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40 키클롭스 세 걸레 (1)
스틱스 강을 지나 타르타로스로 내려가는 길.
명계의 강은 너무나도 고요했다.
-약속은 반드시 지키리라 믿는다. 스틱스 강을 걸고. 오호호!
스틱스는 우리의 배에 가호를 내려주고 떠났다.
그리고 그녀가 내려준 가호는 스틱스가 크로노스와 나의 전쟁에서 그녀가 어떤 스탠스를 취하는지 명백히 밝히는 신호였다.
훗날 명계의 여왕이 될 하데스와 우리가 탄 배에 가호를 내려줬다.
이 가호 덕분에 강을 따라 흐르며 그 어떤 괴물도 우리를 감히 건드리지를 못했다.
우리는 산 자이나, 죽은 자들이 떠도는 강의 여신으로부터 가호를 받는 자들이니.
키에엑!!
감히 우리를 향해 이빨을 드러내는 자는 우리에게 닿기도 전에 강에서 추방당했다.
강에서 쫓겨나 어디론가 날아간 이들이 어디로 사라졌는가는 미지수.
저승의 강을 지배하는 여신에게 밉보였으니, 그리고 앞으로 저승을 지배할 여왕에게 밉보였으니 영혼은 그냥 사멸하는 것이 더 좋을 지도 모른다.
"왜 그러세요, 오라버니?"
갑판 위에 홀로 나와 강 속에서 절규하는 영혼들의 비명을 듣던 와중, 하데스가 내 옆으로 다가왔다.
"안 자? 좀 더 자는 건 어때?"
"잠이 안 와서 그래요. 며칠 동안 계속 강을 따라 내려가기만 하니까…. 어차피 다음 불침번은 저니까 걱정안하셔도 돼요. 잠은 충분히 잤어요."
그녀는 스틱스로부터 선물받은 검은 드레스 한 벌을 입고 있었다.
원래 검은색이 어울리기도 했지만, 드레스까지 검은색이니 마치 상복과도 같은 모습이었다.
"오라버니, 화나셨어요?"
"내가?"
"상의도 없이 제가 명계를 다스리겠다고 했잖아요. 그렇게 될 지는 모르지만."
"...너에게 화가 났다기보다는 스틱스에게 화가 났다고 하는 편이 맞겠지?"
"오라버니, 들을 지도 몰라요."
"들어도 할 말은 해야지."
본인도 내 불평불만을 들어도 차마 뭐라고 말을 하지 못할 것이다.
"관리도 하기 힘든 명계를 다스리겠다고 한 거잖아. 그러면 네게 특별한 선물 정도는 줘도 되는 거 아니야?"
"저는 이미 이 드레스를 받은 걸요."
"옷 한 벌로 입 싹 닦으려는 건 염치가 없지."
소위 어린 애들 옷 한 벌 해줬다는 표현을 하기는 하지만, 그게 명계 지배에 대한 의지를 천명한 것을 상쇄할 정도로 가치가 있는가에 대해서는 생각해볼만 하다.
지하의 어떤 존재도 범접할 수 없는 옷이다?
물리방어력 9999999수준의 옷이다?
지상에서는 쓸모가 없어도 지하에서는 입은 것 만으로 누구나 지배할 수 있는 마력을 가진 옷이다?
그럼 인정한다.
하지만 평범한 드레스가 앞부분 밑단이 허벅지까지 온다는 것을 제외하면 지극히 평범하다.
"혹시 또 모르죠. 나중에 이 옷에 또다른 가호가 붙으면 지상의 여느 갑옷 못지 않은 물건이 되지 않을까요?"
"그랬으면 좋겠네. 세상에서 둘도 없는 가장 아름다운 옷이 되어서, 명계의 여왕을 누구나 칭송하는 옷이 되었으면 좋겠어."
내가 생각하는 여왕의 옷과는 사뭇 많이 달랐지만, 그래도 하데스 본인의 모습 자체가 카리스마와 위엄을 가지고 있었다.
냉철한 미녀.
분명 지옥의 쓰레기들이 여왕을 범하기 위해 덤비는 자들이 많을 것이다.
"...나중에 명계를 공략할 때, 내가 꼭 도우마."
"후후, 말씀만 들어도 기쁘네요. 하지만 그건 괜찮아요. 제가 다스릴 땅은 제가 정복하겠어요."
하데스는 눈을 찡긋이며 배 근처에 몰려드는 강 속 아귀들을 가리켰다.
"저도 언제까지 오라버니의 뒤에만 숨어있는 아이가 아니랍니다. 비록 오라버니만큼은 아니지만...나름 강하게 자랐다구요."
하데스가 바다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녀의 손에서 뿜어져나온 검은 구체는 눈처럼 흩날리듯 사방으로 흩어져 아귀들 위에 내려앉았다.
끼아아악….
아래에서 아귀들의 신음이 울려퍼진다.
스틱스의 가호가 살아있는 티탄 여신의 향기에 눈돌아간 놈들을 강 너머로 던져버리는 힘이라면, 하데스는 그들을 영혼 째로 찢어버리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죽음의 권능.
날 때부터 가지고 있던 힘인 동시에, 크로노스와 레아로부터 이어진 힘인 동시에, 그녀 스스로 갈고 닦은 힘이기도 했다.
'네크로맨서가 따로 없네.'
판타지 속 흑마법사들이 생각나는 힘을 가진 하데스는 굳이 따지면 마법사 계열이라고 할 수 있다.
검이나 창 등 근접무기는 헤라 이상으로 다루기도 하지만, 그녀의 사령술과 마법은 아말테아도 인정한 달인 급 실력이었다.
나처럼 그녀에게도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다.
신들의 자손이 어떤 분야에 특출난 재능을 보이듯, 하데스는 혼령을 다스리고 죽음을 지배하는 권능을 가지고 태어났다.
천부적인 재능과 노력을 바탕으로 빚어진 실력.
그녀는 내가 메티스를 찾아나서기 이전의 나를 불과 2년 남짓한 시간 만에 따라잡아버렸다.
자격지심? 그런 거 없다.
'내 여자면 상관없지.'
이런 천부적인 성장속도와 재능을 가진 자가 내 편이라는 것 자체에 감사할 뿐이다.
오히려 나보다 더 강해도 상관없다.
올림포스의 지배자가 제우스가 아닌 하데스여도, 나는 좆만 아무렇게나 좆대로 쓰고 다닐 수만 있다면 솔직히 누가 주신이어도 상관 없는 수준이었다.
이미 결혼을 약속한 아내가 있고, 섹프도 있다.
주신이 아니라면 운신의 폭이 좁아지겠지만, 그래도 나의 하반신이 해피해피한 올림포스 라이프가 사라지는 건 아니다.
"다 정리했어요."
내가 뒤에서 그녀를 구경하는 동안, 하데스는 배 근처로 달라붙는 아귀들을 모조리 제거했다.
"...조금 지치네요."
풀썩.
하데스는 내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내가 옆으로 피하거나 뒤로 몸을 당기면 금방 쓰러질 것처럼 내게 기대었고, 나는 하데스의 등을 토닥였다.
"정말 잘했어. 역시 하데스야. 정말 강해."
"...이 힘으로 크로노스를 죽일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데스는 우울한 목소리로 답했다.
...다른 자매들과 달리, 때때로 다소 비관적인 모습을 보이는 경향이 있었다.
"제가 조금만 더 강했으면 좋았을텐데."
"괜찮아, 너는 충분히 강해. 헤라랑 애들 들으면 섭섭할 소리야."
"...죄송해요, 오라버니."
"아니야. 우리가 같이 크로노스를 쓰러뜨리면 되는 거야. 저기 지하에 있는 자들의 도움도 비롯해서."
쏴아아.
어느덧 배는 그곳에 도착했다.
지금까지의 광경이 삼도천이었다면, 이곳은 흡사 '마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분위기가 흉흉했다.
지옥, 연옥. 무엇으로 이곳을 묘사할 수 있을까라는 대답에 나는 이렇게 답하리라.
"타르타로스."
그 자체로도 충분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이 막장의 지옥 속.
우리는 그들을 찾아 구해야한다.
"...슬슬 밀려나오기 시작하네."
끼아아아악!!
스틱스의 가호가 끊어지는 곳.
강의 끝.
육지.
타르타로스의 '땅'에 도착한 순간, 나는 바로 창을 들고 뛰어내렸다.
"바퀴벌레 한 번 더럽게 많네!!"
진짜 벌레는 아니다.
다만 좀비처럼 흐느적거리는 아귀들은 땅에 발을 디딜 수 없을만큼 많았다.
몸에서 고름 터지고 악취를 풍기는 좀비 놈들이 내 동생들을 건드리게 할 수는 없는 법.
"들어와! 너희들이 강해봐야 지옥에서 겁먹고 짜져있는 개새끼들이지! 크로노스한테 덤빌 생각도 못하고 지옥 구석으로 도망친 패배자들!"
역시 어그로는 욕이 갑이다.
끼아아아악!!
나를 향한 분노의 함성이 터져나온다.
온갖 괴수들과 좀비들이 달려오고, 나는 놈들을 향해 창을 휘둘렀다.
쾅ㅡㅡ!!
"잘 들어라."
나는 타르타로스의 땅에 내려앉으며, 부서진 시체 위에 발을 올리고 착지했다.
"크로노스 없으면 제우스가 왕이다."
소위, 크없제왕.
"꼬우면 덤벼."
나는 달려드는 괴물들을 하나하나 차례대로 처리해나갔다.
* * *
"오라버니, 슬슬 도착인 것 같아요."
얼마나 길었을까.
지상에서 가져온 식량도 슬슬 절반 이하로 줄어들어 긴축재정을 펼쳐야겠구나 싶은 순간.
깡, 까앙, 깡!
우리는 좁은 협곡 사이, 작은 동굴에서 들려오는 풀무질 소리에 다들 환호성을 내질렀다.
"드디어 돌아갈 수 있어…!"
"...사흘 걸렸나?"
타르타로스에 도착하고 난 뒤에 사흘이다.
스틱스 강을 흘러온 시간까지 포함하면 얼마나 오래 이들을 찾기 위해 지옥 끝까지 내려왔는지 모른다.
깡, 까앙, 깡.
망치 소리도 멈췄다.
안에 있던 이들도 우리의 존재를 눈치챈 듯 했고, 나는 내 목에 걸린 목걸이를 풀어 손에 움켜쥐고 앞으로 걸었다.
"계시오?"
"...누구냐."
"......?"
안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여자의 목소리였다.
혹시 지옥에서 맞이한 아내일까?
하지만 키클롭스는 셋이라고 들었는데?
"위대한 생명의 어머니, 가이아 여신이 낳은 세 형제를 찾고 있소. 나는 가이아 여신의 후손이며 대지모신 레아의 적자, 제우스라고 하오."
"......운명의 세 여신, 아니 어머님께서 인도하셨군."
끼이익.
문이 열렸다.
"언젠가 어머님께서 얘기하셨지. 자신의 증표를 가지고 오는 남자가 있다면, 그건 크로노스를 파멸로 이끌 운명의 아이라고."
다행히 호의적인 목소리였고, 나는 열린 문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보았다.
"오우야."
"만나서 반갑다, 조카. 아이 치고는 이미 건장하지만."
"씨벌...잘생겼네."
"씁, 존나 따먹고 싶게 생겼고…."
"......."
키클롭스. 다른 말로 사이클롭스.
그들은 모두 외눈박이였다.
정확히는 한 쪽 눈에 안대를 차고 있는 여인들이었다.
...강한 누님들.
대장간의 망치질로 단련되어 근육질에 태닝이 되어있었고, 지방을 가슴과 엉덩이에 모두 모은 것만 같았다.
지상에서는 맛볼 수 없는 걸레 누님들 모임이라고 해야할까.
'여기가 빡촌이냐.'
대장간 안의 붉은 기운이 꼭 그와 비슷한 느낌을 주고 있어서 솔직히 소름이 돋았다.
키 크고 글래머러스한 미녀들만 아니었다면, 나는 정말 사무적으로 대할 자신이 있었다.
근데 일단은, 미녀네?
"혹시 네 동생들 중에 남자...는 없네. 씁…."
"하, 씨발…. 얼마만에 맡아보는 남자 냄새냐. 아으, 벌써 보지 젖는 것 같다. 여기 오고 맨날 자위만 했는데...하아. 진짜 좆이야...."
"거...미안하다. 조카. 우리가 여기 처박히고 보지에 거미줄치고 살아서 말이야. 천박해도 좀 이해해다오. 첫인상이...개판이긴 하지만. 하하."
"...후."
미녀면 어쩔 수 없지.
"크로노스를 쓰러뜨릴 무기를 만들어주시오. 나의 것을 비롯하여 내 동생들의 것까지 전부."
나는 셋에게 지상의 상황을 전했다.
그리고 셋은 서로를 바라보며 내 동생들을 가리켰다.
"거기 파랑 머리랑 검정 머리 거는 만들 수 있어. 하지만 다른 애들은 안 돼."
"못 만들겠다는게 아니라, 우리에게 그만한 힘이 없다는 거야."
"뭔가 먹으면 힘이 나는 거 없나? 넥타르랑 암브로시아 있으면 정말 좋을텐데…."
"씨발, 돌려말하지 말고 그냥 까놓고 말해."
비처녀주제에 어딜 감히 내숭을 떤단 말인가.
"이 제우스 님께서 이 자지로 좆집마다 자궁구 문안인사하러 갈 테니까, 무기부터 만들어."
"...건방진 새끼. 네가 운명의 아이면 다야?!."
나는 바지를 벗었다.
"...다네, 씨발. 어우야, 씁…."
"빨고 싶으면 일해라. 무기 값은 보지에 낭낭하게 넣어줄테니."
키클롭스 세 자매는 서로를 바라보더니 내 눈치를 보기 시작하며-
"...어떻게 만들어드릴까요?"
바로 공손해졌다.
역시.
권력은 좆에서 나오는 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