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65 신화의 종말 (3)
혼돈 속.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칠흑같은 공간.
별이 부서지고, 어둠만 가득한 가운데, 등 뒤에 하얀 날개를 단 분홍빛 머리칼의 여인은 검을 아래로 내렸다.
"끝이야, 당신."
"......."
검이 가리키고 있는 곳은 칠흑같은 어둠이었다.
하지만 여인이 검에 분홍색의 빛을 불어넣자, 어둠이 걷히고 서서히 한 명의 인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끝이라고? 쯧쯧."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든 것이 검은 청년은 핑크빛 여인, 에로스를 향해 혀를 찼다.
"정말로 끝이라고 생각하나?"
"물론. 10년 동안 고생했어. 운명의 흐름을 막느라."
에로스는 남자의 어깨를 검으로 두드리며 비웃었다.
"사랑으로 싹트는 생명의 순환을 막아버리다니, 사랑의 신으로서 결코 용서할 수 없지. 너 때문에 10년 동안 아기 손실이 얼마나 많았는지 알아? 네가 나를 막지만 않았어도, 지금 제우스의 자식들이 올림포스 전부를 뒤덮었어."
"그리고 그들은 크로노스를 타르타로스에 때려박기 위한 전쟁병기로 쓰이겠지."
"글쎄? 그건 네 생각이고. 여자를 그렇게 아끼는 제우스가 자기 자식을 전쟁에 내몰 것 같아?"
"그건 네 생각이지. 티탄 중에 가장 이질적인 티탄이 아닌가? 자기가 박을 아내에 대한 사랑과 자식에 대한 사랑은 다를 수 있는 법."
남자는 묵묵히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의 목에서 피가 하얀 색으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너는 정말로 제우스가 주신이 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하는 것이냐?"
남자는 에로스를 향해 이죽거렸다.
"크로노스가 개인적인 흠결이 있다는 건 안다. 하지만 크로노스의 가정을 제외하면 모두가 행복하고 화목했다. 아무도 그것이 괴롭다는 것을 느끼지 못했고, 아무도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의 생각이 바뀐 건 제우스의 선동이다."
"사랑의 대신인 내가 보기에는 그가 하는 행위는 혁명인 걸? 크로노스가 치세를 펼쳤다는 건 인정해. 하지만 크로노스의 가족은 피눈물을 흘리기만 했지. 그러니까 이제 새로운 흐름으로 나아가자는 거야."
에로스는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뻗었다.
"사랑! 올림포스에는 사랑이 가득해. 여자에 대한 따스함이 가득하다구."
"그런 게 살아가는데 중요하지 않다."
남자는 에로스를 계속 비웃었다.
"네가 말한 사랑도 결국 육체적 관계에서 오는 추잡한 욕망의 산물일 뿐이다."
"하지만 성관계를 통해서 모든 생명은 태어나는 법인 걸? 너는 그걸 너의 힘으로 여태까지 막았던 거고."
에로스는 눈에 살기를 뿌리며 싱긋 웃었다.
"어때? 에레보스. 손발이 막 부들부들 떨리고 그래?"
"...나는 너를 이해할 수 없다."
흑발 청년, 에레보스는 자신의 가슴에 손을 올렸다.
온통 검은 와중에 가슴 부분만 마치 찢겨져나간 듯 텅 비어있었다.
"크로노스의 치세는 훗날 황금의 시대라고 불릴 것이다. 모두가 그렇게 얘기하겠지. 제우스의 시대를 살며, 그래도 크로노스가 옥좌에 앉았을 때가 더 좋았을 것이라며 모두가 그리워할 것이다. 그래도 그 때가 좋았다! 라고."
"인정해. 이전보다 훨씬 더 욕망이 그득한 세상이 되겠지. 올림포스의 신들에게는 아주 평온하고 행복한 나날이지만, 지상의 생명들에게는 끔직한 고통이 가득할 거야."
에로스는 두 팔을 벌리며 활짝 웃었다.
"하지만 그런 고통 속에서도 빛나는 것이 사랑 아니겠어?"
"...정말, 이해할 수 없군."
에레보스는 에로스를 향해 엄지를 내렸다.
"언젠가, 네가 그 잘난 사랑 때문에 크게 다치는 일이 있을 것이다. 누구보다도 사랑 때문에 괴로워하고, 누구보다도 사랑에 고통받으며 시름시름 앓겠지."
"흥, 나는 사랑의 신이야. 너와 마찬가지로 '대신'이라고. 그런 내가 다른 누군가와 사랑에 빠질 것 같아?"
"그건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에레보스는 천천히 어둠 속에 동화되기 시작했다.
그의 전신은 가루가 되어 흩어지지 시작했고, 얼굴만 흐릿하게 남았다.
"고통이 있기에 사랑의 기쁨을 안다고? 흥, 그런 것 따위.... 애초에 처음부터 모르고 살았다면 좋았을 것을."
사아악.
에레보스는 사라졌다.
어둠 속에서 혼자 남은 에로스는 검을 검집에 집어넣으며 안도했다.
"...휴, 이제 낳게 할 수 있겠네."
에로스.
그녀는 바로 지상으로 내려가, 올림포스에 자신의 축복을 마구 뿌렸다.
* * *
10년간 나는 많은 여신들의 구원자가 되었다.
그리고 동시에 나는 수많은 가정의 파괴범이 되었다.
무슨 말이냐.
간단히 얘기하여, 가정폭력을 일삼고 여자의 기분을 생각하지 않는 남자로부터 질린 여신들이 하나 둘 우리의 편에 서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들 중 약 3할 가량이 나와 진짜로 섹스를 했다.
스틱스처럼 처음부터 내게 투항하기 위해 온 사람도 있었고,
크로노스조차 쉽게 건드리지 못하는 내게 몸을 의탁하러왔다가 자지에 반해 다리를 벌리는 이도 있었고,
도대체 내 자지가 얼마나 대단하길래 그렇게 모두가 자지를 달라고 아우성을 치나 호기심에 엉덩이를 들이미는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이들 모두 내 자지에 흠뻑 매료되었다.
거지같은 남편을 피해 올림포스로 도망친 여신들 중 일부는 자신이 강간당한 것처럼 꾸민 것에 미안하다면서 진짜로 강간 한 번 해달라고 하기도 했으니, 나의 자지는 분명히 매력적이었다.
어쩌면 그들은 내가 '임신시키지 않는 안전한 자지'라는 것에 부담이 없었을 지도 모른다.
책임없는 쾌락.
- 임신하지 않고 이런 쾌락을 느낄 수 있다니, 최고예요오오오오오!!
아직 크로노스와 결착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행여나 제우스의 아이가 생기면 심적 부담감이 커질 수밖에 없다.
-오빠...오늘도 실패인 것 같아.
-왜 저희는 안 되는 걸까요?
하지만 제우스가 아무리 수많은 여자들의 안에 질싸를 해도 임신이 되지 않으니, 당장 내 근처에서 임신을 바라는 여인들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여인들이 나와의 섹스를 반겼을 것이다.
지금까지 했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테크닉을 보여줬으니까.
하지만 그것도 이제 안녕이다.
나는, 드디어, 나의 진정한 힘을 발휘할 수 있다!!
진심교배프레스, 간다아아아아아!!
라고 하려고 했는데.
"메티스?"
메티스는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내가 다른 여자를 범할 때에도 오히려 내 옆에서 코칭을 하던 그녀가 갑자기 눈물을 흘리는 것에 나는 당황스러웠다.
"어...임신하기가 싫었어? 그런 거였어? 아니면 갑자기 임신하는 게...."
"제우스 님."
님.
메티스는 제대로 당황한 듯, 나를 거리감 있는 호칭으로 불렀다.
"저, 저 잠깐...잠깐 혼자만의 시간을 가져도 좋을까요...?"
혼란스러울 것이다.
프로메테우스가 한 말로 나도 혼란스러운데, 메티스라고 오죽하겠는가.
다만.
"아니."
지금 혼자보내면 안 된다.
나는 메티스의 손목을 잡아당겼다.
"너, 지금 이상한 생각하고 있잖아."
"윽...!"
"표정이 심상찮아. 기쁨이라고는 전혀 없어. 아니, 기뻐하지만 그 이상으로 걱정과 근심이 가득해. 말 해. 무슨 문제가 있지? 임신...했을텐데?"
임신(2시간).
나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다.
헤라가 친자감별의 힘을 가지고 있다면, 나는 내 씨가 이 여자의 안에 어떻게 들어갔는지 왠지 모르게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지금 메티스의 뱃속에서는 정자와 난자가 랑데뷰를 하여 교미섹스를 하고 있으리라.
그런데 정작 메티스는 임신을 원하지 않았다.
나는 이 표정을 안다.
노콘 질싸를 했는데 임신했다고 고백했던 여자의 얼굴과 비슷하다.
물론 내 아이가 아닌 것으로 판명이 났지만, 원치 않는 아이를 임신한 여자 특유의 표정은 내가 정확히 알고 있다.
그리고 그녀의 마지막도.
"말해."
"...말하면 화내실 거잖아요."
"말하지 않는 게 더 화가 나. 나는 네 남편이야. 오빠 못 믿어?"
나는 마법의 언어를 쓰며 메티스를 당겼다.
메티스는 나를 한참이나 내려다보다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내게 얼굴을 묻었다.
"옛날에...가이아 여신께서 예언을 내린 적이 있어요. 이 여자가 아들을 낳으면 무조건 아버지보다 더 위대한 존재가 될 것이라는 예언이었죠."
"음음."
그건 지난 번에 익히 들어서 알고 있다.
그리고 그에 대해서도 이미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그러니까 그 예언의 대상이 너라는 거야?"
"네...."
"이게."
나는 메티스의 볼을 잡고 양쪽으로 당겼다.
"그런 거라면 얼마든지 환영이라고 했지? 내 자식이 나보다 더 대단한 남자로 태어난다는데 뭐 어때. 만약 내 자식이 나같은 패륜을 저지른다면 그 때는 전력으로 상대해야겠지만...우라노스나 크로노스 같은 상황이 될 수도 있지만."
나는 메티스의 등을 끌어안으며 토닥였다.
"그 때는 그 때의 일이고. 안 그래?"
"...저는 무서워요."
메티스는 내 가슴에 얼굴을 묻고 계속 흐느끼기 시작했다.
"저는 많은 어머니들의 모습을 봤어요. 사랑하는 남편보다 더 사랑하는 존재가 생기고, 남편보다 자식을 더 애지중지하는 모습을. 만약 제가 그렇게 되면...어떻게 하죠?"
"자식을 사랑하는 건 부모의 기본이지."
이미 내가 여섯 여아의 부모이기에 잘 알고 있다.
"걱정마라, 메티스. 나는 네가 낳아줄 내 아이를 진심으로 기다리고 있으니."
쪽.
나는 메티스의 허리를 들어올리며, 그녀의 하복부에 키스를 했다.
"나의 아이를 낳아줘서 고마워, 여보."
"아아...."
메티스의 눈물이 위에서 흘러내린다.
나는 천천히 그녀를 다시 내리며 시선을 맞췄다.
"그런데...임신 중간 부터는 아이를 생각해서 섹스하면 안 된단 말이야? 그러니까...."
"...당신은, 정말. 그렇게 섹스를 하고 싶어요?"
"응."
나 제우스.
어쩌면 섹스하기 위해 태어난 신일지도 모른다.
"내일이면 그 날이잖아. 그러니까...너랑 지내고 싶어."
"......한 명 더 생겨도 저는 몰라요."
메티스는 내 위에 몸을 겹쳤다.
* * *
펄럭.
군기가 하늘 높이 치솟았다.
올림포스 산 정상에서 군기를 높이 치켜든 이는 다름아닌 나, 제우스.
"지금부터 오르튀스로 진격한다."
최후의 일전.
티타노마키아를 우리의 승리로 마무리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