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85 강간마 제우스 (5)
저벅, 저벅.
레토는 부풀어오른 배를 부여잡고 정처없이 걸었다.
님프들은 그녀를 보고 안타까워했으나, 감히 그녀를 도울 생각을 하지 못했다.
레토는 그 누구에게도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다.
레토는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았다.
마치 누군가가 자신을 도와주기라도 한다면 그 상대에게 큰 피해가 갈까봐 스스로 두려워했다.
"나를 도우면 헤라 여신의 분노를 살 겁니다."
레토는 그렇게 자신을 향한 도움의 손길을 모두 뿌리쳤다.
이미 오해는 풀렸지만, 그건 제우스의 말일 뿐이다.
여자의 적은 여자다.
레토는 제우스가 바라보는 헤라와 여자가 바라보는 헤라가 다른 존재라는 것 정도는 충분히 인지하고 있는 여자다.
헤라는 티탄 여신이다.
아무리 제우스가 헤라는 다르다고 한들, 그게 얼마나 다르겠는가?
그렇게 그녀는 헤라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내지 못하고 결국 세상을 떠돌게 되었다.
이미 산통은 느껴지기 시작했지만, 예정보다 더 시간이 지나기도 했지만, 그녀는 몸을 비틀거리며 정처없이 걷고 또 걸을 뿐이었다.
누군가가 출산을 방해하는 것도 아닌데.
당장이라도 아이들에게 세상의 빛을 보여주고 싶은데.
"내 아이들은...흐끅, 분명 헤라 님께 밉보일 거야…!"
자꾸만 가이아 여신의 예언이 머릿 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예언대로 이루어진다면 헤라는 분명 자신을, 혹은 자식들을 어떻게 하려고 할 것이 분명했다.
"흑, 흐윽…!"
레토는 땅에 주저앉았다.
멀리 멀리 떠나려고 했지만, 어느 순간 자신의 끝에는 넓은 바다만이 보일 뿐이었다.
정처없이 걷다보니 이름도 모를 섬에 도착했고, 섬은 마치 자신보고 쉬다가라는 듯 고요했다.
"흐윽, 나는 이럴 자격도 없는...아아…."
안에서 아이들이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에 가득차있더라도, 정해진 운명에 벌벌 떨더라도 레토는 아이들의 어머니가 된 여자.
"아가…. 미안하구나, 잠깐만, 쉴게…."
레토는 자식들을 생각하며 배를 보호하며 앉았고, 뭔가 의아함을 느꼈다.
"빛...?"
하늘에서 금빛이 내려오기 시작했다.
찬란한 황금빛 사이로 나타난 여인은 공작새의 깃털과도 같은 장식이 달린 창을 들고 땅에 착지했다.
"근심이 가득해보이는구나."
레토의 앞에 찬란한 빛을 뿌리며 한 티탄 여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찰랑거리는 금발을 반짝이며, 왕관으로 머리를 넘기고 정열적인 붉은 드레스를 입은 모습은 막강한 권위를 가진 신처럼 보였다.
"당신은…?"
"나는...출산의 여신, 유노. 모든 신들의 탄생을 관장하는...대신 이니라."
"대신...이라고요?"
"태초에 혼돈이 있었고, 거기서 가이아가 태어났지. 나는 가이아로부터 파생된 존재이니라. 모든 생명의 탄생에 축복을 내리는 존재지."
스스로를 유노라고 밝힌 여인은 인자한 얼굴로 레토의 앞에 무릎을 꿇으며 마주봤다.
"자식의 탄생에 슬퍼하는 이가 흐느끼는 소리에 이렇게 찾아왔노라. 네게 무슨 고통이 있어 이렇게 울고 있느냐?"
"저는…."
레토는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말했다.
그러자 유노는 단호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틀렸다. 가이아 여신의 예언은 절대적이지 않다."
"네…?"
"예언이 이루어질 수도 있지. 하지만 반드시 예언이 이루어지라는 법은 없지 않느냐."
"하지만...가이아 님의 예언은 절대적…."
"메티스의 이야기를 알고 있느냐?"
유노는 너무나도 슬픈 얼굴로, 하지만 레토를 두둔하듯 어깨를 꾹 잡으며 말을 이었다.
"가이아 여신은 메티스의 아들이 제우스의 왕좌를 몰아낼 것이라 예언했지. 하지만 어찌되었느냐? 메티스가 지금 살아있더냐?"
"...아닙니다."
"그런데 예언이 이루어질 수 있을까?"
"...그럼?"
"그것은 예언이 아니다. 수많은 미래 중의 하나일 뿐이지. 어딘가 다른 세계에서는 메티스가 아들을 낳아 제우스를 몰아내는 곳도 있을 것이다. 어딘가에서는 헤라가 너를 시기하고 질투하여 출산을 방해하고, 어디서도 네가 땅에 누워 쉬지도 못하게 만드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세상은 다르다."
유노는 레토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 세상의 헤라는 네 출산을 축복한단다. 이 세상의 헤라는 네 자식들을 본인의 자식처럼 여기며 사랑할 것이다."
"어째서...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네 자식들이 누구의 자식이더냐?"
"아…!"
레토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제우스의 자식들이다. 헤라가 가장 사랑하는 남자의 자식인데, 어찌 헤라가 감히 해코지를 하고 질투를 하겠느냐?"
"정말, 정말 그런 겁니까…?"
"물론이다. 내가 보증하마."
"정말, 제 아이들은 헤라 님께도 사랑을 받을까요…?"
레토의 진심어린 눈물에 유노는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
"그래. 그러니 지금은 아이를 낳는데 집중하거라. 아이들에게 이 땅에 사랑이 가득함을 보여주거라. 만약 네가 헤라를 두려워하여 아이들을 낳지 않으려고 했다면, 헤라가 가장 분개할 것이다. 어찌 그런 걱정 따위로 제우스의 아이에게 해를 끼칠 수 있냐고."
"아, 아아…!"
"가이아 여신이 정한 예언은 이미 틀어졌다. 그러니 헤라는 그 예언이 진실이라고 믿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설령 네 자식들이 제우스 다음가는 권력을 얻는다고 한들, 그것이 아이들의 탄생을 막을 이유는 되지 않는다."
유노는 레토를 자신의 품에 안았다.
"헤라는, 너와 너의 자식들과 함께 사랑으로 제우스를 섬길 것이다."
"아, 아아아…!!"
레토는 목놓아 꺼이꺼이 울었다.
그녀가 얼굴을 묻은 가슴에서 느껴지는 진심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여인의 마음이었다.
"헤라 님, 헤라 님…!!"
"마음 껏 울어라. 그리고...헤라와 둘이서 진심으로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를 해보거라."
유노는 레토의 등을 토닥이며 위로했다.
"대화로, 오해를 풀 수 있을 것이다. 헤라나 너나 둘 다…사랑하는 제우스의 여인이니."
* * *
"참으로 멋진 광경이야. 그렇게 생각하지 않니?"
"...조금은 이해가 갑니다."
님프는 헤라의 품에 안겨 목 놓아 우는 레토를 향해 쓴웃음을 지었다.
"예언이 틀렸다는 것에 대한 증명. 지금까지 그 누구도 그러지 못했죠."
"그래. 설령 나조차도."
크로노스의 자식이 크로노스를 몰아내고 신좌를 차지하리라.
결국 그렇게 됐다.
나는 예언대로 신들의 왕이 되었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이겁니까?"
"그래. 메티스가 스스로를 죽이는 것으로...예언은 신뢰를 잃었다. 이제 가이아가 말한 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시대는 끝났어."
우라노스와 크로노스의 시대.
둘 다 가이아라는 절대적인 존재가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레토의 쌍둥이 자식들이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을 지 모르지만, 예언대로 되어도 좋고 아니어도 좋지. 내 자식들이니까. 능력이 좋으면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 거고, 쌍둥이 둘다 뛰어나다면 나 다음가는 권위를 가지게 되겠지."
"그건 예언에 순응하는 건가요?"
"다르지. 예언은 확정된 미래 중 하나를 알려주는 것일 뿐이다. 우리는 여러 가지 삶의 방향성을 가지고 생을 걸어가지만, 그 길이 나중에 알고보니 예언대로 이루어졌을 뿐이야. 그렇다고...예언대로 삶을 사는 건 안 되지."
나는 님프의 어깨를 토닥였다.
"언젠가 자식이 아버지를 죽일 것이라는 신탁이 내려졌다고 해서 아버지가 자식을 버린다면, 오히려 그게 더 강한 역풍으로 돌아오게 되지 않겠느냐? 아버지는 나를 버렸어! 그러면서 아버지를 죽이는 패륜을 저지른다거나."
"그건 경험담이신가요?"
"하하, 농담도. 나는 죽음으로부터 살아남으려고 한 거지. 아버지가 나를 죽이려고 하지 않았다면, 나는 어쩌면 오르튀스의 장군으로 살아있었을 지도 몰라."
크로노스에게 저항한 건 살아남기 위해서다.
그 인고의 시간이 그저 '운명'이라는 두 단어로 정리된다면, 나의 노력과 고통어린 시간의 의미가 퇴색된다.
"정해진 운명같은 건 없어야 해. 레토에 대해서 예언대로 된다고 해도, 그건 레토의 자식들이 그만큼 대단하기 때문이라는 거야. 후후, 모순 아니냐? 예언이 이루어지지 않기를 바라면 레토의 자식이 무능하기를 바라야하는데, 그 자식들이 내 자식이니까 그래도 유능하기를 바라고 있거든."
"제우스 님의 혈통이니 적당히 유능하지는 않겠군요. 제 자매의 혈통이기도 하니...분명 제우스 님 다음 가는 권력을 가질 수도 있을 겁니다."
"그거, 예언이냐?"
"아뇨? 예상입니다. 미남과 미녀가 만나 결혼을 하면 잘생긴 아들과 예쁜 딸이 태어나는 것과 마찬가지죠."
"그런가? 흐흐."
나는 님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녀의 정수리에 키스로 인사를 전했다.
"고맙다. 레토를 붙잡아줘서. 네가 아니었으면 레토는 분명 이 세상 전역을 돌아다녔겠지."
"가족이니까요."
님프, 과거 아스테리아라고 불렸던 여인은 내게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염치없지만, 레토 언니를 잘 부탁드립니다. 그리고...약속을 꼭 지켜주세요."
"약속? 무슨 약속?"
내가 아스테리아와 한 약속이 뭐가 있더라.
"네 남편이라면 타르타로스에 처박아뒀는데?"
"정말, 섭섭하게 하시네요. 딸아이가 얼마나 기대하고 있는데."
아스테리아는 볼을 부풀리며 자신의 아랫배를 가리켰다.
"제 딸아이의 처녀, 가져가주시기로 약속하셨잖아요."
"그건 네 의사지 본인의 의사는 아니지않느냐."
내 안의 K-유교인이 말하고 있다.
예의상 한 번은 사양하는 게 인지상정.
어른들이 주는 용돈도 '에에이'하면서 한 번은 사양하는 것이 도리 아니겠는가.
"네 딸의 의사를 따르기로 하마."
속으로는 혹시나 철회할까봐 진심으로 쫄리지만, 나는 묵묵히 아스테리아의 말을 기다렸다.
"제 딸은...후후. 알겠습니다. 그렇게 알고 물러나겠습니다."
사아아.
"제 딸은, 제우스 님께 범해지기를 바라고 있사옵니다. 호호호."
"...뭐래."
아스테리아는 땅속으로 사라졌다.
그녀는 이제 살아있되 살아있는 존재가 아니다.
전 남편으로부터 막대한 고생을 하고 육신의 고통을 다스리기 위해, 그녀는 우리가 디디고 있는 이 섬-오르티기아라는 섬이 되어버렸다.
내가 이야기를 나눈 님프는 그녀의 혼령에 불과하다.
아스테리아는 사라졌다.
나는 따스한 바람이 섬 안에 도는 것을 만끽하며, 헤라와 레토를 향해 다가갔다.
"오, 오빠! 큰일났어!!"
"응?"
"레토, 나올 것 같아!"
"......."
나는 급히 주변에 있던 님프들을 불러 헤라를 돕도록 지시했다.
님프들은 헤라와 함께 레토의 출산을 성심성의껏 도왔다.
그리하여.
레토는 무사히, 쌍둥이를 낳았다.
한 명은 너무나 아름다운 여아였다.
그리고 다른 한 명은 너무나 잘생긴….
'여자네.'
레토는 쌍둥이 자매를 낳았다.
예쁜 아이가 아르테미스요, 잘생긴 아이가 아폴론이라고 하더라.
상상도 못한 출산.
태양과 달의 쌍둥이가 설마 레토의 자식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