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38 탈출, 타르타로스로 (4)
바다의 여신 테티스와 그녀의 딸 메티스의 비호 아래.
우리는 가이아가 관리하는 땅에 잠시 머물 수 있게 되었다.
'잠시'.
"대지모신이자 모든 생명의 어머니를 뵙습니다."
신전 한가운데.
나는 순백의 드레스를 입고 나를 기다리고 있는 금발 여신의 앞에 허리를 숙였다.
가이아.
아마도 '본 모습'으로 보는 건 사실상 이번이 처음이리라.
아기 시절에 내가 잠깐이나마 젖을 물었던 기억이 있다고 하면 그녀가 부끄러워할 것이기에, 나는 그녀를 순순히 나의 조력자로 대하고자 했다.
"그래. 만나서 반갑구나, 나의 진정한 영웅."
한 때.
그녀의 영웅은 자식인 크로노스였을 것이다.
하지만 크로노스는 우라노스에 이어 가이아의 자식들을 나락인 타르타로스에 집어넣고 말았다.
당연히 크로노스에 대한 분노가 가득할 것이며, 그래도 당장은 나쁜 모습을 보이지 않는 나를 영웅으로 대할 수밖에 없다.
'나도 타르타로스에 처박을 생각은 없어.'
가이아의 자식들, 그러니까 골렘 기가스가 아닌 진정한 생명체 '기간테스'들은-상황을 보고 판단하겠지만-타르타로스에서 영영 나오지 못하게 만들 생각은 아니다.
기간테스들도 크로노스의 피해자이며, 우리의 조력자가 될 몸.
우라노스와 크로노스처럼 될 생각은 없다.
다만 그들이 신들의 영역이나 우리가 다스려야 할 땅에 큰 피해를 준다면 그때는 응당 조치를 취할 것이다.
그전까지는 그들에게 특별한 조치를 내리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그들의 도움을 받아야 할 것이다.
"한 번...안아보자꾸나."
가이아는 두 팔을 벌렸다.
나 또한 그녀에게 다가가 가이아를 안았다.
뭉클.
레아 이상의 모성이 내 가슴팍에 닿았다.
가이아는 눈을 감고 내 가슴에 얼굴을 묻었고, 나는 남들 몰래 가이아의 엉덩이를 살포시 움켜쥐었다.
'신전이라서 다행이야.'
감히 누가 신의 뒤에서 신을 바라볼 수 있겠는가?
가이아의 뒤에는 아무도 없었고, 그 덕분에 나는 가이아의 탐스러운 엉덩이를 만질 수 있었다.
그리고 애초에 지금, 이곳에는 우리를 보는 사람이 없었다.
여동생과 레아는 휴식을 위해 각자의 방에 잠시 머물렀고, 가이아는 나를 따로 신전에 불렀으니까.
물론 지금은 '그것'을 할 타이밍이 아니다.
"...정말 잘 자랐구나."
가이아 또한 하복부를 내 아래에 맞닿게 하며 몸을 비볐다.
뒤에서 보면 애틋함이 느껴질 뿐이지만, 우리의 실상은 그저 야릇함이 느껴지는 신호일 뿐이었다.
"이게 다 전부 가이아 님의 가호 덕분입니다."
"그래, 어려운 일이었음에도 과업을 무사히 성공한 것을 축하한다. 그리고...크로노스를 피해 이곳까지 온 것도 축하하고."
"테티스 님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테티스의 딸, 님프를 아내로 맞이하겠다고 했지?"
가이아가 내게서 떨어지며 눈을 흘겼다.
"그 아이가 분명 똑똑하고 지혜롭기는 하지. 그런데...아내로 맞이한 이유가 있느냐?"
"이유는 하나뿐입니다."
"무엇이냐? 주신에게 한 방 먹일 수 있는 비책을 짜내는 지혜? 그도 아니면 네 취향의 육신? 그도 아니면 어머니가 테티스라는 배경?"
"사랑스러우니까요. 사랑하고."
"......"
가이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내 얼굴을 잡아당기며 눈을 유심히 살폈다.
"...그런 흔적은 없는데."
"흔적이요?"
"아무것도 아니다."
사랑이라는 말에 이상한 것에 중독된 게 아니냐는 듯 반응한다?
내가 아무리 신화를 몰라도 그런 건 알고 있다.
에로-쓰!
아프로디테의 아들이자 '큐피트'라고도 유명한 존재, 에로스.
그의 화살이면 신들조차 파멸에 이를 수 있는 사랑에 빠진다고 하더라.
가이아가 의심한 건 그에 따르는 효과가 내게 작용하여, 내가 이유 없이 큐피트의 화살에 맞았기에 메티스를 사랑하고 아내로 맞이하겠다고 한 게 아닐까 하는 걱정 때문이었으리라.
절대 아니다.
주변에 거부감없이 아내를 맞이하여 섹스할 수 있는 여자가 메티스인 것도 있지만, 메티스 본인이 내 취향을 저격한 미녀였기 때문이다.
이 여자와 함께 평생을 살고 싶다.
이 여자라면 '현대 지식'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어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섹스하는 과정에서도 궁합도 헤라 다음으로 가장 잘 맞았으니, 혼인이라는 것에 거부감이 들지 않는 만큼 최고의 신부였다.
'뭣보다 꼴려.'
나중에 현대적인 이야기해도 충분히 대화가 될 여자가 섹스에도 천부적인 재능이 있고 임신도 잘하게 생겼다?
쌉가능.
결혼하지 않으면 안 될 여자다.
"...메티스에 대한 문제는 나중에 이야기하도록 하자."
"남들 들으면 안 될 이야기라도 되는 겁니까?"
"그래. 네가 크로노스를 물리치고 신들의 왕이 되는 그날, 그때 물어보겠다."
"...뭐 메티스랑 결혼해서 자식을 낳으면, 그 자식이 크로노스와 저처럼 되기라도 합니까?"
"!!"
가이아의 표정이 창백해졌다.
아들이 아버지의 자리를 빼앗고 더 높은 자리에 오른다.
그런 예언의 자식이라면, 나는 어떻게 자식을 바라봐야 할까.
"...뭐, 솔직히 얘기하자면 신좌에 큰 욕심은 없습니다. 정확히는 제가 세계를 평정하고 난 뒤, 태평성대가 되면 제 자식에게 왕의 자리를 물려줄 겁니다."
"너…."
"하지만 만약 제 자식이 제 '아내'를 빼앗으려고 한다면 그건 단호히 대처할 겁니다."
이건 진심이다.
왕위? 선양이든 찬탈이든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하지만 다른 건 몰라도 내 '아내(들)', 나의 여인들을 건드리는 건 용서할 수 없다.
"제 여자를 건드리는 자는 자식이라도 용서하지 않을 것입니다."
"...너는 이미 그런 짓을 저질렀잖니?"
"그거랑은 얘기가 다르죠. 저는 아버지의 여인을 빼앗은 게 아닙니다. 가정폭력으로 고통받는 부인을 구한 것뿐입니다."
"말은…. 하아."
가이아는 머리를 긁적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네 자식이 네 여자를 빼앗는다는 예언은 아니니까 안심하렴."
"그럼 됐죠. 흐흐, 뭐...솔직히 제가 크로노스를 상대로 쟁취한 왕위를 빼앗긴다면 조금 배가 아프긴 하겠지만, 아내랑 같이 어디 신전 하나 세워 놓고 즐겁고 행복하게 지내면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허름한 동굴 속에서도 둘이 함께 있다면 행복은 얼마든지 있는걸요."
"......정말, 너는 이질적인 아이로구나."
매번 올리브 기름만 가득한 곳에서 김치의 상큼함이 감도니 당연히 이질적이라고 느낄 수밖에.
딱히 내가 서-윗한 게 아니다.
그리스 놈들이 희대의 강간마들밖에 없어서 그렇지, 나도 한 남자 하는 놈이었다.
"...그렇다면 그 행복을 위해서, 너는 먼저 가야 할 곳이 있다. 내 너를 이곳에서 안전히 키우고 싶었으나, 너는 이미 장성했다. 그리고 이제 이곳도 너희에게는 너무 위험하구나."
"예?"
"크로노스가 이미 예전부터 이곳을 공격하려고 했던 것은 잘 알고 있을 테지. 너희가 크레타 섬에서 도망쳤으니, 크로노스는 이곳을 더욱 격렬히 공격할 것이다."
"...가이아 님께서는 저희를 지킬 수 있어도, 그 아래에 있는 분들은 불만이 생기게 되겠군요."
내 말에 가이아는 쓰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다들 가이아로부터 물려받은 피로 이어진 친척이라고는 하지만 혈연도 크로노스가 보이는 강대한 힘 앞에 의미가 없어지기도한다.
배신.
가이아는 아니더라도 가이아 아래에 있는 자들이 우리를 배신할 수 있다.
공포와 두려움, 가이아를 배신하고 크로노스에게 레아와 동생들을 납치하여 바쳤을 때의 부귀영화.
"어쩌면...동생들을 잡아서 크로노스에게 바친 다음, 이 여자와 결혼시켜달라고 하는 놈들도 있을 테고요."
"부끄럽지만, 그렇지. 그리스 놈들이…다 그러니."
여자를 납치하여 범한 다음 아내로 맞이하는 일은 그리스에서 비일비재하다.
그리스 남자들이 무슨 짓을 벌일지 모르는 이 땅에서 믿을 수 있는 건 우리 가족 뿐이다.
혹은 나나 우리 가족에게 배신을 할 수 없는 존재이며 큰 은혜를 입은 경우!
-가이아 여신에게는 우라노스와의 사이에서 낳은 수많은 자식이 있어요. 티탄 신족도 있지만, 배 아파 낳은 자식이 아닌 경우도 있죠.
메티스의 지혜에 따르면, 가이아는 우라노스의 성기가 잘렸을 때 흘렸던 피에서 수많은 생명을 창조해냈다.
직접 임신했다는 것은 아니고, 땅을 대리자궁삼아 새로운 생명으로 탈바꿈하게 만들었다는 말.
그 바람에 모습은 일반 신들, 티탄과는 상당히 다른 '괴물'의 형상을 한 경우가 많다고 했다.
-당신이 크로노스를 상대로 승리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도움이 필요해요. 특히 믿음직한 이들을 찾는다면...크로노스에게 크게 피해를 당한 분들. 그들을 타르타로스에서 구해야 해요.
타르타로스에 갇힌 자들.
그들을 구해 우리의 '전력'으로 삼는다.
"지옥으로 떠나야 한다. 괜찮겠느냐?"
"예. 하지만 혼자서는 가지 않겠습니다. 동생들과 함께 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니…."
나는 가이아의 두 손을 잡았다.
"제 어머니와 제 아내, 아말테아를 잘 부탁합니다, 가이아 님."
"...물론이다. 믿고 다녀오렴. 그 아이들은 내 자식이기도 하니, 이것을 가지고 가면 내가 보낸 이들이라고 믿을 것이란다."
가이아는 내 손에 작은 구슬 세 개를 건넸다.
달걀보다 살짝 큰 그것은 마치 보석과도 같은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었고, 가이아는 식물의 줄기같은 실을 이용해 보석을 목걸이처럼 엮어 내 목에 걸었다.
"이게 증표가 될 것이다."
"감사합니다, 가이아 님. 그러면...다녀오겠습니다."
"잠깐."
가이아는 내 손목을 붙잡았다.
"...신전 안에 작은 방이 있다. 그곳에 잠시 기다리고 있거라. 아말테아가 너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야."
"......풋."
나는 가이아의 떨리는 손을 꼭 붙잡으며 작게 속삭였다.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는 방이라면...아말테아가 아니더라도 괜찮은 거 아닌지?"
"......."
가이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단지.
"...그건 나중에."
여지만 남긴 채, 그녀는 신전 안으로 사라졌다.
* * *
"...하아."
제우스는 신전을 떠났다.
홀로 침대에 남은 아말테아는 뱃속 가득한 생명을 느끼며 한탄했다.
"왜 저런 남자가…."
"저기...가이아 님…."
아말테아의 옆에는 아말테아가 함께 누워 있었다.
그녀도 배에 마찬가지로 똑같은 생명을 담고 있었다.
"지금...뭔가 무서운 얼굴을 하고 계셔요."
"...후후, 아무것도 아니란다."
아말테아로 변한 가이아는 아말테아의 볼을 쓰다듬으며 웃었다.
"만약...새로운 세계의 지평을 연다고 하면 그건 제우스가 되어야 할 거야. 그렇지?"
"네, 네. 그렇...죠?"
"그래. 그래야겠지…."
아말테아의 볼을 쓰다듬는 가이아의 눈은 착 가라앉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