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83 강간마 제우스 (3)
범인이 누군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범인의 행동을 내가 저지른 것으로 위장했다.
이른바, '내가 강간범이다' 작전.
상대가 과연 어떻게 나올 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인간이라고 해도 '강간'이라는 행위 자체로 고발이 들어온 이상, 칼리스토가 여러 여신들의 지지를 받는 이상 조사는 이루어져야 한다.
"음…."
심정적으로 생각하면 칼리스토의 편을 들어 티탄 신을 엄벌에 처하는 것이 옳다.
하지만 티탄 신과 인간 사이에는 현대에서의 인간과 반려동물 사이의 관계처럼 큰 차이가 있다.
인간이 암컷인 동물에게 박는다고 해서 그 사람을 잡아가던가?
'그랬던 것 같은데?'
뭔가 동물을 상대로 저지른 자에 대해 엄청난 죄는 아니더라도 법적으로 구속하거나 죄를 물었던 것 같다.
인간이 어떻게 짐승과 할 수 있냐.
그런 생각을 해본다면...내가 티탄 신을 엄벌하는 것이 잘못된 일이 아니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테미스. 그리고 아테나."
"제우스 님의 판단이 백번 옳습니다."
"설령 인간이 강간당했다고 해서, 인간이 티탄보다 못한 존재이기에 티탄을 용서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성별을 떠나서, 티탄의 권위를 위해서라도."
테미스와 아테나는 서로 공통된 의견을 내어놓았다.
같은 여자라서가 아니다.
티탄이 인간과 통정했다는 것 자체가 문제가 되는 셈이다.
"티탄은 최소한 티탄과 정을 나눠야 합니다. 못해도 티탄의 피를 이어받은 님프라면 모를까, 인간은 대화가 가능한 하등생물일 뿐입니다."
테미스의 의견이다.
이게 일반적인 티탄 신들, 그러니까 내 윗 세대의 평균적인 시각이다.
많이 다르죠?
아테나가 그렇게 내게 눈으로 말하는 듯 했다.
상대적으로 '꼰대' 기질이 있는 테미스의 성향을 생각하면, 그녀가 가진 인식이 티탄 신들의 보편적인 인식이라는 건 부정할 수 없다.
그러므로 더욱 생각을 잘 해야한다.
인간의 관점이 아니라, 티탄의 관점으로 생각해야한다.
"티탄과 그런 차이가 나는 하등...한 존재를 범했다는 것 자체가 티탄의 권위를 떨어뜨리는 짓이다. 테미스, 혹시 이전에 이런 일이 있었나?"
"아뇨, 없습니다."
"그렇겠지. 지금까지 강간당한 인간들은 모두 죽었으니."
칼리스토가 살아난 건 가히 기적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지금까지 인간들이 강간당한 적이 없는 게 아니다.
모두 살해당했다.
티탄 신들은 인간을 범하고 마치 한 번 쓰고 난 콘돔처럼 '폐기'했다.
대외적으로 가장 많이 인간을 범한 존재는 크로노스이나, 실제로는 티탄 남자신들 중 티탄 여신과 하지 못해서 님프나 인간을 범하는 일이 제법 있을 것이다.
그러니 더더욱 범인을 잡아야 한다.
앞으로 인간들이 피해를 입지 않도록.
인간과 하는 것을 엄격히 지도하고, 인간을 범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하고 싶으면 인간의 마음을 얻도록 해야할 것이다.
어떠한 상황에서든 '강간'은 안된다고 엄포를 놓을 필요가 있다.
칼리스토를 범한 티탄은 이에 대해 좋은 본보기가 될 것이다.
나?
'내가 하는 강간은 로맨스지.'
내로남강.
만약 꼽다고 투덜대는 신이 있다면 앞에 나와서 내게 이야기를 하면 될 것이다.
오직 제우스만이 여자를 강간할 수 있다.
실제로 내가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강제로 범하는 것을 제우스의 권위와 권력으로 억누르겠다는 의미다.
누군가를 강제로 간음하는 것은 곧 제우스의 권위에 도전하는 행위.
그렇다면 나는 타인을 범하는 자에게 람쥐썬더를 즉시 집어던져 엄벌에 처할 것이다.
재판?
감히 제우스의 권위에 도전했다는 것 만으로 충분한 사형감이다.
"...후우. 테미스, 아테나. 강간범을 색출하는 일은 너희에게 맡기마. 나는 좀 더 다른 걸 생각해봐야겠어."
"다른 것이요?"
"그래. 테미스, 너는 잘 모르겠지만...나는 인간이 앞으로 미래를 이끌어나갈 존재라고 생각한다."
"인간이요?"
"그래."
언젠가 신화의 시대가 종막을 내리고, 더이상 인간이 신을 찾지 않는 시대가 오리라.
원자폭탄이 터지고 지구가 온난화에 이르면서 온갖 전쟁이 터지는 재앙의 시대가 열리겠지만, 그래도 나는 올림포스와 그리스의 지배자로서 세계를 인간의 시대로 열 책무가 있다.
전직 인간이기 때문이 아니라….
'올림포스의 권위를 위해서.'
신이라는 존재는 역설적으로 자신들을 떠받들어주는 존재가 있어야 비로소 성립하는 법이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신'이라 함은, 기존의 티탄들과는 확연히 다른 존재들을 지칭하게 될 것이다.
어떻게?
'올림포스 12신에 대하여, 인간들이 신앙을 바치게 한다.'
나는 종교의 힘을 알고 있다.
인간이 종교에 심취하면 때로는 법과 윤리를 모두 무시하고 종교에만 몰두하는 것을 숱하게 봐왔다.
그러므로 나는 종교의 힘을 이용해 나를, 나의 가족을, 나의 자식들을 인간들에게 추앙받는 존재로 만들 것이다.
"세상에는 수많은 생물이 있지. 하지만 그중에서 가장 티탄과 닮은 존재는 인간이다. 물론 그들은 뭔가가 상당히 결여되어 있고 많이 부족한 존재이나…인간은 다른 동물들과 달리 '배움'에 대한 의지가 있다."
아테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크레타 섬에서 인간들을 보호하는 마을을 만든 것도 인간들이 지혜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누군가 가르쳐주면 그걸 습득하고 응용하여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는 동시에, 자신들의 기술로서 더욱 발전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생명체.
"나는 그들에게 많은 지식을 전파할 것이다. 그리고 인간들은 자신들을 베풀어 준 신들에게 경배하게 되겠지."
"음...그러면 불공평하지 않겠습니까?"
"응?"
"다른 동물들이 반감을 가질 겁니다."
"......."
정말 다르죠.
아테나가 뜨뜻 미지근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아테나는 내가 인간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잘 알고 있다.
아마 그리스에서 가장 인간친화적인 티탄을 꼽자면 나와 아테나가 될 것이다.
하지만 누구보다도 가장 공정하고 공평한 관점에서 바라보는 테미스의 시각이 이러하듯, 테미스는 인간을 사자나 소 같은 짐승과 크게 다를 바가 없는 동물의 하나로 보고 있다.
"인간이 제우스 님의 승전에 도움을 줬다면 그에 대한 공로상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니 만약 인간에게 지식을 내려주시려고 한다면, 다른 동물들에게도 그에 걸맞는 것을 내려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인간 뿐만 아니라 모든 동물들도 위대하신 제우스 님을 칭송하게 될 테니까요."
"그래요. 만약 인간이 제우스 님의 편애를 받는 걸 동물들이 알게 된다면, 녀석들은 인간을 일부러 사냥할 거예요. 영역을 침입해서 공격하는 게 아니라, 인간이 가진 지식을 빼앗으려고 말이죠."
"음…."
복잡한 문제다.
이는 여전히 인간과 티탄의 괴리감에서 오는 차이이기에, 내가 아직은 쉽게 어떻게 거리를 좁힐 수 없다.
나중에는 인간 한 명에게 여신 셋이 농락당하는 일도 있던데, 거기까지 이르려면 인간이 지금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래, 지금의 티탄 신 중 일부가 보여주는 소위 -좆간-의 모습으로.
'언젠가 좆간이 되더라도 지금은 돌봐줘야지.'
칼리스토처럼 혼자서 올림포스에 올라와 감히 티탄 신을 고발하고 억울함을 성토하는 용기를.
위대한 제우스와 올림포스의 신들을 숭배하고 찬양함으로써 받는 신앙을 통한 정신적 안정감을.
그리고 제우스 신이 직접 정리하여 인간들에게 전파하는 지식을.
그리하여, 나는 인간들의 위상을 지금보다 높게 끌어올릴 것이다.
최소한 님프와 같은 급으로 올린다면 인간에 대한 관점이 조금은 달라지지 않을까?
"테미스, 네 말은 다른 동물들에게도 뭔가를 나눠줘야한다는 거지?"
"네."
"그렇다면 적임자가 있다. 이 일을 아주 신경써서 해줄 그런 존재가."
원전은 써먹으라고 있는 것.
"프로메테우스와 에피메테우스를 불러라."
자세한 건 몰라도 프로메테우스가 인간들을 위해 불을 훔쳐 그걸 나눠준 건 확실하게 기억한다.
딱히 프로메테우스를 이용하려는 건 아니지만….
'아무것도 안하고 있는데 일은 해야지.'
현재.
둘은 마땅찮은 일 없이 놀고 먹는 중이라, 나는 둘에게 모처럼 일을 시키고자 했다.
동물들에게 선물을 하나씩 나눠주는 일을.
* * *
예언가 남매에게 선물 분배 작업을 지시한 뒤.
나는 내 방에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여신들을 안아주는 시간을 가졌다.
"...제우스 님."
금발벽안, 아니 흑발벽안?
남색 기운이 감도는 흑발에 금색 브릿지가 나오는 특이한 머리칼의 여신, 레토는 자신의 배를 쓰다듬으며 내 품에 안겼다.
"저는 불안합니다."
"무엇이?"
"제 아이들을 향한 예언이요."
"예언...그래. 네 자식들이 제우스 다음 가는 권력을 가질 거라는 예언 말이더냐?"
"네. ...제우스 님, 제 자식들은 죄가 없습니다. 부디 제 자식들을 살려주십시오."
"뭐라?"
살려달라니, 누가 내 자식들을 감히 죽인단 말인가?
"저는 그저 제우스 님의 사랑을 받고자 했을 뿐입니다. 제우스 님의 아이를 낳는 것만으로도 기쁘기 그지 없습니다. 그런데 제 자식들이 제우스 님 다음가는 권력을 가지게 된다면...헤라 님이 가만 있지 않을 겁니다…."
"......."
"헤라 님의 자녀가 응당 그 자리를 차지해야 하는 법. 만약 헤라 님이 제 자녀를 질투하게 된다면...저는 저 자신을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부디, 부디 선처해주셔요. 자식과 어딘가 조용한 곳에서 지내겠습니다. 그러니 부디…."
"그래. 안다. 헤라가 얘기해줬다."
"네?"
레토의 표정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헤라는 이미 네 예언에 관한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그 얘기를 해줬지. 아마 레토가 자신에게 직접 이야기는 하지 않을테니 만약 내게 상담을 한다면, 꼭 이런 얘기를 해주라고."
나는 레토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녀를 토닥였다.
"솔직히 질투는 나지만, 사랑하는 제우스 님의 자식이니까."
"...그렇게 말했다고요?"
"그래. 헤라는 네 생각보다 훨씬 포용력있는 여자란다. 네가 생각하는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아, 아아…."
레토는 두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저는 그런 줄도 모르고…!"
"그래, 그래. 오해할 수 있지. 나중에 좋은 선물 하나 주는 걸로 사과하면 되지. 음."
"저는 그것도 모르고 헤라 님을, 흐끅, 오해하고, 흐윽, 으아앙!!"
레토는 내 가슴에 얼굴을 묻고 오열했다.
나는 그녀가 눈물을 흘리다 지쳐 쓰러질 때까지, 그녀의 등을 토닥이고 돌봤다.
"그래, 그래. 누구도 네 자식을 해하지 않는다. 나의 자식이기도 하지 않느냐. 걱정마라."
레토에 관한 문제에 대해서, 헤라가 그렇게 생각을 하지 않은 건 아니다.
그래서 나는 헤라와 이틀동안 계속 섹스했다.
그녀의 보지를 풀어줘서, 레토의 자식들 또한 품게 만들었다.
그러니, 레토가 걱정하는 헤라의 질투는 일어나지 않는다.
이곳은 나의 올림포스니까.
-헤라 님을 감히 오해하고 음해한 어리석은 년을 용서해주세요.
레토가 만삭의 몸으로 올림포스를 떠난 건 사흘 뒤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