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51 개전, 티타노마키아 (7) 서전
크로노스 휘하의 티탄들은 내부결속을 다졌다.
이는 크로노스가 자신 아래의 티탄들의 기강을 다잡는 의미이기도 했다.
제우스라는 새로운 신성의 등장.
타르타로스에 갇혀있던 이들을 구해왔다는 막강한 업적.
제우스가 등에 업은 가이아라는 존재.
자신이 가이아의 지지를 받고 반정을 일으켰던 것처럼, 제우스 또한 가이아의 지지를 받고 있다.
그렇다면 누구 하나는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크로노스가 우라노스에게 그랬던 것처럼, 제우스 또한 크로노스를 상대로 승리를 가져올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런 예상에 대해 당연히 크로노스는 코웃음을 쳤지만, 미꾸라지 하나가 물을 흐리는 것처럼 크로노스의 심기를 거슬리게 하는 존재가 한 명 있었다.
프로메테우스!
예언가인 그는 크로노스를 정면에서 막아서며 그를 규탄했다.
더이상의 패륜은 그만둬달라고 말하며 읍소했으나 크로노스는 무시했고, 이는 결국 프로메테우스라는 예언가가 제우스의 편에 서는데 지대한 영향을 주고 말았다.
그리고 몇몇 티탄신들은, 특히 프로메테우스의 예언력에 대해 알고 있던 이들은 하나 둘 불안감을 내비치기 시작했다.
프로메테우스가 제우스를 선택했다고?
그럼 제우스가 이기는 거 아니냐?
그런 우리도 제우스 편에 서야하는 거 아니냐?
어쩌면,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가 이길 걸 알고 자기만 슬쩍 먼저 빠져나간 거 아니냐!
이런 불안감이 하나 둘 엄습하기 시작하니,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크로노스는 휘하 티탄들의 기강을 다잡아야했다.
그 첫번째 희생양, 아니 대상이 바로 프로메테우스의 여동생인 '에피메테우스'였다.
"오라버니...."
회색 머리칼의 여인은 창을 든 채 혈육이 기거하는 올림포스 산을 올려다봤다.
그녀의 뒤로 수많은 티탄 신족들이 무장을 갖추고 있었고, 에피메테우스는 아무리 봐도 크로노스가 이길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압도적인 전력차.
아무리 크로노스의 자식들이라고 한들, 크로노스에게 몇 번이고 살아서 도망쳤다고 한들, 크로노스의 관록과 노련미에는 이기지 못할 것이다.
그들이 아기였던 때부터 크로노스는 수많은 외적을 상대하며 힘을 쌓아왔고, 이빨 빠진 사자처럼 노쇠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아무리 생각해도 오빠의 선택은 잘못된 것 같았다.
-네가 선봉에 서서 직접 잡아오거라. 그렇지 않으면 나는 너를 프로메테우스와 엮인 배신자로 생각하겠다.
그러니 혈육이 바로잡아야한다.
-가족이 책임 져야지.
에피메테우스가 직접 프로메테우스를 잡아 설득한다면, 실력이 어떻든 한 때는 가이아에 준할 정도로 통찰력이 뛰어났던 예언가를 다시 이쪽으로 돌릴 수만 있다면 제우스 세력의 사기를 크게 떨어뜨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진격 준비."
에피메테우스는 직접 창을 들고 올림포스를 오를 것이다.
가장 먼저, 누구보다 선두에 서서 위에서 내려오는 이들을 상대로 창을 휘두를 것이다.
"대장, 저기 앞에 뭔가 이상한 게 있는데요."
"뭔데?"
"제법 넓은 물줄기가 있어요."
보좌로 붙은 다른 티탄의 말에 에피메테우스는 전방을 훑었다.
"...강?"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최소한 사람의 보폭으로 서른 걸음 이상은 걸어가야 할 너비의 강이 있었다.
퐁당.
에피메테우스는 사람 머리만한 돌덩이를 강에 집어던졌다.
그리고 돌덩이가 물속에서 가라앉는 예의주시하며 입술을 삐죽였다.
"제법...깊네."
"방해가 될 것 같다고 만들어놓은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음...."
에피메테우스는 손으로 턱을 쓸며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넘어가려는 순간 밑에서 물이 솟구치면서 우리를 덮치지 않을까?"
"자원자를 받아볼까요?"
"아니, 내가 한다."
에피메테우스는 창을 양손으로 움켜쥐었다.
"최대한 빠르게 뛰어넘는다, '모두'!!"
그리고 그녀는 힘찬 함성과 함께, 땅을 박차고 달려 강물에 들어가기 직전 발을 디디고 날아올랐다.
탓.
에피메테우스는 강을 단숨에 넘었다.
그리고 발을 디디며 주변을 예의주시했고, 사방을 둘러봤다.
"...뭐 이상한 거 없지?"
에피메테우스를 공격하는 그 어떤 대상도 없었다.
그녀는 안심하며 모두에게 바닥을 가리켰다.
"넘어와."
타앗, 타앗.
강 너머에 있던 티탄 신들이 하나 둘 가벼운 도약과 함께 강을 뛰어넘었다.
그 누구도 강물에 발을 디디는 이 하나 없었다.
"함정인 줄 알았네."
에피메테우스는 헛웃음을 지으며 창을 꼬나쥐었다.
"...이게 끝이면 진짜 별거 없겠는데?"
그녀의 눈은 승리에 대한 자신감으로 가득 차있었다.
* * *
본격적인 전쟁의 시작이다.
적들은 어느덧 산 아래에 나타났고, 나는 가장 먼저 내가 올림포스에 마련한 환영인사가 통하기만을 기다렸다.
'썩을.'
최소 20m는 넘는 거리를 단숨에 점프해서 넘어오다니, 티탄 신들은 죄다 괴물인가?
'어떻게 한 놈도 물을 건너올 생각을 안 하는 거지?'
물을 밟고 오는 놈이 한 놈이라도 있었다면, 넵튠이 미리 조치해둔대로 강물이 그자들을 집어삼켰을 것이다.
하지만 놈들은 해자를 그냥 넘어버렸다.
티탄 신족의 압도적인 신체능력 앞에 나의 현대 지식은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어지고 말았다.
'현대 치트 쓰면 대부분 멍청하게 걸리던데.'
소위 주인공 버프는 내게 없는 걸까.
흣차-!
훼이야-!
끼요오옷!
티탄 신족들은 해자를 너무나 쉽게 넘어왔다.
쉽게 넘을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구렁이 담 넘어오기는 커녕 징검다리 건너듯 한 번 땅을 박차고 넘어오는 것으로 해자를 넘었다.
"젠장. 쓸데없이 몸은 건강해서. 어이쿠, 산 올라오는 것도 무슨 동네 마실나오듯이 올라오네. 썩을 놈들."
올림포스에 진을 친 게 의미가 있나 싶을 정도로 놈들은 잘 올라왔다.
"씁...."
선두에 있는 여자는 예쁘고 아름답지만, 그 뒤에 땀내나는 놈들은 전부 다 당장 꺼졌으면 좋겠다 싶은 놈들이었다.
"에피메테우스. 프로메테우스의 여동생인가."
지금 이 자리에 프로메테우스는 없다.
-제우스 님께서는 반드시 이기실 겁니다. 그러므로 저는 그 다음 단계를 준비하겠습니다.
프로메테우스는 나의 '승리'를 확신하고, 올림포스의 내정을 위한 작업에 들어갔다.
그러니 이제 내게 주어진 일은 티탄 신들을 조지는 것.
죽이지는 않는다.
애초에 우리들도 그렇고 저들도 그렇고, 전부 불사신이니까.
"그러니까 저런 놈들이 불사라는 거지? 죽이지도 못하고."
"그렇죠. 티탄 신들은 죽지 않으니까요."
티탄 신들은 불멸이다.
만약 어떠한 방법으로든 죽거나 소멸하거나 했다면 진작 가이아가 크로노스에게 우라노스를 죽이라 명령을 내렸을 것이다.
하지만 죽이지 못하기에 가이아는 크로노스에게 우라노스의 성기를 자르라 명령을 내렸다.
-나는 이 땅의 주신이다!
-네 다음 좆없는 신
-따흑
물리적 죽음이 아닌 사회적 죽음, 그러니까 권위를 바닥으로 처박아서 죽여버린 셈이다.
상대방 대장을 깎아내리는 것은 전체 사기에 영향을 준다.
지금도 마찬가지.
내가 크로노스의 권위를 깎아내린 것처럼, 저들 또한 나의 권위를 무너뜨리려고 하고 있다.
나와라, 제우스!
겁쟁이처럼 숨어있지 말고 나와라!
여자 치맛자락에 숨어서 빌빌거리다니, 네가 그러고도 사내냐!!
티탄 신족들은 아래에서 내게 욕설을 퍼부었다.
산 아래에서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는 올림포스의 정상까지 들렸다.
물론, 전혀 데미지는 없다.
"개가 짖나."
치마폭에 들어간다?
사실이라 딱히 데미지는 없다.
'근데 그건 내가 개인일 때의 이야기고.'
나 개인으로 끝나는 거라면 욕설은 얼마든지 방치해도 좋다.
하지만 집단의 우두머리가 권위에 상처를 입었는데 나서지 않는다면, 그건 내 개인이 무시하고 넘어가는 게 아니라 우리 집단이 상해를 입는다.
제우스가 곧 올림포스이며, 올림포스 전체에 대한 모욕이 될 터.
그리고 올림포스에 대한 모욕은 이곳에 있는 수많은 여인들에 대한 모욕이기도 하다.
"싹다 다시는 덤빌 생각 못하게 박살을 내야지. 역시 계략 같은 건 성미에 안 맞아. 정면에서 깨부순다."
"그럼 지금 내려가면 되나요?!"
"제우스 님, 언제까지 기다리면 되겠습니까?"
중무장한 헤카톤케이레스들은 당장이라도 산을 내려가 티탄 신족과 정면 대결을 펼치려고 벼르고 있었다.
아무리 우리 헤레스들이 150명이나 된다고 해도, 적의 수는 거진 눈으로 살펴도 500-아니 1000명이 넘어보였다.
겉으로 보기에는 숫적 열세는 명확.
크로노스는 없지만, 우리에게는 가이아의 비호가 없다.
오직 올림포스 자체의 힘만으로 싸워야 하니 분명 힘들기는 하지만....
"조금만 참아봐. 우리가 더 유리하니까."
내가 있다.
나의 여동생들이 있다.
헤레스들이 있다.
"적을 정면에서 깨부수되, 우리는 다음 여파를 생각해야한다."
나는 아스트라페를 움켜쥐었다.
"전력으로 사생결단을 내는 건 크로노스가 왔을 때의 일이다. 크로노스가 직접 오지 않은 이상, 또 뒤에 올 자들에 대한 여력은 남겨둬야지."
"전력을 아끼기 위해서는 효율적으로 싸워야할텐데, 지금 그럴 만큼 우리에게 여유가 있어?"
"물론이지, 메티스. 없는 여유는 만들면 돼."
여유라는 건 결국 만들면 된다.
그리고 마침, 올림포스에서의 서전을 승리로 이끌어줄 여신이 당도했다.
"하데스!"
"...시간에 딱 맞게 왔네요."
우리 주변에 하데스의 목소리가 울렸다.
분명 하데스는 없는데, 그녀의 목소리는 내 바로 옆에서 울렸다.
"...그거구나. 키클롭스들이 만들었다는 투구."
메티스는 보이지 않는 하데스의 존재를 두고 바로 정체를 깨달았다.
"그래. 투구는 하데스가 쓰기에 영 안 예뻐서 다른 형태로 바꿔버렸지."
스륵.
허공에서 하데스가 나타났다.
정확히는 머리에 두른 베일을 풀어내림으로써 '투명화'를 해제했다.
퀴네에.
나의 전격 메이스 아스트라페와 넵튠의 삼지창 트라이아나와 함께, 퀴클롭스들이 하데스를 위해 만들어준 아주 특별한 무기.
엄밀히 따지면 무기는 아니다.
앞에서 나서서 싸우는 근딜 넵튠과 멀리서 벼락을 뿌려대는 원딜 제우스와 달리, 마법사에 가까운 하데스에게는 모습을 숨길 수 있는 방어구가 주어졌다.
"준비됐어, 하데스?"
"물론이죠, 오라버니."
하데스는 다시 퀴네에를 둘러썼다.
"싹 다 훔쳐버릴게요."
하데스의 보이지 않는 손.
그 손은, 오밤중에 내 자지에서 정액을 나 몰래 훔쳐갈만큼 빠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