 마을을 이루고 있었다.
신의 돌봄을 받지 않는 땅.
이곳에 사는 생명체들은 대부분 인간이다.
인간은 천상에 사는 신들이나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님프와 달리, 감히 신의 모습과 비슷한 것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하는 종족이었다.
탐욕적이고, 타인을 비난하고 배신하기 일쑤이며, 여럿이 뭉치지 않으면 제 몸 만큼의 짐승 하나 잡지 못할 정도로 나약한 존재다.
그래서 한 가지 참으로 미스터리한 점이 있다.
왜 인간은 신을 닮은 걸까?
아니면 신이 인간을 닮은 걸까?
최초의 신이 인간을 만들 때, 자신의 모습을 참고하여 만든 것일까?
아무도 진실은 모른다.
인간들은 신이 어떻게 생겼는 지도 모른다.
인간의 모습으로 설령 나타난다고 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자신들을 공포와 두려움에 떨게 하지 않으려는 신의 배려라고 생각할 뿐이다.
외눈박이 거인이 있고 불뿜는 용이 있는 세상에서, 손짓 한 번으로 그런 괴물들을 날려보내는 인간을 어찌 평범한 신이라고 부르겠는가.
신은 평범한 인간과 달리 압도적인 힘을 선보이는 자들이다.
인간은 신들에게 경배하고 찬양하며 그들의 위엄을 칭송한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해보면 어떨까?
신과 인간의 모습은 큰 차이가 없기에, 신은 인간을 사칭할 수 있다.
-나는 번개의 신이오!
-거짓말하지 마라! 네놈이 번개의 신이면 나는 번식의 신이다!
-제우스 람쥐 썬더!
인간은 신을 사칭할 수 없다.
인간이 아무리 보물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신들이 가진 기본적인 힘을 사칭할 수는 없는 법이다.
-저는 지나가던 나그네입니다. 오늘 여기에 하룻밤 자고 가도 되겠습니까?
-어머, 나그네님. ...목장말고 방으로 들어오셔요. 과부의 집이지만 자고 가는데는 불편함이 없으니까항♥
-나는 주신이고 너는 임신.
-미친 이상한 소리를...아아악!!
대외적으로 신의 모습이 알려져있지 않다면, 신은 자신의 정체를 숨기는 것이 가능하다.
인간들의 틈에 파고들어, 그들의 시선을 피해 마음껏 돌아다닐 수 있다.
바로 지금처럼.
'이게 얼마만에 보는 사람이냐.'
웅성웅성.
제법 큰 마을에 모인 사람들은 저마다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중세 유럽까지는 아니더라도 나름 체계를 갖춘 마을은 한적한 시골마을의 전형이었다.
하지만 마을의 평온을 깨는 존재가 있었다.
바로 나.
'어그로 제대로인데?'
경비병이 없는 마을에 갑자기 처음 보는 낯선 청년이 나타난다?
마을에 이유없이 들일 이유가 없다.
그나마 나를 향해 곧장 짱돌을 날리지 않는다거나, 꺼지라고 욕하지 않고 활만 근처에 겨눈 채 나를 노려보는 것 정도면 충분히 양반이다.
어제 갔던 마을은 나를 쏴죽이려고 했는데.
저벅, 저벅.
"무슨 일로 우리 마을에 왔는가?"
마을의 대표로 보이는 이가 나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왔다.
백발이 성성한 그는 지팡이 하나에 의존하는 노인이었으나, 눈빛은 나를 꿰뚫어보는 것마냥 날카로웠다.
"안녕하십니까, 어르신."
나는 로브를 넘기며 그에게 인사했다.
"여행자입니다.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사람?"
"예. 꼭 찾아야 하는 사람입니다."
"...딱한 사정이군."
예의를 갖추고 이야기를 하니 상대도 함부로 대하지 못한다.
노인은 나를 충분히 존중하고 있었다.
인간 대 인간으로서.
"...하지만 누구를 찾는지는 몰라도, 외인을 함부로 들일 수는 없소."
"압니다. 하지만 이곳에 있다고 들었습니다."
"누구?"
"저는 바다의 님프를 찾고 있습니다."
"......."
노인의 표정이 차가워졌다.
나는 그가 나를 쏘라고 지시를 내리기 전에 급히 안에서 물건 하나를 꺼냈다.
"만약 그분이 이곳에 있다면, 그녀를 찾으라고 제게 말씀하신 분께서 이 증표를 보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이건...?"
내가 꺼낸 물건은 부러진 염소의 뿔이었다.
휘어진 삼각뿔의 모양이 손으로 움켜쥐기에 딱 좋은 형태였다.
"그분께서 직접 제게 주신 물건입니다. 바다의 님프에게 이걸 보여주면 된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기다리시게."
노인은 뿔을 두 손으로 받고 안으로 향했다.
나는 노인이 안으로 들어가는 동안, 안에서 뭔가 반응이 있을 때까지 밖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얼마만에 인간이랑 제대로 대화를 나누는 건지.'
환생 이후.
나는 드디어 다른 사람들의 앞에 모습을 드러낼 수 있게 되었다.
정확히는 '밖에 홀로' 돌아다녀도 될 정도로 성장했다.
단지 문제는 내가 아니라 세상이었다.
외딴 곳에 나타난 남자 한 명.
내가 이전에 다녀온 크레타 섬의 모든 마을에서는 혼자 다니는 남자를 두려워하고 꺼려했다.
이유?
'크로노스 때문이지.'
혹시나 여행자로 위장한 크로노스가 인간을 범하러 온게 아닐까.
저들의 걱정은 충분히 이해가는 수준이며, 나도 십분 그 근심을 수용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조용히 참았지.
만약 이곳에 바다의 님프가 있다면, 괜히 분란을 일으킬 수 없다.
메티스.
아말테아가 내게 뿔을 건네주며 알려준 바에 따르면, 그녀에게는 크로노스로부터 어머니 레아와 내 형제들을 구할 수 있는 비법이 있다고 하더라.
그리고.
-메티스라면 뿔을 붙일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을 거야.
...내가 부러뜨린 아말테아의 뿔을 붙일 수 있는 방법을 알지도 모른다.
* * *
일주일 전.
나는 아말테아의 뿔을 부러뜨렸다.
뒷치기로 핸들을 잡았다가 그만 뿔이 부러지고 만 것이다.
솔직히 엄청 미안했다.
하지만 미안한 동시에, 또다른 것을 알게 되었다.
염소의 님프는 뿔이 부러진다고 죽지는 않더라.
대신 뿔이 부러지면서 그녀는 막대한 고통은 없었다.
나와 섹스를 하는 도중이어서 그런지 그녀는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못한 채, 오히려 기절할 정도로 강한 쾌감을 느끼며 가버렸다.
한쪽 뿔을 마저 부러뜨리면 영영 완전히 가버리는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부작용은 없었다.
-핸들링...좋았는데….
아말테아는 나를 탓하지 않았다.
대신 머리의 뿔을 양손으로 붙잡고 입보지에 자지를 쑤셔박는 걸 더이상 하지 못하게 된 것에 몹시 아쉬워했다.
그래서 나는 메티스를 찾고자 했다.
지혜의 님프.
바다의 여신, 테티스의 딸.
'님프인데 어떻게 여신의 딸이지?'
라는 의문이 있었다.
정말로 그녀가 테티스의 딸인 님프라면 '티탄', 즉 여신이라는 건데 과연 어떻게 된 일일까?
그래서 아말테아에게 물어봤다.
그러니 아말테아는 메티스에 대해 엄청난 답변을 해주더라.
-어머니라고 할 수 있는 테티스가 님프의 모습으로 낳은 거야.
티탄 여신이지만, 님프의 모습을 사랑하여 님프의 모습으로서 잉태한 태어난 존재.
그래서 그녀는 티탄 여신인 동시에, 님프였다.
'테티스, 뭘 좀 아는 여자구만.'
객관적으로 나는 순수한 인간의 모습보다 약간 특이한 님프의 모습이 더 꼴린다.
아말테아처럼 염소 뿔이 달려있는 특징이 있다면, 그 특징을 바탕으로 아주 즐거운 섹스를 할 수 있지 않은가!
'예쁘다고 들었는데.'
아말테아는 내게 자신의 뿔을 증표이자 신원증명으로 건네며 상당히 걱정하는 모습을 보였다.
메티스의 미모를 보고 내가 괜히 반하지 않을까, 그녀는 전전긍긍했다.
순수한 님프인 자신과 달리, 메티스는 여신이니까.
'좋은게 좋은 거지.'
아직 메티스의 모습을 보지는 못했지만, 지혜롭고 아름답다고 소문난 걸 생각하면 분명 지적인 미녀일 것이다.
'생각해보니 지혜의 여신은 아테네가 아니었던가?'
아테나.
미래의 내 딸.
어린 시절 만화로 봤을 때, 헤파이스토스가 제우스의 뚝배기를 쪼개고 그 안에서 거품처럼 태어나던 모습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아테나가 바로 지혜의 여신이다.
어지간하면 신들이 주관하는 영역은 겹치지 않는데, 상당히 의외인 일.
가능성이 있다면, 올림포스 12신이 자리를 잡으며 제우스가 메티스로부터 지혜의 여신 자리를 아테나가 차지하게 만들었다는 가정 정도?
'모르겠네.'
내가 그리스 위키를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상황상황마다 기억을 더듬을 뿐이다.
심지어 올림포스 12신 중 한 두 명은 얘가 12신에 들어가는지 아닌지 간혹 헷갈리기도 한다.
"...모르겠다."
어차피 지금의 제우스는 나다.
그러므로 올림포스도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거다.
'남신들 쳐내.'
포세이돈이나 하데스는 형제니까 그대로 둔다고 치고, 나머지 모든 올림포스 12신을 내 아내나 나와 관계를 맺은 여신이나 그들의 딸로 채울 것이다.
아들?
하는 거 봐서.
감히 아버지가 점찍어 둔 여자를 취하려고 한다거나, 감히 이 몸과 구멍동서를 하려고 하는 즉시 타르타로스에 처박아버릴 것이다.
원전?
알게 뭔가.
내가 제우스인데.
"내 맘대로 그리스."
나의 행적이 곧 훗날 토머스 불펀치 씨가 쓸 그리스 로마 신화가 되리라. 불핀치인가? 아무튼.
성년 제우스.
그 첫 발걸음이 이곳 크레타 섬의 조용한 마을에서 시작되기 일보직전이다.
그리고.
멀리서 노인이 다시 다가왔다.
그는 깊게 가라앉은 눈으로 나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바다의 님프께서 만남을 거부하셨네."
"무슨 소리십니까?"
"말 그대로야. 그대와의 만남은-"
"지금 나오신 분은 누구죠?"
노인은 눈을 지긋이 감았다.
그리고 다시 눈을 뜨며, 나를 향해 길 옆을 가리켰다.
"...눈치좋은데?"
노인의 입에서 흘러나온 목소리는 젊은 여인의 목소리였다.
"따라와. 마을 사람들 보기에 좋지 않을테니."
그녀는 지팡이로 내게 어딘가를 가리켰다.
나는 그녀(?)를 따라 숲 깊숙한 곳으로 따라들어갔다.
숲 한 가운데.
오두막처럼 보이는 집이 하나 만들어져있었다.
나무로 만든 신전처럼 보이기도 한 그곳은 한 사람이 지내기에는 다소 넓은 저택이었다.
사라락.
노인이 지팡이로 바닥을 찍자, 주변의 물기가 노인을 단숨에 집어삼켰다.
쏴아아.
노인은 순식간에 여인으로 변했다.
바다와도 같은 푸른 머리칼을 가진 그녀는 님프 특유의 뾰족한 귀를 쫑긋이며 나를 맞이했다.
"편지는 받았어요. 당신이 그…."
"예. 유피테르라고 합니다."
"유피테르라. 가명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진짜 이름같네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유피테르라는 이름은 제우스를 부르는 다른 이름이니까.
아프로디테를 비너스라고 부르는 것처럼, 나도 로마식 이름이 따로 있다.
나는 그것을 가명으로 사용했다.
제우스라는 신의 이름은 대외적으로 공개하면 좆되니까.
"가명을 밝히는 자를 상대하지는 않지만...이걸 가져왔으니 인정해줄게요. 만나서 반가워요. 나는 바다의 님프, 메티스."
메티스.
아말테아와는 다른, 슬렌더 미녀였다.
환상적인 순산형 골반을 가진, 임신에 최적화 된 몸매.
"그렇게 노골적으로 쳐다보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보이는데요."
메티스는 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어떤 지혜가 필요해서 나를 찾아온 거죠?"
"어...음…."
나는 순간, 할 말을 잃어버렸다.
'당신을 따먹고 싶은 지혜.'
라고 말할 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