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52 개전, 티타노마키아 (8) 격돌
스틱스의 아들, 크라토스는 스틱스로부터 밀명을 받았다.
-상황을 보고 판단하라.
어머니 스틱스는 제우스와 밀약을 맺었지만, 대놓고 크로노스를 거스르지 못했다.
그래서 자신은 제우스에게 슬쩍 발을 걸치며, 자식들은 크로노스의 군세에 보내는 이중적인 면모를 보였다.
-크로노스 님이 패배할 리가 없지! 암, 그렇고 말고!
정확히는 스틱스의 남편 '팔라스'가 격하게 크로노스를 지지했다.
크라토스는 스틱스의 아들이지만 팔라스의 자식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는 아버지의 명령에 따르면서도 어머니의 밀명을 수행하기 위해, 크로노스의 군세에 합류하여 올림포스 산에 올랐다.
제우스가 불리하면 팔라스를 따르고.
만약, 정말 만약 크로노스가 '예언가의 예상'대로 패색이 짙다면 제우스에게 투항하여 제우스를 따르라.
-프로메테우스 그 놈은 영악한 놈이다. 놈이 그런 행동을 한 건 제우스가 마침 당도할 미래를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스틱스는 프레메테우스의 선택을 아주 중요시했다.
-놈은 아주 지능적으로 제우스...그러니까 올림포스에 붙었다. 어디 놈이 패배하는 일이 있더냐? 없지. 그러니까 너는 직접 전투에 나서서 전쟁이 어느 쪽에 승기가 있는지 확인해다오.
가이아의 예언에 준할 정도로 뛰어난 예언 능력을 지는 자가 선택한 젊은 피.
크로노스를 상대로 선전한 것은 사실이지만, 아직까지 그가 진정으로 크로노스를 정면에서 상대하여 이길 거라고 생각하는 이들은 없었다.
정말로 이길 수 있었다면, 기습이 성공했을 때 이미 크로노스를 제압했을 것이다.
하지만 일시적 타격만 줬을 뿐 크로노스를 타르타로스에 처박을 수준은 아니었다.
제우스가 정말로 크로노스보다 강하다면, 크로노스가 없는 이 '에피메테우스 군대' 정도는 아주 쉽게 물리칠 수 있을 터.
전쟁에 뛰어난 재능을 가진 그가 보기에, 아직까지 올림포스 세력의 힘과 전술은 불합격이었다.
사락.
"...응?"
뭔가 좋은 향기가 지나간다.
여인의 향기와도 같은 정체불명의 냄새에 크라토스는 순간 소름이 돋았다.
주변에는 땀내나는 남정네밖에 없는데 여자의 향기가 난다?
"이게 무슨ㅡ"
서걱.
"아아악!!"
바로 근처에서 비명이 울려퍼졌다.
크라토스가 급히 고개를 돌리니, 그곳에는 양손이 잘린 채 피를 철철 흘리고 있는 티탄이 있었다.
"...안 보이는 적?"
서걱, 서걱.
뭔가가 빠르게 움직인다.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움직일 때마다 티탄 병사들은 비명을 지르며 괴로워했다.
"소, 손이!!"
"누가 치료 좀 해줘! 아, 아니! 내 손 좀 찾아줘! 내 손이 없어졌어!!"
티탄 병사들은 사라진 팔에 비명을 질렀다.
잘린 손목에서 피가 흘러나오는 건 중요하지 않았다.
손을 다시 되찾으면 붙일 수 있는데, 문제는 그 손이 병사들의 발에 치여 산 아래로 굴러 떨어지고 있다는 것.
"...허."
소름이 돋는다.
만약 자신이 향기로 눈치채지 못했다면, 아마 유령처럼 움직이는 여인은 자신을 노렸을 터.
"모두 조심해! 안 보이는 적이 있다!!"
티탄 병사들은 각자 서로 등을 맞대고 주변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비명을 지르는 이는 아무도 없게 되었다.
"...대체 뭐야?"
푹.
"...?"
뭔가가 자신의 머리에 꽂혔다.
정수리를 푹 찌르고 들어온 무언가는 단단한 두개골에 막힌 듯, 아니 박힌 것 같았다.
"...이게 뭐야?"
고통은 없다.
크라토스는 머리에 박힌 뭔가를 뽑아 손바닥 위에 올렸다.
"철가시...?"
손가락보다 얇은, 아니 대바늘과도 같은 철가시가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뭐지?"
구구구.
크라토스의 의문은 점점 깊어지고, 올림포스 산 위에는 먹구름이 드리우기 시작했다.
* * *
현대 지식 치트를 치는 건 일차적으로 실패했다.
해자를 설치하여 적의 침입을 막겠다는 생각은 티탄 신족의 신체 능력을 생각하지 않는 아주 안일한 생각이었고, 나는 겸허히 나의 실패를 수용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현대 지식 치트를 쓰지 않을 것인가?
아니다!
'현대 치트 안쓰는 미래인은 미래인이 아니야!'
고작 섹스할 때만 K-섹스를 활용한다면 나 스스로가 너무 자괴감이 들 것이다.
그래도 나름 고등학교도 졸업하고 수능도 치고 군대도 다녀오고 대학교도 복학이지만 다니던 자로써, 현대인으로서 살았던 지식을 고작 떡칠 때 말고는 쓰지 않는다는 게 말이나 되는가!
나도 나름 대학물 먹은 놈이다.
물론 대학에서 먹물보다 보짓물을 더 자주 보면서 살았지만, 그래도 내가 배운 게 있는데 활용하지 않을 수 있는가.
"진격 준비."
나는 아스트라페를 등에 걸었다.
아스트라페는 정확히 내가 입은 갑옷의 등쪽 걸이에 걸렸다.
크로노스를 상대로는 입지 않지만, 크로노스가 아닌 적들을 상대로는 갑옷을 입을 여유가 있다.
파지직.
등 뒤에서 전기가 뿜어져나오며 내 양손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등에 건 아스트라페는 내 손에 1m 길이의 번개 모양 가지가 생겨나도록 만들었고, 나는 그걸 움켜쥐고 헤레스들의 선두에 섰다.
"하나, 둘, 셋에 달린다. 준비ㅡㅡ!"
말은 필요없다.
하나.
둘.
셋.
"달려ㅡㅡㅡ!"
와아아아!!
헤카톤케이레스들이 비탈길 아래로 달린다.
나 또한 그들과 함께 산 아래를 향해 정면으로 달린다.
넘어진다?
수 m가 넘는 해자도 쉽게 뛰어넘는 티탄 신족은 적 뿐만이 아니다.
우리도 티탄이다.
쿵 쿵 쿵 쿵!!
151명이라는 수가 단번에 산 아래로 달리니 올림포스 전체가 울리는 것 같은 진동이 느껴졌다.
양손에 쥔 번개의 창이 당장이라도 옆으로 퍼질 것처럼 날뛰었다.
"아아아아악!!!"
전방을 향해 힘찬 함성, 일발 장전.
그리고 내가 달리는 것보다 더 빠르게 손에 꼬나 쥔 번개의 창을 앞으로 내던진다!
콰ㅡㅡㅡ앙!!
마치 폭발이 일어난 것 마냥, 번개의 창은 산의 능선에 평행을 이루듯 아래로 날아갔다.
힘이 조금만 낮았어도 번개의 창은 바닥을 향해 꽂혔겠으나, 나의 창은 조금도 가라앉지 않고 정확히 표적을 맞췄다.
퍼억.
능선을 따라 산을 올라오던 티탄 신의 명치에 번개창이 꽂혔다.
파지지직!!
수염이 그득한 놈은 제자리에 멈춰서 몸을 파르르 떨었다.
그 떨림이 단순히 잘게 떠는 정도가 아니라, 물 위로 뛰쳐나온 장어를 보는 것 마냥 활개치며 까무라쳤다.
"어우야."
나는 투창의 반동으로 몸을 간신히 제어하며 제자리에 멈춰섰다.
내 옆으로 헤레스들은 나를 스치고 달려가기 시작했고, 나는 땅에 두 발을 디뎠다.
"이 정도면 할만한데?"
한 발에 한 놈.
번개에 지져진 놈은 전신에서 검은 연기를 일으키며 바닥에 고꾸라졌다.
더이상 일어날 기미조차 보이지 않으니, 티탄 신조차 쓰러뜨리는 아스트라페의 전격은 성능이 너무나도 확실했다.
퍼ㅡㅡㅡ억!!
헤레스들이 육탄 공격을 감행하며 가장 먼저 올라오던 티탄들을 몸으로 들이받았다.
여인의 몸이지만, 분신의 몸이지만 어깨로 티탄의 명치를 들이받으며 아래로 붕 떠버리는 공격은 나로서는 감히 상상도 못할 과격한 공격이었다.
아아악!!
헤레스들에게 치인 티탄들은 뒤에 있던 티탄과 함께 올림포스 산을 구르기 시작했다.
헤레스들의 돌격은 마치 중세 영화 속 중갑기사들의 진격에 쓸려나가는 야만인들을 보는 것 같았다.
"나도 할 건 해야지."
헤레스들이 전위에서 바로 몸을 부딪히며 싸우는 동안, 나는 내 할 일을 해야한다.
내게 주어진 일은 150명의 뒤를 받쳐주는 포병, 그러니까 원딜.
적의 후방을 향해 멀리 포격을 날리며 적진을 와해시키는 것이야말로 이번 서전에서 내가 맡은 역할이다.
"하데스가 작업을 잘 해뒀겠지."
하데스는 맞지 않는다.
하지만 다른 놈들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전술은 간단.
내가 아스트라페로부터 뽑은 전격의 창을 적진의 후방에 꽂아버린다.
하지만 번개의 창은 피격 범위가 좁은 만큼 정확히 맞춰야하며, 티탄 신들 중에는 포물선으로 떨어지는 내 창을 보고 몸을 피할 놈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 '정확하게' 꽂히도록 만들어야한다.
'테스트는 이미 다 해봤어.'
이미 올림포스 정상에서 모든 전술은 시범 운전을 거쳐놓았다.
나머지는 이제 실행하는 일 뿐.
구구구.
적진의 후방.
하늘에 먹구름이 서서히 드리우기 시작했고, 나는 그곳을 향해 하늘 높이 번개의 창을 집어던졌다.
"150명이 1:1로 이긴다. 그리고 나머지는...."
내가 전부 쓸어버린다.
새애액--!!
하늘을 향해 날아간 번개의 창은 먹구름을 지났다.
먹구름에서는 서서히 아래로 빗물을 떨어뜨리기 시작했고, 구름 사이를 가르고 번개가 아래로 솟구쳤다.
쿠궁ㅡㅡ!!
강력한 천둥 소리.
티탄 신족은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어올렸다.
보인다.
놈들의 올라가는 입꼬리가.
하늘에서 눈 먼 화살처럼 떨어지는 번개 정도는 얼마든지 피할 수 있다는 저 자신감에 찬 눈동자가 보인다.
과연 저 자만심이 얼마만에 사라질까?
아아악ㅡㅡ!!
누군가가 비명을 질렀다.
아직 벼락이 떨어지지도 않았건만, 티탄 중 하나가 괴성을 질렀다.
"역시 하데스야."
놈의 머리 위에는 얇고 길쭉한 쇠바늘이 박혀있었다.
퀴네에의 힘으로 숨어서 움직이던 하데스가 박아넣은 것이다.
그리고.
파지지직!!
벼락은, 놈의 머리 위에 정확히 떨어졌다.
"작전명, 프로메테우스."
모든 티탄 정수리에 벼락을.
* * *
"......아아, 보입니다."
올림포스 산의 정상.
유달리 머리가 반짝이는 한 남자, 프로메테우스는 깊은 동굴에 만든 작은 제단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두 손을 움켜쥐었다.
"제우스 님의 승리가. 제우스 님께서 이기는 미래가 보입니다."
프로메테우스는 자조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제우스는 이긴다.
올림포스는 이긴다.
그러나 프로메테우스는 고통받는다.
"...나는 앞으로 만년동안 고통받게 되겠지."
미래는 정해져있다.
운명은 뒤바뀌지 않을 것이며, 프로메테우스는 자신의 미래를 알고 있다.
독수리. 간. 절벽.
단편적이지만 그는 자신의 미래에 대해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올림포스를 위해 뭔가를 하지만, 제우스에게 밉보여 크게 경을 치게 되리라.
슬픈 일이지만, 그것이야말로 '여동생들'을 살리는 길이다.
그래야 다가올 '불확실한 미래'에 대비할 수 있으니.
"...운명의 세 여신조차 모르는, 대지모신조차 모르는 새로운 미래라."
정해진 운명은 그대로 흘러가겠지만, 잔가지가 다르다.
그리고 그 잔가지가 하나 하나 모여 돌이킬 수 없는 거대한 흐름을 만들어낼 수 있다.
예언은, 언젠가 진실로 쓸모가 없어질 터.
정해진 운명은 사라지고, 새로운 시대가 열리게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 하나만은 확실하다.
"제우스 님, 부디 자비를 베푸시어."
프로메테우스는 두 손을 꼭 모아 기도했다.
"...제 여동생을 타르타로스에 처박지 말고 강간하여 주시옵소서."
프로메테우스가 읽은 운명은 오직 제우스의 승리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