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1 나의 형제자매를 위하여 (1)
"여기요, 구토유발제가 다 만들어졌어요."
메티스는 내게 도자기에 든 끈적하고 걸쭉한 액을 하나 건넸다.
도자기의 크기는 거의 2L 물주전자만큼 컸고, 뚜껑과 덮개로 밀봉된 구토유발제는 도자기를 가득 채울 만큼 컸다.
"이만큼이나 많이 쌌다고?"
"그러게요. 이게 다 제 뱃속에 들어있던 거라니. 나 참."
"...그렇게 얘기하니까 뭔가 좀 잔인한데. 잠깐만. 가마솥은 그렇게 넓었는데 나온 건 고작 이정도 밖에 안 된다고? 너 혹시 조금 빼돌린 거 아니냐?"
"설마요. 제가 그럴 님프로 보여요?"
"...그렇겠지."
설마 레아를 구하고 내 목숨이 달린 일인데 그런 위험한 짓을 저지르겠어.
"미안하다. 그냥 농담 한 번 해봤어."
"...농담도 참."
그래도 메티스의 머리를 쓰다듬으니 가만히 있더라.
메티스는 뚱한 얼굴로 도자기 안을 가리켰다.
"가마솥 안에 있던 걸 최대한 압축해놓았어요. 크로노스가 그 안에 있는 걸 먹으면 뱃속에서 압축이 풀리게 될 거고, 안에 있던 것들이 부풀어오를 거예요. 그러면 이제 크로노스의 뱃속에 있던 당신의 가족 분들이 밖으로 나오게 되는 거죠."
"그래...."
이름은 전부 다 알고 있지만 생면부지의 내 가족들.
포세이돈, 하데스, 헤라, 데메테르, 헤스티아.
다른 건 몰라도 올림포스에 제우스 치하의 체계를 만듦에 있어 이 다섯 명은 필수불가결한 존재들이라고 할 수 있다.
올림포스 12신.
그들 중 분명 둘 정도가 헤라와 낳은 자식으로 기억한다.
'헤스티아가 올림포스 12신에 들어가던가? 하데스는 들어가던가?'
자세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뭔가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어떠랴.
내게 흐르는 김치의 피가 그리스에서도 통하는, 인간 세상의 이야기이나 티탄족에게도 통하는 기본을 알려주고 있다.
'혈연이 최고야.'
다른 것보다도 피의 인연은 무시하지 못한다.
올림포스를 다스릴 12신 중 일단 내 형제자매들을 절반 박아넣고 시작하면, 후에 들어올 다른 이들은 감히 반역할 생각도 못하고 존중하고 떠받들게 되리라.
그리고.
지혜의 님프.
지혜의...'여신'.
'자기들 구해주는 약을 만들어줬는데, 내 곁에 둬도 되겠지.'
아직 나는 헤라를 만나기 전이다.
그렇다면 헤라 이전에, 이미 나와 인연이 생긴 여자가 있다고 한다면 헤라도 눈감아주지 않을까?
그리고 만약 헤라가 내가 보기에 너무 빻은 모습이라고 한다면, 헤라의 자리에 메티스가 올라가도 되는 거 아닐까?
'원전 따위.'
내 좆가는 대로 올림포스는 다시 체계가 정립될 것이다.
그걸 위해선 이제 크로노스가 있는 곳으로 향할 차례.
"메티스. 약속을 하나 하도록 하지."
나는 도자기를 내려놓고 메티스의 두 손을 꼭 붙잡았다.
"반드시 살아서 돌아오마."
"...누가 들으면 서로 사랑을 약속한 사이인 줄 알겠어요. 저는, 그냥 당신에게 도움을 준 것 뿐인데."
"제우스의 이름으로."
"!!"
메티스는 화들짝 놀랐다.
우리는 하늘 아래에 있고, 크로노스는 언제 어디서든 우리의 대화를 들을 가능성이 있었다.
그럼에도 내가 유피테르라는 가명이 아닌 '제우스', 신명(神名)을 걸었다는 것은 스틱스 강에 맹세했다는 것과 같은 이치이리라.
지금 스틱스 강이 존재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다, 당신...!"
"언젠가 내가 신좌를 차지하고 나면, 12명 개의 옥좌를 만들 거다. 그곳의 한 자리가 네 자리가 될 거다."
"...저는 바다의 님프일 뿐인데요?"
"님프이자 티탄이지. 내가 그 자를 쓰러뜨릴 큰 도움이 될테고, 나의 가족을 구한 여인이 여신으로서 권위를 받아야하는 건 마땅한 것 아닌가?"
나는 메티스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내가 만들 새로운 세계에서, 지혜의 여신은 너야."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시니 몸둘 바를 모르겠네요."
"그래서 싫어?"
"...기다리고 있을게요."
쪽.
메티스는 내 입술에 대고 키스했다.
이게 전쟁 영화 속에서 자주 나오는 데드키스의 플래그가 될 지, 아니면 로맨스 영화에서 나오는 연인끼리의 클리셰가 될 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저 내게 모든게 걸렸을 뿐.
"어서 가세요, 당신."
"...메티스."
"왜 그러세요?"
"섹스하자. 네 키스 때문에 지금 발기했어."
"......."
메티스는 황당해하면서 내게서 거리를 벌렸다.
나의 제우스는 그녀의 키스에 그만 고개를 들어버렸고, 나는 민망하여 면목이 없었다.
"...약은 다 만들었잖아요."
"비상약이 필요하지 않을까?"
"아...풋. ...비상약이라. 흐흥."
메티스는 도자기를 물방울로 보호한 뒤,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필요하면, 다시 들어...꺄아악!!"
나는 현관에서 메티스를 범했다.
* * *
크로노스를 대적할 자, 감히 아무도 없으니.
티탄들은 모두 크로노스를 따라야만했다.
가장 강대한 자인 우라노스를 꺾고난 뒤, 크로노스가 사용하던 낫에는 우라노스의 피가 스며들어 강대한 힘을 자랑하게 되었다.
티탄들은 크로노스의 힘에 두려워하면서, 한편으로는 그의 폭정에 불평불만을 가지게 되었다.
크로노스는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는 지배자였다.
외적을 상대함에 있어 강력한 힘으로 그리스의 영토 전역을 안전하게 지키는 절대군주로서의 면모를 보였다.
그가 그리스를 다스리는 것도 크게 나쁘지는 않았다.
단지 레아로부터 여섯 자식을 모두 보고 잡아먹고난 뒤, 레아가 아닌 다른 여인들을 범하고 다니면서 크로노스의 치세에 대한 불만은 수면 아래에서 들끓기 시작했다.
와하하하!!
그러나 크로노스의 주변에는 항상 술과 음식, 그리고 웃음이 가득했다.
결국 결이 같은 사람끼리 모이기 마련이라고, 크로노스의 주변에는 강간과 살육을 좋아하는 티탄들만이 모이게 되었다.
크로노스도 직언을 하는 이들을 고깝게 여겨 좌천시키기도 했고, 그 바람에 크로노스 본인에게 가장 큰 위협이 될 자도 함께 좌천시켜버렸다.
프로메테우스.
청년은 '예언가'로서, 생명의 어머니 가이아에 준할 정도로 미래를 정확하게 보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미래를 안다는 것은 전쟁에서의 승리를 가져올 수 있는 중요한 수단을 가지고 있다는 것과 마찬가지.
언제 어디에 낫을 휘두르면 외적이 쳐들어온다는 것을 정확하게 알기에, 프로메테우스는 그걸 예언으로 적어 매일 매일 보고를 올렸다.
하지만 최근, 크로노스에 대한 것 만큼은 어째서인지 잘 보이지 않았다.
자신의 예언 능력에 대한 자괴감과 회의감도 들었지만, 무엇보다도 크로노스가 자신을 이제는 쓸모 없어진 걸레짝마냥 취급하는 것에 분개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특별한 힘은 있어도 맞서싸워 이길 수 있는 근력은 없었다.
결국 프로메테우스는 '어느 날'이 되기만을 학수고대했다.
언젠가.
그 날이 올 것이다.
벼락처럼 나타난 존재가 존재감을 마음껏 드러내며 등장할 때까지, 자신은 존재감을 지우고 버티고 버티면 된다.
설령 너는 부엌이나 관리하라며 식량창고를 관리하는 일을 맡는 굴욕적인 일을 겪게 되더라도.
"하아."
프로메테우스는 한숨을 푹 내쉬며 과일을 깎았다.
식량창고에서 얻는 유일한 낙은 사과를 깎는 것이었고, 껍질 채로 예쁘게 잘라 어떤 모양으로 깎아 조각하는 것이 그의 취미였다.
그리고 또 하나의 취미가 있다면, 식량 창고에 나타나는 쥐새끼를 잡는 것.
"...응?"
그런데 오늘은 쥐새끼가 크다.
프로메테우스는 손에 든 과도를 움켜쥔 채 바스락거리며 통로를 넘어오는 존재에 경계했다.
"무슨…."
"푸하! ...어?"
바닥에서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흙이 가득 묻은 금발의 청년은 프로메테우스를 보자마자 사색이 되어 바닥 대리석 타일을 들어올리며 몸을 일으켰다.
"!!"
그 속도는 거의 신속.
사자가 사냥감을 덮치듯, 프로메테우스는 순식간에 청년에게 사로잡혔다.
"미안하지만 나를 본 이상 죽어줘야겠습니다."
"자, 잠깐…!"
프로메테우스는 자신의 목 뒤에 느껴지는 서늘한 감각에 급히 소리쳤다.
"부엌으로 크로노스가 옵니다…!!"
"?!"
청년의 눈에 당혹감이 생겼다.
프로메테우스는 급히 청년을 기둥 뒤에 숨긴 뒤, 떨어뜨린 과도를 들어올렸다.
쾅!!
거칠게 열린 문에는 술에 잔뜩 취한 크로노스가 있었다.
그는 고주망태가 되어 절뚝거리며 저장고에 쌓인 오크통을 하나 들어올렸다.
"기, 기다리십시오! 주신님, 그건 내일 있을 식전주…!"
"마! 식전주 안 마신다고 뒤지냐, 새꺄!"
혀가 꼬인 크로노스는 프로메테우스를 밀치며 오크통을 챙기고 밖으로 떠났다.
"쓰벌, 뭔가 기분 더러워서 와봤더니 있는 건 눈 먼 병신 밖에 없고...퉷."
크로노스는 가래침을 뱉으며 창고를 떠났다.
입에서 피를 흘리던 프로메테우스는 손등으로 입을 닦은 뒤, 크로노스가 가자마자 옷에 묻은 먼지를 털었다.
"...이제는 나오셔도 됩니다."
"저기...당신은…?"
"저는 프로메테우스. 예언가입니다. 아주...오랫동안 당신을 기다려왔습니다. 마지막 생존자시여."
기둥에서 나온 금발청년은 당연히, 제우스였다.
* * *
미래를 안다는 것은 정말로 큰 도움이 된다.
그리고 나는 이 남자의 정체를 알고 있다.
프로메테우스.
제우스로부터 불을 훔쳐 인간들에게 뿌린 존재.
그리고 인간들은 프로메테우스를 찬양하기 시작했고, 화난 제우스는 프로메테우스를 바위산에 묶고 매일 독수리가 간을 쪼아먹게 만들었다.
'그건 너무 그리스 적인 생각 아닌가?'
나는 그러지 않을 것이다.
제우스가 프로메테우스를 괴롭힌 건 분명 자기가 얻어야 할 인기를 프로메테우스가 얻어서 그런 것이리라.
그럴 바에는 내가 불을 뿌리고 명예를 얻을 것이다.
이 남자가 지금부터 나를 도와줄 것을 생각하면, 은혜를 그런 잔인한 짓으로 갚을 수는 없다.
"정말로 여기에 어머님께서 계시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이곳에...레아 님이 계십니다."
나는 프로메테우스의 도움으로 레아의 거처 앞에 섰다.
나무 덩굴이 정문을 휘감아둔 것이 누구의 침입도 거부한다는 것 같았다.
덩굴에는 장미처럼 가시가 난 것이 그녀가 입은 상처를 반증하는 것처럼 안타까웠다.
덥썩.
나는 덩굴을 직접 내 손으로 만졌다.
날카로운 가시가 내 손을 파고들었고, 덩굴에는 금방 피로 물들기 시작했다.
구구구.
덩굴들이 순식간에 좌우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잠깐 망을 봐주시겠습니까?"
"걱정마시길. 오늘 크로노스는…지상의 다른 여인을 범하러 갔습니다."
"감사합니다."
나는 프로메테우스에게 고개숙여 인사한 뒤, 동굴 안으로 걸어들어갔다.
안으로 전부 들어가기도 전.
다급한 발걸음 소리로 달려오는 여인이 있었다.
탁한 금발에 풍만한 가슴을 출렁이며 달려오는 여인은 원숙미가 가득했다.
"아, 아아…."
그녀는 나를 보자마자 울기 시작했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와락.
"이제, 제 형제자매들을 구하러 가시지요."
"아, 아아…."
어머니, 레아는 나를 안고 한참을 울었다.
티탄이라서 그럴까, 아니면 내가 환생자라서 그럴까.
'새끼가 분위기 파악은 하네.'
다행히, 제우스는 발기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