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80 정실결전 (5) 타이틀 표지 히로인이 정실인 건 국룰
헤라가 제우스의 뺨을 때렸다는 이야기는 올림포스 전역으로 퍼졌다.
그리고 이 소식을 들은 이들은 헤라의 강단에 놀라기도 하고, 헤라의 결단에 감탄하기도 하고, 헤라의 만용에 분노하기도 했다.
아아, 여자의 적은 여자라고 했던가.
헤라의 과격한 행동에 대해 여신들은 바로 본색을 드러냈다.
"어떻게 제우스 님의 뺨을 후려칠 수 있죠?!"
"이건 결코 용납할 수 없어요!"
"헤라는 정실결전에서 물러나야 합니다! 스스로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해요!"
여신들은 입을 모아 여론을 형성했다.
하지만 그들의 여론은 한 줌 재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지만 제우스 님, 그 뒤로 헤라한테 완전히 빠진 것 같던데?"
제우스는 헤라의 뒤를 졸졸 쫓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리고 여신들은 충격에 빠졌다.
그가 한 여자의 마음을 얻기 위해 보인 행적은 여신들의 상식을 무너뜨리기에는 너무나도 충분했다.
기존 티탄 남신들의 구애는 어떠한 형태였던가?
(지문) 쾅! 문이 열린다.
여신 : (놀란 목소리로) 어맛, 무슨 일이세요?
남신, 여신의 뺨을 다짜고자 때리고 머리를 거칠게 움켜쥔다.
남신 : (자신만만한 얼굴로) 너는 오늘부터 내 아내다. 다리 벌려.
끝.
연애?
그런 건 없다.
티탄 남신이 여신을 강제로 붙잡고 아이를 낳게 만들면대부분 결혼하고 그랬다.
부모님이 강력한 티탄이라면 여신들도 나름의 선택권은 있었지만, 그 선택도 부모가 정한 남자 중에서 고르거나 스스로 독신으로 살겠다는 수준이었다.
그러던 와중에 제우스가 헤라를 상대로 보인 모습은 충격적이었다.
"데메테르, 이 꽃은 어디서 가져온 거지?"
"찾아드릴게요, 제우스 님."
"아니다, 내가 직접 가서 담아오겠다."
제우스는 꽃이 가장 아름답게 피어오르는 곳으로 가서 직접 꽃을 꺾었다.
그리고 그것을 하나의 다발로 만들어, 꽃다발을 들고 헤라의 방문 앞에 찾아갔다.
똑똑.
제우스는 방문을 손등으로 두드렸다.
'아아, 이것은 노크라는 것이다'와 같은 모습에 여신들 중 일부, 특히 이전에 남편이 있었던 여신들은 남편의 모습과 제우스의 모습을 비교할 수밖에 없었다.
예고도 없이 갑자기 문이 열리는 것은 기본.
심지어 문이 없거나, 개인의 방도 없는 경우가 허다했다.
끼이익.
"누구세요...?"
문이 열리자, 헤라는 제우스를 보며 흠칫 놀랐다.
그리고 이어지는 제우스의 행동에 모두가 놀랐다.
"사-랑--해요--"
제우스는 노래를 부르며 사랑을 속삭였다.
그리고 헤라에게 꽃다발을 건넸다.
"이, 이...."
헤라는 얼굴을 붉히며 인상을 찡그렸다.
그 모습이 너무나도 억울해서 울 것 같은 표정이라, 뒤에서 구경하던 여신들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쾅!
헤라는 문을 거칠게 닫아버렸다.
제우스는 한참 동안 멍하니 문앞에서 서있었고, 꽃다발을 문앞에 놓은 다음 다시 손등으로 문을 두드렸다.
똑, 또독 똑똑 똑
"나랑 아기 만들래?"
와장창!
"그래, 안녕...."
제우스는 힘없이 자리를 떠났다.
* * *
이 모든 것은 연기다.
헤라가 튕기면 튕길수록 나는 더 헤라에게 집착했다.
-어찌 합니까, 어떠케에 할까효오오오
리라를 배워 적당히 기타 치는 느낌으로 사랑을 고백하고.
-싸랑한다, 헤라----!!
올림포스 전역이 떠나갈 정도로 헤라를 향해 사랑을 고백하고.
-헤라랑 할 때까지 당분간 섹스하지 않겠다.
헤라에 대한 광적인 집착을 보이며, 나는 대외적으로 헤라에게 내가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강력하게 어필했다.
그리고 유탄은 이상한 곳에 튀었다.
"헤라한테만 너무 특별하게 대해주는 거 아니니?"
어머니 레아.
그녀가 나를 찾아왔다.
뒤에는 헤라를 제외한 다른 여동생들을 대동한 채, 나를 압박했다.
"어머니, 아시잖습니까. 이건 다 연기입니다. 헤라를 올림포스 최고의 여신으로 만들기 위한 연기요."
"알아. 아니까 이런 얘기를 하는 거야. 나는 네 어머니이기도 하지만, 헤라의 어머니이기도 하니까. 헤라, 이러다가 역효과가 날 수 있어."
레아의 말대로다.
헤라가 계속 튕기고 내가 헤라에게 집착을 보일 경우, 다른 여신들이 헤라를 질투하게 되는 불상사가 생기고 만다.
뭐든지 적당히 해야할 필요가 있다.
밀당은 적당히 밀고 제 때 당겨야 하는 법이지, 무작정 밀면 그대로 고꾸라지는 법.
헤라를 향한 분노가 가득 차오르는 이 시점.
모두가 몸이 달아오르려고 하는 이 시점.
그리고 보다 못한 레아가 나선 바로 지금이 때다.
"압니다. 레아의 걱정이 뭔지 잘 압니다. 분명 이대로 계속 가면 헤라에 대한 불만이 더욱 솟구치겠죠."
"그리고 동시에 너를 업신여기는 여신들이 나올 지도 몰라. 자기가 헤라 정도 되는 줄 알고, 너를 상대로 함부로 하는 여신들이."
"압니다. 그러니 지금, 헤라와의 연기를 끝낼 때가 되었습니다. 넷 모두, 그리고 레아 어머니. 도와주시겠습니까?"
"도와달라니. 어떻게?"
"레아가 헤라의 대역을 해주십시오. 그리고 다른 넷은 이렇게 해다오."
나는 다섯 가족에게 나의 계획을 알렸다.
"...좋구나. 엄청. 음, 정말...좋아."
"오빠, 한 번으로는 부족하지 않을까요?"
"맞습니다. 오라버니. 각자 한 번씩 연습하면서, 그, 느낌을 공유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안 하면 안 도와줄 거예요?"
"오빠는 정말 여자를 너무 잘 알아요...."
"훗."
K-로맨스 드라마로 집대성 된 나의 고백에 이길 수 있을 것인가?
전생.
여자들을 꼬시려고, 그리고 여자친구가 좋아해서 여자들이 좋아하는 드라마만 골라본 덕분에 나는 수많은 드라마 속 로맨틱한 장면들을 머릿속에 담고 있다.
"원래 고백은 오글거릴수록 성공률이 높아지는 법이지."
이유는 단 하나.
"잘생기면 다 되는 법이야."
제우스의 얼굴에 진심으로 감사를.
* * *
그리고.
화륵.
헤라의 좌우로 불이 붙었다.
땅에서 솟아난 작은 화로 속에는 조막만한 불씨가 타오르며 주변을 밝혔다.
그리고 헤라의 앞에 화로가 양 옆으로 계속 길을 밝히기 시작했다.
헤라는 그걸 따라 앞으로 걸었고, 헤라의 뒤로 모인 여신들도 헤라가 걷는 길을 몇 걸음 떨어진 채 뒤따라 갔다.
화륵, 화륵.
헤라의 발걸음 속도에 맞춰 길은 밝아졌다.
어느새 길 사이에는 아름다운 꽃들이 가득했고, 헤라는 맨발로 꽃들이 상하지 않도록 조심스레 걸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동굴 길을 나온 곳은 넓은 들판이었다.
푸른 초목이 우거진 가운데, 화로는 초원의 한복판에서 좌우로 벌어졌다.
그리고 그곳에는 흰색 옷을 입은 금발의 남자가 서있었다.
그리스 티탄 신들이 입는 것과 다른, 몸에 위아래가 각각 나뉘어진 흰색 옷에 모두가 침을 꿀꺽 삼켰다.
"아...."
헤라 또한 마찬가지.
헤라는 마치 꽃향기에 홀린 나비처럼, 자신을 향해 꽃 한 송이를 든 채 기다리고 있는 남자-제우스에게로 걸어갔다.
사라락.
등불이 전부 밝아졌다.
그 모양은 제우스와 헤라를 중심으로, 마치 ♡모양을 그리고 있었다.
"헤라."
제우스는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그러자 화로의 옆으로 하얀 안개가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시작했고, 그 위로 투명한 물방울들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물방울들의 모양 또한 ♡모양을 그리고 있었다.
"와줘서 고마워."
제우스는 상체를 숙이며 헤라의 왼손을 살포시 자신을 향해 잡아당겼다.
쪽.
그리고는 헤라의 왼손 네번째 손가락 위에 입술을 맞춘 뒤-
"히익...!"
한 쪽 무릎을 꿇었다!
헤라는 갑작스러운 제우스의 행동에 굳어버렸고, 그건 지켜보는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헤라."
제우스는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의 손에는 아주 작은 함이 올려져있었고, 제우스는 달칵하는 소리와 함께 함을 열어젖혔다.
"나와 결혼해주겠어?"
함 안에는 반지가 있었다.
은색의 링에 헤라의 머리색을 닮은 듯한 붉은 보석이 박힌 반지였다.
"허락해준다면, 왼손을 뻗어줘."
"........"
헤라는 왼손을 앞으로 뻗었다.
제우스는 함에서 정말 조심스레 반지를 꺼내, 헤라의 네번째 손가락에 반지를 끼웠다.
마치 처음부터 헤라의 손가락에 맞춰 제작된 것처럼 반지는 딱 맞았다.
제우스는 조용히 무릎을 꿇고 일어나 헤라의 두 손을 맞잡았다.
"앞으로 영원히 행복하게 해줄게."
"정말...."
헤라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저를...아내로 맞이하려고 하시는 건가요?"
"물론. 내 마지막...아내가 되어주겠어?"
마지막 아내.
사실상 헤라 이후로 아내를 들이지 않겠다는 말.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말이라는 건 아무 효력이 없다.
그래서 여신들은 아무리 제우스가 달콤한 말을 해도 믿지 않았다.
구두약속 따위, 얼마든지 무시할 수 있는 무소불위의 권력자니까.
그렇게 모두가 생각했다.
"앞으로 나는 너를 평생 사랑할 거야."
하지만 물렀다.
여신들은 제우스를 몰라도 너무 몰랐다.
"스틱스 강에 맹세할게."
어, 나?
내 이름이 갑자기 왜 나와?
구경하고 있던 스틱스 조차 경악하며, 자신이 들은 게 맞나 어안이 벙벙한 상황.
제우스는 헤라에게 영원의 사랑을 속삭였다.
그리고 만약 헤라를 사랑하지 않게 된다면, 그 때는 제우스가 스틱스 강의 맹약을 어긴 형벌을 받게 되리라.
주신 스스로 자신의 권위를 무너뜨리는, 아주 치명적인 행위.
"비겁...해요."
제우스는 스스로에게 족쇄를 걸면서까지 헤라에게 사랑한다고 말했다.
"이렇게까지 말해주는데...어떻게 거부할 수 있겠어요."
헤라는 눈물을 손등으로 닦았다.
크로노스를 물리쳤을 때보다 진심으로 기뻐하며, 그녀는 제우스에게 안겼다.
"저도 사랑해요, ...오빠."
헤라는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사랑을 속삭였다.
"흐."
제우스는 헤라를 번쩍 들어올렸다.
그리고는 주변에 과시를 하듯 몸을 한 바퀴 돌리며 헤라를 빙글 돌렸다.
"그럼 아이 만들러 가자!"
"에? 아, 아이는 이미 뱃속에...."
"낳고 또 낳으면 되지!"
"아...!"
제우스의 환한 미소에 여신들은 입술을 깨물었다.
뱃속에 이미 제우스의 아이가 있건만, 헤라는 벌써 제우스로부터 다음 자식을 낳기로 구두 약속을 받았다.
"아, 오, 오빠...."
헤라는 제우스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지, 지금 배가...."
"...어?"
주르륵.
헤라는 다리 아래로 투명한 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그 물빛은 마치 은하수 와도 같아....
수 시간 뒤.
응애.
헤라에게서 처음으로 태어난 아이는 너무나도 귀엽고 사랑스러운....
응애.
여자아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