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우스 엑스 마키나-87화 (87/235)

EP.87 제우스의 자식들 (2) 헤파이스토스

하루 전.

나는 헤라와 침대에서 한 번 진하게 살을 섞고 난 뒤, 헤라를 품에 안고 물었다.

"진짜 싫어?"

"응. 아레스는 차라리 괜찮아. 하지만 헤파이스토스는 진심으로 대장장이가 안 되었으면 좋겠어."

헤라는 자신의 딸들이 '거친 일'을 하지 않기를 바랐다. 특히 자신이 배아파 낳은 첫번째 자식, 헤파이스토스는 더더욱 그랬다.

"엄마 된 마음으로서 자식이 좋은 길만 걷기를 바란다는 거, 이제는 좀 이해가 될 것 같아. 물론 자기 재능을 가장 잘 발휘할 수 있는 곳에서 하겠다는 걸 부정하는 게 아니

야. 나는 단지...."

"좀 더 여자가 예쁜 모습으로 있을 수 있는 곳이었다면 좋겠다?"

"응.... 다른 여신들처럼 좀 더 여신다운 그런 쪽으로 했으면 좋겠어."

헤라는 헤파이스토스가 대장간의 신이 되는 것을 싫어했다.

"헤스티아만 하더라도 화로의 신이잖아? 화로를 관장하면서 집을 지키는 그런 모습이잖아. 청초하고, 단아하고. 모두가 헤스티아를 보면서 아름답다고 하는 것처럼, 나도

헤파이스토스가 그런 모습이 되었으면 좋겠어."

헤라는 내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불을 좋아하니까 부엌의 신이라거나. 집안 사람들의 식사를 책임지는 부엌의 주인으로서 남편을 내조하고 자식들을 보듬어주는 거지. 나는...헤파이스토스가 차라리 그

런 신이 되었으면 좋겠어."

"요리의 신이라. 확실히 불꽃이랑 잘 어울리기는 하네."

불꽃은 대장간에서만 쓰이는 게 아니다. 집을 따뜻하게 하는 것이 헤스티아의 권능이자 영역이라고 한다면, 아직까지 부엌이라는 곳을 관장하는 신은 없다.

'헤라가 보면 진짜 가부장적이란 말이지.'

헤라와 헤파이스토스의 갈등은 세대 차이다.

헤라가 가지고 있는 여성관이 여자는 집에서 밥이나 하라는 가부장적 마인드라면, 헤파이스토스는 여자도 대장간에서 망치질을 할 수 있다는 진취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

었다.

'그건 아닌가?'

아무리 내가 기존의 티탄신들과는 다른 방향에서 성교육을 했다고는 해도, 그게 그쪽 사상으로 나아갈 정도로 가르치지는 않았다.

-어떻게 그런 끔찍한 사상을!

그런 존재가 있다고 하면 내가 나서기도 전에 티탄 여신들이 나서서 그 자에게 돌을 던질 것이다. 심지어 내가 그런 말을 해도 난리가 날 것이다.

세상 어느 곳보다도 가장 마초적인 곳이 바로 이곳, 그리스니까!

"헤라, 그래서 너는 헤파이스토스가 부엌의 신이 되기를 바라는 거야? 사실은...대장장이의 신이 되는 게 싫은 게 아니고?"

"둘 다...였으면 해. 여자는 조신하게 집에서 남편을 돕고 아이들을 기르는 게 행복이니까."

"그 행복이 다를 수도 있지 않겠어? 헤파이스토스에게 있어 진짜 행복은 망치를 두드리는 거라면?"

"......잘 모르겠어."

헤라는 내 품에 꾹 얼굴을 묻었다.

"나는 오빠의 식사를 돕고, 오빠의 아이를 키우고, 오빠를 위해 사는 게 행복이란 말이야. 그래서...애들도 그게 행복이라고 생각했어."

"그래, 그렇지."

"그런데 그게 아닌 걸까? 내가...잘못 생각한 걸까?"

"내 아내로서는 백점 만점인 답이지만, 헤파이스토스의 엄마로서는 그다지 좋은 점수는 아니겠네."

남편이자 아버지로서, 나는 헤라에게 분명히 선을 그을 필요가 있었다.

"자식의 행복이 곧 부모의 행복일지도 몰라. 자식에게 내가 바라는 걸 강요하는 건...오히려 자식을 불행하게 만드는 걸지도."

"정말 그럴까?"

"그래. 너도 그렇잖아? 만약 레아 어머님이 너보고 나와 떨어져서 살라고 했으면 어떤 기분이 들었겠어?"

"...그건 싫어."

헤라는 더욱 내 몸에 밀착했다. 나는 그녀의 머리를 손으로 정돈하며 등을 토닥였다.

"그거랑 마찬가지야. 알겠지? 너무 뭐라고 하면 안 된다?"

"...응."

나는 헤라를 위로하며 잠에 들었다.

이 정도면 됬겠지 하는 그런 안심과 함께.

* * *

그리고.

나는 너무 간과했다.

"저는 대장장이의 신이 될 것입니다."

"네가? 하,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 너는 이 헤라의 딸이다. 얌전히 부엌의 신이 되어라."

두 사람은 내 아내와 딸이기 이전에, 한 명의 여자라는 것을.

"하지마라."

"싫습니다."

여자와 여자의 기싸움이 이 얼마나 무서운가.

헤라와 헤라의 기질을 가장 짙게 물려받은 헤파이스토스가 서로 양보하지 않고 말싸움을 벌이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가.

'아테나, 도와줘.'

'제우스 님 말고는 누구도 해결 못하는 문제네요. 힘내요!'

'야아아아아아'

"너는 왜 애가 그 모양이어서!"

"엄마는 내가 하고 싶은 거 하겠다는데 왜 그러는 거야!"

"뭐? 너 엄마한테 무슨 말버릇이야! 여긴 올림포스야! 예의를 갖추지 못 해?!"

"싫어! 엄마 미워! 으아앙!"

"네가 뭘 잘했다고 울어!"

"흐아아앙, 아빠아아아! 엄마가 나한테, 으아아앙!!!"

"허, 허허허."

나는 다시는 떠올릴 수 없었다.

* * *

헤라는 헤파이스토스와 싸웠다.

그 누구도 모녀의 다툼에 함부로 말을 덧붙이거나 하지 못했고, 헤라는 결국 이 문제를 상담할 수 있는 여인을 찾아갔다.

"엄마, 나 어떡해?"

"...그러게."

레아는 자식 문제로 조마조마해하는 헤라를 보며 쓰게 웃었다.

"나는 헤파이스토스가 네 옛날 모습 보는 것 같아서 귀엽기만 하구나."

"나?"

"너, 맨날 제우스랑 같이 있겠다고 고집부렸잖아. 데메테르랑 헤스티아 때리고."

"내, 내가 그랬어?"

"그럼. 우는 데메테르랑 헤스티아 내가 달래고, 제우스는 또 삐친 넵튠이랑 하데스 달래고. 너는...아휴, 아니다."

레아는 헛웃음을 흘리며 손사레를 쳤다.

"너도 이제 고생 좀 해봐야지. 앞으로 낳을 아이들이 얼마나 많은데 벌써 그러니."

"뭐?"

"몰랐니? 너 옛날에 제우스한테 그랬잖니. 나는 커서 오빠 자식들 계속 낳을 거라고. 후후후."

"으으...."

헤라는 과거의 자신에 대해 폭로하는 어머니의 말에 부끄러워 어딘가로 숨고 싶을 지경이었다.

"그래도 그렇게 싸우고 나면 너는 항상 몰래 꽃을 따오더라. 그리고 언니랑 동생들한테 미안하다면서 사과를 하고는 그랬어. 아마...네 딸도 그러지 않을까?"

"헤파이스토스도?"

"응. 그 아이라면...아마 네게 선물을 줄 거야. 그러니까 그 아이가 먼저 네게 화해의 선물을 보낸다면, 너는 못이기는 척 받아주렴. 그게 어머니란다."

"......알았어, 엄마."

헤라는 한숨을 푹 내쉬며 레아의 품에 안겼다.

"엄마, 참 어렵네."

* * *

깡, 깡, 깡.

균일한 망치 소리가 울려퍼진다. 헤파이스토스는 모루 위에 올린 검을 향해 망치를 거칠게 휘두르고 있었다.

평소라면 경건한 마음으로 휘두를 망치에 분노가 서려있다. 나는 그 분노가 누구를 향한 것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고, 저 분노를 다독이기 위해 대장간에 방문했다.

"딸."

"아...."

막 거칠게 망치를 휘두르고 바닥에 망치를 내팽겨치려던 헤파이스토스는 나를 보고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몸은 장성하여 헤라만큼 볼륨감이 넘치지만, 꼭 잘못을 저지른 아이처럼 구는 모습을 보니 아직은 어린 부분이 많다는 것도 느껴졌다.

"대장장이의 신이 되고 싶니?"

"...네."

"왜?"

"제가 가장 잘 하는 분야이니까요."

헤파이스토스는 면담장에서 했던 이야기를 그대로 말했다. 그녀는 직설적이었기에, 자신의 말을 꾸며서 말하거나 돌려 말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잘 할 수 있는 일이고, 누구보다 자신이 있으니까 한다.

"아빠한테는 부탁하지 않고?"

"네. 아빠가 저한테 대장장이의 신이 되어라고 시키면 하겠죠. 하지만 그러면 엄마는 아빠를 원망할 거예요."

"그건 괜찮아."

"아니예요. 그러면 제가 마음이 편하지 않아요. 저는...엄마를 설득할 거예요."

헤파이스토스는 망치를 들어올리며 씩 웃었다.

"당신이 낳은 딸이 이 분야에 있어서만큼은 최고라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요."

"그 어떤 남자들보다도?"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헤파이스토스는 내 말에 코웃음을 치며 엄지로 자신을 가리켰다.

"남자가 아니라, 이 세상 누구도 저보다 대장장이 일을 잘 할 수 없어요. 설령 그건...아빠라고 해도."

"아."

나는 내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헤파이스토스는 남녀의 문제에 대해 생각하고 있던 것이 아니었다. 딱히 유리천장을 망치로 깨부수겠다거나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니었다.

자신이 최고라는 마인드.

남녀를 넘어서, 티탄 최고의 장인이라는 자부심이 스스로를 대장장이의 신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의 근원이었다.

"그리고...이건 아빠 앞에서 말하기 조금 부끄럽기는 한데."

헤파이스토스는 손가락을 베베 꼬며 슬그머니 웃었다.

"...최고의 대장장이를 낳은 부모가 누구냐고 신들이 말한다면, 제우스와 헤라의 자식이라고 말하고 싶어요. 모든 대장장이들이 저를 우러러본다면, 저를 낳아준 두 분을

숭배할 테니까요."

"아!"

나는 또다시 깨달았다. 현대에 살던 나로서는 대장장이라는 직업이 너무나 고대의 기술이라고 생각했지만, 내가 살고있는 이 시대에는 첨단과학이나 마찬가지인 셈.

-저는 PINEAPPLE의 CEO로서 모든 IT업계인들의 존경을 받고자 해요.

'이런 어리석은!'

아아, 나는 편견에 빠져있었다. 이 세상에서 대장장이가 얼마나 대단하고 위대한 위상을 가지고 있던 존재인가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저는 다른 누구에게도 대장장이의 신이라는 자리를 빼앗기고 싶지 않아요."

"암, 당연하지! 우리 딸이 앨론.게이츠.잡스가 되고 싶다는데! 암!"

"네? 아빠, 지금 뭔가 갑자기 바뀐 것 같은데...."

"너와 이야기를 하니까 깨달은 거다. 하하, 역시 헤라의 딸이야. 그래, 헤라가 뭐라고 하든 내가 커버하마. 그래, 당연히 내 딸이, 헤라의 딸이 대장장이의 신이 되어야지."

대장장이의 신이라고 하면 뭔가 약해보인다.

하지만 그녀를 '테크놀로지의 신'이라고 한다면 어떨까?

"헤라를 설득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하고 쉬운 방법을 알려주마."

"네?"

헤파이스토스는 눈을 빛내기 시작했다.

"그런 방법이 있어요?"

"그래. 내가 알려줬다고는 하지 말고."

"아, 알았어요. 말씀해주세요, 아빠."

파지직.

나는 번개를 일으켰다.

그리고 적당히 그 형태를 주물러, 헤라를 단번에 설득할 수 있는 '기계'의 형태를 제안했다.

"이거란다."

"...아빠?"

"왜?"

"이건 좀...."

헤파이스토스는 요동치는 번개에 인상을 찌푸렸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제가 이러는 건 좀 그렇지 않을까요?"

"괜찮아. 아빠가 장담한다. 네가 이걸 만들어서 엄마한테 준다면, 엄마는 엄청 기뻐할 거야."

"엄마가요?"

헤파이스토스는 의심을 거두지 못했다. 물론 내가 헤파이스토스의 입장이었어도 내 제안을 쉽게 믿지 않았을 것이다.

"...알았어요. 아빠만 믿을게요."

"그래. 이건 무조건 이기는 방법이다."

헤라가 마음을 바꾸지 않고는 도저히 견딜 수 없는 비기.

"황금 의자를 선물하자꾸나."

(SM플레이용 구속구와 딜도가 숨겨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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