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우스 엑스 마키나-64화 (64/235)

EP.64 신화의 종말 (2)

크로노스의 습격으로 인해 크레타 섬을 떠나온 날도 어언 10년.

올림포스는 어느덧 어엿한 하나의 거대한 시설이 되었다.

어떤 느낌이냐하면, N튜브 광고에서 무수히 많은 좀비들을 피해 지하에 쉘터를 만들어 놓은 느낌.

산의 능선에는 적과 대적할 수 있는 방어시설을.

산의 중턱부터는 웅장하고 위대한 분위기를 낼 수 있는 자연환경을.

그리고 산의 정상에는 훗날 올림포스 12신이 모두 위엄을 떨칠 수 있는 초 거대 신전을.

겉으로 보는 것 만으로도 올림포스는 웅장한 모습을 갖추고 있으나, 올림포스 산의 정상-중앙 신전으로부터 지하로 뻗어내려가는 거대한 원통형 계단이 하나 있다.

나선형으로 빙글빙글 돌아가는 계단을 통해 내려가면 거기서 이제 본격적인 '주거구역'이 펼쳐진다.

비록 바깥에서 빛은 받을 수 없지만, 나의 현대적 지식과 메티스의 지혜가 하나로 합쳐져 올림포스 지하에는 수많은 여신들이 기거할 수 있는 지하실이 마련되었다.

이른바, 올림포스 호텔.

총지배인은 나다.

초기에는 내가 크레타 섬에서 지낼 때와 마찬가지로 상당히 빈약했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제는 어엿한 스위트룸을 방불케하는 구조로 만들어냈다.

심지어 내가 가장 신경 쓴 곳은 한 곳 한 곳이 일반 가정집에 준할 정도.

당연히 내 가족과 아내들, 그리고 내 '딸들'이 기거하는 곳이다.

그렇다.

지난 10년.

나는 아이들의 아버지가 되었다.

다만 한 가지 여기서 분명히 말하고 넘어가야할 것이 있다면, 놀랍다면 놀랍게도 아이의 어머니는 단 한 명이었다.

"제우스 님, 실례합니다."

마침 당사자가 내가 옥좌에서 쉬고 있는 와중에 나를 찾아왔다.

테미스.

내게 있어서 이모인 그녀는 안경을 낀 채 거대한 책을 들고 내 앞에 섰다.

"제우스 님께서 다스리실 올림포스의 율법 초안이 나왔습니다. 한 번 검토해주시지요."

"그래. 거기에 올려다오. ...그래서 테미스, 지금은 좀 괜찮나?"

"네. 제우스 님이 걱정해주신 덕분에, 이제는 산후조리도 일주일이면 금방 한답니다."

"그래도 세 쌍둥이를 낳았지 않느냐."

"괜찮습니다. 레아가 옆에서 도와준 걸요. 후후, 잠깐 사담을 하자면...서방님?"

테미스는 안경을 치켜올리며 베시시 웃었다.

"레아는 다섯 명을 낳았지만, 저는 여섯 명을 낳았죠. 레아가 삐쳤으니까 조만간 달래주셔요."

"...너는 세 쌍둥이를 두 번 낳았지만, 레아는 다섯 쌍둥이를 연달아서 낳았지. 비교하지마라."

테미스는 은근히 자신의 출산 횟수를 과시했다.

다른 여인들과 달리 테미스 이전에 나의 아이를 낳은 여인은 레아가 유일하니, 테미스는 레아와 자신을 비교하며 내 아이를 낳은 것에 몹시 자부심을 느꼈다.

그렇다.

올림포스에서 나는 10년 넘게 섹스를 했지만, 내 아이를 낳은 여자는 테미스가 유일하다.

'아테나나 헤르메스, 아레스 같은 자식들은 언제 태어나는 거지?'

분명 내 기억 상으로는 올림포스 12신에 그들이 분명히 있었다.

장성한 이들에게 각각 자리를 만들어줬고, 그러려면 최소한 지금쯤 태어나야했다.

나도 노력하고 있다.

특히 내 아이를 낳는 것으로 확실한 헤라를 상대로는 매일같이 싸고 싸고 또 싸고 있다.

헤라는 나의 아이를 가지기 위해 온갖 노력을 하고 있으며, 헤라 뿐만 아니라 데메테르나 넵튠을 비롯한 모두가 열심히 나의 정을 받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뭔가 세계의 법칙이라도 걸린 듯, 임신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오직 테미스만이 나의 아이를 임신할 수 있었다.

에우노미아, 디케, 에이레네.

이 세 아이는 테미스가 온 뒤에 바로 임신한 세 쌍둥이로, 나는 메티스와 논의를 하여 이들을 '계절의 여신'이라고 명명했다.

어머니인 테미스가 딸들에게 맡긴 역할은 각각 질서와 정의, 평화.

테미스는 그것을 모두 아우르는 '율법'의 수호자로서 올림포스를 위해 헌신할 것이다.

그리고 세 자매 뒤로, 테미스는 올해 세 쌍둥이를 새로이 낳았다.

우리는 이들에 대해 '모이라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과연 이들이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을 지는 알 수 없으나, 티탄의 핏줄인 만큼 어떤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태어날 것이다.

"그래도 고생했다. 갑작스러운 임신이었을텐데, 이번에도 셋 다 예쁘게 잘 낳아줘서."

"그러게요. 10년 동안 섹스를 안 한 것도 아닌데...갑자기 10년 만에 아이를 낳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어요. 다른 모두가 아이를 낳지 못하는데."

"그거, 잘못 들으면 애들이 기만으로 여긴다?"

"기만할 의도는 없어요. 순수하게 이상해서 그렇지."

테미스는 손을 뺨에 올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우스 님의 씨는 분명 이상이 없고, 다른 분들도 이상이 없는데 왜 임신이 안 되는 걸까요? 구체적으로는...왜 저만?"

"그건 나도 이상하게 생각하는 일이다. 하지만 그래도 조심해. 여자의 질투는 정말이지 무섭거든. 여자인 네가 더 잘 알거라고 믿기는 하지만...그래도."

테미스가 낳은 아이들을 제 딸처럼 여기며 기르려는 여자가 나올 지도 모른다.

"딸들의 육아는 어머니에게 맡긴다. 테미스, 너는 지금부터 육아에 전념하라."

"알겠습니다, 제우스 님."

테미스는 허리를 깊숙이 숙이며 물러났다.

나는 홀로 옥좌에 남아 잠시 숨을 돌렸다.

"후우…."

임신.

제우스가 그렇게 난봉꾼이라고 소문난 신인데, 왜 나는 임신이 이렇게 안 되는 걸까?

혹시 내가 제우스의 몸을 차지했기 때문에?

하지만 테미스는 무려 여섯 명이나 낳았는데?

이유를 모르겠다.

차라리 아예 임신이 안 되는 거면 나의 정자가 문제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으나, 테미스는 엄연히 나의 씨로 아이를 낳았다.

외도의 가능성?

없다.

과학적인 유전자 검사는 불가능해도 우리에게는 티탄 신의 힘이 있다.

-오빠 자식 맞아.

헤라가 그걸 판별해냈다.

훗날 가정의 수호신이 될 헤라는 '친자감별의 힘'을 가지고 있었다.

덕분에 그녀는 한 때 테미스를 향해 불거진 '불륜' 의혹을 멋지게 해결했다.

그리고 직접 테미스를 향해 외도 불륜이라고 음해한 이들을 붙잡아 타르타로스에 처박아버리기도 했다.

그녀가 화를 낸 것은 자신이 임신이 안 되는 것도 있지만, 사람들이 제우스에 대해 '의혹'을 보내는 것에 대한 엄중한 경고이기도 했다.

-제우스, 섹스는 잘하는데 임신은 안 된다더라.

그리스에서 번식은 생각보다 더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강한 씨를 가진 존재가 여럿에게 씨를 뿌리는 것은 흠결이 아닌 미덕으로 평가받는 세상이었다.

...원본 제우스는 다소 과할 정도로 이 여자 저 여자 다 찌르고 다녔지만, 나는 아니다.

'더 섹스하고 다녀야하는 건가?'

정말 모르겠다.

확정 임신의 조건이라도 알면 마구 정자를 뿌리고 다니면 되는데, 도무지 조건을 알 수 없다.

육아에 대한 고민?

티탄은 불과 1년만에 금방 자라더라.

내 여동생들이 그랬듯, 육아는 아주 잠깐일 뿐이었다.

인간의 아이가 성인이 될 때까지 20년이 걸리지만, 티탄은 그보다 훨씬 빠른 시간에 성인이 된다.

그래서 호라이 세 자매는 태어난 햇수로 따지면 10살이지만, 이미 어엿한 올림포스의 여신으로서 활동하며 맡은 바 소임을 다하고 있다.

모이라이 들도 마찬가지.

과연 이들이 어떤 일을 할 것인가.

나는 그들의 능력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는 존재를 불렀다.

"프로메테우스."

"예, 제우스 님."

10년 사이 겉으로 조금 더 늙은 남자.

하지만 여전히 머리는 동굴 속에서도 태양처럼 환하게 빛나는 남자.

"그대는 나의 자식들이 무수히 많을 것이라고 예언을 했지. 이곳 올림포스에 모인 여신들보다 더 많은 자식들이 태어날 거라고."

"마, 맞습니다."

"하지만 이상하리만큼 나의 자식들은 나오지 않았다. 테미스가 임신한 이유에 대해서도 파악하지 못했지. 하물며 그대의 여동생, 에피메테우스마저도."

"그, 그렇습니다…."

프로메테우스는 벌벌 떨었다.

그게 마치 예전에 크로노스가 그를 홀대하던 때의 모습인 것 같아, 나는 스스로 굳게 마음을 다잡았다.

"미래는 언젠가 다가오게 되어있는 법. 너무 신경쓰지마라. 10년이 비록 짧은 시간은 아니지만, 의외로 금방 지나가는 시간이니."

"아...제우스 님…!"

프로메테우스는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저를 끝까지 믿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애초에 의심조차 하지 않았다."

프로메테우스에 대한 믿음보다 나의 배경 지식에 대한 믿음이 더 강하니까.

그냥 무슨 제약이 있어서 낳지 못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었다.

가령, 크로노스를 쓰러뜨려야만 수많은 여신들을 임신시킬 수 있다거나.

"그렇다면...제 말씀을 곡해하지 말고 들어주십시오."

"아아, 말해라."

"지금부터 사정하시는 건 심혈을 기울이셔야 할 겁니다."

"...응?"

프로메테우스는 나를 향해 능글맞게 웃었다.

"죄송합니다. 생명의 어머니조차 간섭할 수 없는 운명의 끈이 지금까지 제우스 님을 옥죄고 있었습니다. 그 힘은 앞으로 다가올 미래를 세계가 받아들일 수 있게 기다리고 또 기다리게 만들었죠. 하지만 이제는 다릅니다. 운명의 실타래를 엮는 힘은 제우스님으로부터 파생되어, 이제 새로운 생명에 이르렀습니다."

"결론만 얘기해라."

"모이라이 님들의 탄생에 따라, 지금부터 임신 섹스가 가능한 겁니다."

"......그게 뭐야?"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테미스의 세 쌍둥이랑 내 임신이랑 무슨 관계가 있는데?"

"이제 대세가 제우스 님께 진정으로 넘어왔다는 거죠."

"그러니까 그게 무슨 말이냐고."

"간단히 말하자면 세계가 제우스 님의 번식력을 두려워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

이해는 못하겠지만, 뭔가 내가 대단한 것처럼 느껴지니 기분은 좋다.

"제우스 님의 자녀들이 하루가 멀다하고 계속 태어났다면, 세계는 금방 제우스 님의 것이 되었겠죠."

"음, 그래서?"

"세계는 제우스 님의 치세를 받아들일 시간이 필요했던 겁니다. 그게 10년이라는 시간이었죠."

"음."

"그동안 제우스 님은 여러 여신들을 보살피며 '강간마신 제우스'라는 오명을 가지게 되셨지만, 지난 10년의 고행이 드디어 빛을 발할 때가 된 것입니다."

"결론은?"

"지금부터는 진정으로 조심하십시오, 제우스 님."

프로메테우스는 내게 진심어린 조언을 했다.

"10년 동안 임신만을 기다리던 여신들이 제우스 님의 정을 탐하기 위해, 어떤 계획을 꾸미고 있을지 모릅니다."

"......."

프로메테우스가 말하기를.

세계의 제약이 풀리고 내게 얽힌 운명의 힘이 모이라이 세 자매에게 넘어간 지금.

"질내에 사정하시면 100% 임신입니다. 아마도 그 시기는...제가 찾아오기 아마 1시간 전 정도가 되겠지요."

"......어!"

나는 고개를 바로 옆으로 돌렸다.

"메티스, 임신이래."

"......."

프로메테우스가 오기 전.

나는 나의 아내, 메티스와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임, 신?"

벅차오르는 기쁨에 안으려던 것도 잠시.

"내...가?"

어째서인지, 메티스는 자신이 임신이라는 것에 사색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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