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5 지혜의 님프, 메티스 (1)
"들어와요. 누추하지만."
메티스의 집은 뭐라고 해야할까, 중세 시절 숲에 사는 마녀가 혼자 사는 집처럼 보였다.
'자취하는 여자!'
최고다.
"실례합니다."
나는 메티스의 초대를 받아 그녀의 집에 들어가며 현관부터 차근차근 집을 살폈다.
평범하게 혼자 사는 집이다.
빵과 치즈가 바구니에 담겨있고, 거실에는 화덕같은 것이 놓여 솥에 무언가를 끓이고 있었다.
이 일련의 과정이 메티스의 손짓 한 두번에 자동으로 이루어지는 모습이 확실히 '인간'의 힘은 아니었다.
"처음 보나봐요?"
"아, 네. 식사는...직접 해먹는 편이라."
"흐응, 신기하네요. 남자들은 그냥 앉아있으면 빵이랑 치즈가 뚝딱 나오는 줄 알기 마련이던데."
"재미있잖습니까. 제가 먹을 음식, 더 맛있게 먹으면 되는 건데."
빵이나 치즈는 아말테아에게 먹여달라고 입만 벌려도 아말테아가 '아앙'해주며 먹여준다.
하지만 '육류'에 대해서는 아말테아도 요리를 하지 못했다.
염소의 님프는 고기 요리는 잘 못하더라.
그래서 나는 사냥한 짐승의 고기를 아주 멋지게 요리하는데 성공했다.
불꽃은 신들의 전유물이 아니냐고?
아말테아가 구해다줬다.
오직 동굴 안에서만 불길을 활용할 수 있었기에 그 활용도는 제한적이었지만, 나는 불을 이용해 고기를 마음껏 삶아먹었다.
굽는 건 기름연기가 나지만, 삶는 건 그다지 티가 나지 않으니까.
그렇게 나는 그리스에서 수육을 만들었다.
'괜히 여자들이 요리 해주는 남자를 좋아하는게 아니지.'
요리를 해주는 것이 섹시해서 그런 걸까?
그런 것도 있지만, 자신은 가만히 앉아있는데 남자가 자신을 위해 부엌에서 열심히 칼질하고 불을 지피는 것을 보며 행복감과 만족감을 얻는 것이다.
그 대신이라고 하기는 그렇지만, 나는 요리를 해줌으로써 밤에 더 즐거운 섹스를 할 수 있다.
아말테아는 수육과 쌈이라는 것을 새롭게 알게 된 뒤, 처음으로 교재에서 연습한 기승위로 나를 즐겁게 해줬다.
요리해주는 대신, 섹스해줘.
썩 나쁘지 않은 등가교환이다.
'근데 이러면 남자의 흔적이 어딘가는 남게 된단 말이야?'
여자의 자취방에서 남자가 요리를 한 흔적이 있다?
그게 아니더라도 남자의 흔적이 조금이라도 있다?
'메티스한테 크게 실망할 뻔.'
남자가 있는 여자가 외간남자를 그냥 집으로 들이다니.
그건 나를 상대로 뭔가 음험한 속셈이 있는 걸레의 마인드다.
하지만 나는 어디에서도 남자의 흔적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리고 확신했다.
'밤꽃냄새 없음! 남자의 흔적, 올 그린!'
자취하는 여자의 방에 처음 초대를 받았는데 칫솔이 두 개라거나, 몸에 맞지 않는 트레이닝복이 있다거나 하는 것과 비슷한 흔적은 전혀 없었다.
'여기에 처녀면 금상첨화인데.'
그저 평범한 집이었고, 나는 그녀가 가져온 차를 마시며 거실에서 단 둘이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먼길 오느라 고생했어요. 유피테르."
다만.
"님프의 뿔을 붙이려면 그만큼 강력한 접착물질이 필요해요. 이 인근에...그런 물질을 가진 괴물이 있죠."
그녀는 뭔가 서로에 대해 알아가는 시간도 없이 바로 본론을 꺼냈다.
나도 딱히 취미나 그런 걸 묻기에는 상황이 녹록치않아 바로 메티스가 꺼낸 본론을 이어나가기로 했다.
"괴물을 쓰러뜨리면 된다 이겁니까?"
"아뇨? 괴물이기는 한데 대화가 통하는 존재라서요. 적당한 대가를 지불하고 물물교환을 하면 돼요."
"......."
물물교환이라.
'패죽일 수 있으면 패죽이는게 더 빠를 것 같은데.'
법보다 주먹이 빠르지 않을까.
"항상 힘으로 해결하는 것은 능사가 아니에요. 불필요한 싸움을 피하고, 지혜롭게 대처하는 것도 중요하죠."
"그렇군요. 새겨듣겠습니다."
나는 이미 어쩌면 이미 그리스식 사고방식을 가져버린 걸지도 모른다.
'하긴 괴물이랑 드잡이질 할 시간에 메티스랑 떡각 잡는게 훨씬 더 가치있는 일이지.'
스핑크스도 문제를 맞추면 살려주는데, 일단 괴물이라는 소리를 듣자마자 괴물을 죽이고 접착제를 얻어내겠다는 생각에 괜히 부끄러워졌다.
이래서야 전형적인 폭력성 강한 그리스 남자가 아닌가?!
'깨어나라, 내 안의 K-유교인이여!'
처음 보는 여자의 앞에서 섹스하자고 껄떡대지 않고, 차근차근 단계를 쌓아나가기 위해 예의를 차린다.
"그렇군요.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그 괴...아니죠. 그를 만나려면 어디로 가면 됩니까? 이 근방에서 가깝나요?"
"...미안해요. 근데 말을 끝까지 들어봐요. 괴물은 원하는 걸 내놓지 않으면 아마 부탁을 들어주지 않을 거예요."
이건 또 무슨 변화구람.
"원하는 것?"
"그건 괴물의 마음대로라서. 어떨 때는 금은보화일 때도 있고, 어떨 때는 그냥 사과 한 개일 수도 있고. 변덕이 심한 괴물이에요."
"...그리고 어떨 때면 잡아먹겠다고 할 수도 있습니까?"
메티스는 부정하지 않았다.
나는 그녀가 왜 지성이 통하는 존재를 계속 '괴물'로 칭하는지 알 수 있었다.
대화가 통하지 않는 상대.
이성적 대화는 가능해도 정상적인 대화가 불가능한 존재.
어쩌면 '크크크, 너와 함께 온 여자를 내게 바치면 물건을 내어주마'라고 거래를 제안할 수도 있는 존재.
쳐죽여야 할 괴물일 뿐이다.
"그럼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아말테아는 제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전했어요. 자신이 키운 전사인데, 자신의 뿔을 부러뜨릴 만큼 강한 전사라고. 이제는 스승인 자신보다도 강해졌고, 앞으로 더 강해질 자라고. 맞나요?"
"...사실이기는 합니다.
(후배위로 섹스를 하다가) 아말테아의 뿔을 부러뜨렸다.
그리고 아말테아를 상대로 검술로 한 번 승리를 따냈다.
여기에 거짓은 없다.
불필요한 진실은 말하지 않는게 가장 좋은 법.
"그렇다면 충분히 괴물에게 대처할 수 있어요. 지금 바로 갈래요?"
"그 자를 만나러 가자는 말씀이십니까? 알겠습니다."
메티스는 의외로 순순히 나를 도왔다.
"따라오세요. 금방 가니까."
나는 집을 나서는 메티스를 따라 나왔다.
그리고 한참을 메티스와 함께 걸었다.
그녀가 앞장 서서 걷는 바람에, 나는 드레스 사이로 비치는 메티스의 뒷태를 마음껏 구경하며 걸었다.
물론, 나는 머리속으로 메티스의 호의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
'이 여자를 믿을만한가?'
보통 그리스에서 시련을 내리는 존재는 '네가 알아서 해라'라는 식으로 나서기 마련인데, 메티스는 직접 나를 괴물에게로 인도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
혹시 괴물과 한 패는 아닐까?
그런 걱정이 들기도 했지만, 그런 여자라면 뒷감당에 곤욕을 치를 것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잘 알아둘 걸.'
회빙환을 보면 뭘 그렇게 정확하게 기억하는지 철저한 정보에 입각하여 움직이던데, 나는 내 앞의 이 여자가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름 비중있게 나오는 여자인지 아닌지도 알 수 없었다.
'내 안의 제우스, 이 여자는 어때? 네가 미래에 임신시킬 것 같은 여자냐?'
무엇보다도 제우스가 반응하지 않는다.
아말테아 이후, 사실상 처음으로 내 맘에 드는 미인을 만났건만, 제우스는 영 반응이 시큰둥했다.
저 꼴리는 몸을 두고 왜 자지는 안 서는 걸까.
'나를 도우면 돕는대로, 배신하면 배신하는 대로 따먹으면 되는데 왜?'
나를 돕는 여자는 얼마든지 상냥하게 대할 수 있다.
하지만 나를 배신하고, 내 적이 되는 자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응징하고 보복할 것이다.
그게 여자라면 크로노스처럼 개짓거리를 해도 누구도 뭐라고 말하지 못하리라.
메티스가 나를 죽이려고 함정에 빠뜨렸다면, 내가 함정을 돌파해 메티스를 붙잡고 사지를 뜯고 죽이든 보지에 자지를 쑤시든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셈이다.
'섹스하고 싶다.'
내 상상 속에서 이미 메티스는 동료 메티스와 배신자 메티스로 나뉘어 각각 따먹히고 있는 중이었으니.
"질문이 있습니다."
물론 지금은 착하고 성실한 청년, 신사 유피테르여야 한다.
"메티스 님. 혹시 그 자와 안면이 있습니까?"
"서로 존재는 알고 있죠. 그가 이 마을로 찾아오지 않는 건 제가 여기에 있어서 그런 거니까요."
"그럼 그 자가 메티스 님을 공격할 가능성은...있습니까?"
"무슨 걱정을 하는 거예요?"
"혹시나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서, 메티스 님을 데리고 도망쳐야 할지도 모르니까요."
만약에 그가 메티스의 몸을 요구한다면.
혹은 메티스를 잡아먹겠다고 한다면.
나는 메티스를 지키기 위해 그 자와 전력으로 싸워야 할지도 모른다.
"정말...아직 싸워야 한다는 것도 확실하지 않은데 왜 그렇게 걱정하는 거죠?"
"그거야…."
그리스에 있는 대부분의 '괴물'들을 상대로 영웅이 싸우지 않고 좋게 넘어간 경우는 없다.
괴물이라고 불리는 건 다 이유가 있는 법.
"...감이죠."
하지만 굳이 그걸 장황하게 풀어서 설명할 이유는 없다.
만약 괴물이 순순히 접착물질을 내놓는다면 내 감이 그냥 틀린 것일 뿐.
순진한 괴물이기를.
하지만.
"...발이 최소 어린아이만큼 긴 존재라."
나는 그를 만나러 가는 길에 가득한 거대한 발자국에 치가 떨렸다.
이게 만약 사람이라고 치면, '거인'이 아닐까?
"그 자의 이름은 레이플헤스. 기가스에요."
"기가스?"
"신의 피로부터 파생된 가이아의 자식들이죠. 아니, 정확히는 가이아 님께서 신의 피와 흙을 함께 빚어서, 땅을 통해 대리 출산한 전사 중 하나예요. 가이아께서 만들어낸 창조물? 진짜 자식은 아니고."
"......."
아무튼 가이아의 자식이라.
별 의미는 없지만, 촌수로 치면 내게 외삼촌과도 같은 존재다.
'좀 그런데.'
과연 그 자가 순순히 아말테아의 뿔을 치료할 접착제를 넘겨줄까?
미지수다.
"옵니다. 저기."
쿵, 쿵.
멀리서 거대한 나무가 걸어오는 것 같았다.
족히 키가 4m는 되어보이는 기가스, 레이플헤스는 야만인처럼 하반신을 거적데기로 가린 채 몽둥이를 들고 우리의 앞에 나섰다.
"무슨, 쿠흡, 일이냐."
피부마저 흙으로 빚어졌다는 것을 증명하듯 진흙처럼 검정색이었다.
난 메티스를 향해 고개를 한 번 끄덕인 뒤, 그의 앞에 섰다.
"기가스, 레이플헤스 님을 뵙습니다. 저는 유피테르라고 합니다. 부러진 님프의 뿔을 붙일 물건을 찾고 있습니다."
일단 초면이니 정중.
레이플헤스는 나를 위아래로 쳐다보며 배를 긁적였다.
"너, 인간이냐?"
"...네, 인간입니다."
아직은 신으로서의 권위를 드러낼 때가 아니다.
"이상하군. 티탄의 냄새가 나는데."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님프의 보살핌을 받고 자라서."
"크흠. 뭐, 티탄 중에 인간 따위에게 발정난 개새끼가 있을 지도 모르지."
"......."
이 새끼, 지금 나 살짝 디스한 건가?
생긴 건 얼굴에 주먹 한 열 대는 맞아서 찌그러진 것처럼 생긴 놈이, 감히 내게 저딴 식으로 말한다?
'잘생기고 자지 큰 내가 참아야지.'
저런 흉측한 거인이니, 나를 보고 질투하는 건 이해할 수 있다.
나는
"음...좋다. 대신 거기 님프, 2년동안 내 밑에서 봉사해라."
"뭐라고요?
메티스는 순식간에 얼굴이 붉어졌다.
파르르 떨리는 눈썹은 명백한 분노를 담고 있었다.
"너도 이 남자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온 거지? 그럼 내게 복종해라. 2년이면...애 낳기에도 충분한 시간-"
"허, 이 씹쌔끼 봐라?"
나는 검을 들었다.
"뒤질려고 환장했구나."
좆도 나보다 작은게.
역시 최고의 해답은 그리스 영웅식 해결이다.
"죽어라, 이 더러운 괴물아!"
견적이 나왔다.
이 새끼, 아말테아보다 훨씬 약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