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92 제우스의 자식들 (7) 페르세포네
제우스, 넵튠, 하데스, 헤라, 데메테르, 헤스티아.
아테나, 헤파이스토스. 아레스. 아폴론. 아르테미스.
나를 비롯한 레아의 6남매를 포함하여, 나는 올림포스 12신 중 무려 11명의 자리를 만들어냈다. 이제 1명만 더 포섭하면 이 자리는 전부 다 채워지고, 본격적으로 올림포스 12신의 이름을 널리 알릴 수 있다.
남은 1자리를 어떻게 해야 할까.
이게 상황이 조금 난감해졌다. 후보는 여러 명인데 남은 자리는 하나밖에 없다.
'아프로디테, 헤르메스, 디오니소스.'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들을 포함해보니 12신의 자리를 채우기는 수가 부족했다.
그렇다고 15신으로 늘리자니, 이미 원탁은 12자리로 만들어지고 있었다.
원탁의 기사도 12명이고, 예수의 제자도 12명이다. 이런 와중에 내가 15명으로 자리를 늘려버리면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긴다.
하나. 올림포스 12신이라는 위엄이 점점 퇴색된다.
한정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주신들이라는 이미지야말로 올림포스 신들의 권위를 높이는 방법이며, 마구잡이로 늘어났다가는 올림포스의 지배자라는 권위가 내려가게 된다.
챌린저는 그 수가 몇백 명으로 한정되어있기 때문에 가치가 있는 법이다. 만약 그 수가 매번 1000명 2000명 늘어나게 된다면 챌린저의 가치는 떨어지게 되는 법.
그러다가 나중에 그랜드챌린저를 만들 것도 아니니, 그냥 처음부터 못을 박아야한다.
또한 운명론을 거부하는 내 주변인들조차도 막상 올림포스의 자리를 정하자고 하자니, '미신'에 대해 격렬히 걱정하기 시작했다.
-13은 조금....
-12가 좋아요, 12가.
"올림포스의 대신들이 12명인 건 운명인 건가."
가급적이면 나는 운명을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했다.
원전의 내용도 내게 좋은 부분만 취사선택하고 최대한 무시하고자 했다.
그런데 내가 처음 12명에서 15명으로 늘리는 게 어떨까 의사를 밝혔더니, 아테나부터 시작해서 모두가 기겁을 하더라.
13이라는 숫자가 서양에서 가지는 불길한 이미지는 분명 예수 그리스도와 제자 유다의 관계에서 오는 것인 줄 알았는데, 이미 그보다 뿌리 깊게 박혀 있는 듯 했다.
14...14도 안고 13이 싫다니. 4를 싫어하는 동양과는 뭔가 사뭇 달랐다.
아무튼 이래서 자리를 늘리는 것은 별 효과가 없어지게 되었다. 정확히는 자리를 늘리는 일이 여러 신들의 거부반응을 일으켜 안하느니만 못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남은 1자리로 이제 지지고 볶고 해야한다.
앞으로 태어날 내 자식들로 자리를 채울 것인가, 아니면 이미 태어났거나 현재 있는 사람으로 자리를 채울 것인가.
그리고 그 유력한 후보를 올림포스 12신의 자리에 올릴지 말지에 대해 고민을 나누고자, 나는 내 고민을 들어줄 사람을 찾았다.
"응애."
"제우스 님, 위엄을 갖추세요."
"응애 나 아기 제우스."
나는 포근한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내 어리광에 레아는 혹시나 방문 밖에서 누군가가 볼까봐 걱정하면서도 나를 포근히 감싸안았다.
"그래, 무슨 일이니."
레아는 자연스럽게 나를 침대로 이끌었다. 그녀는 뭔가 다른 걸 하고 싶은 눈치였지만, 내 머리를 허벅지에 눕히고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어줬다.
"뭐가 잘 안 되니?"
"한 자리를 어떻게 채울까 고민입니다."
"무슨 한 자리?"
"올림포스의 12대신의 남은 한 자리 말입니다. 운명에 따를 지, 아니면 운명을 개척할 지 고민 중입니다."
"너 다운 답은 아니구나. 너는 무조건 운명에 거스르는 쪽이 아니었니?"
"이 경우는 조금 달라서요."
생각해보라.
올림포스 대신 중에 아프로디테가 없다? 그 비너스가 없다?
차라리 잘 된 일일지도 모른다. 아프로디테는 아름답기도 하지만 성적으로 상당히 문란한 여자라 여러 신들과 밀월관계를 맺었다고 했다.
여자로 태어나겠지만, 우라노스의 성기에서 태어난 존재인만큼 근본이 좆이다. 어쩌면 조개 뚜껑이 열리며 태어난 아프로디테는 금발태닝양아치로 나타날 가능성도 있다.
제우스 말고 전부다 여자로 태어나고 있는데, 그에 대한 역치가 아프로디테 한 명이라고 한다면 희생할만 하다.
미와 사랑의 여신을 따먹지는 못해도, 대신 수많은 여신들을 따먹었으니까.
그래.
수많은 남신들이 여신들로 태어나고 있으니, 원래 여신으로 태어날 존재가 하나둘 정도는 남자로 태어나도 이상하지 않다.
그러니까 아프로디테는 일단 보류. 그렇다고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헤르메스나 디오니소스는 보류.
결국 남은 한 자리는 셋 중 한 사람을 위해 공석으로 놔두고자 한다면, 현재는 11명이지만 남은 한 자리에 세 명의 후보가 태어나지 않은 채 대기 중이다.
그리고 내가 올림포스 12신 중 한 사람이었는지 아니었는지 긴가민가한 존재가 한 명 있다.
다른 누구보다도 확실한 정통성을 가지고 있으며, 그 아이를 낳은 어머니가 강력하게 12신 중 한 자리를 원하고 있으며, 본인도 다른 자매들과 비교하여 충분한 능력이 되고, 나도 그 이름을 뇌리에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는 네임드다.
이 아이까지 포함하여 '15명'이다. 기존에 3명이 빠진다고 하면 뒤에 3명이 더 들어올 수 있지만, 빠질만한 사람은 딱히 없었다.
"어머님도 잘 아시는 그 녀석을 후보로 정하려고 하니까 문제가 생겼습니다."
"어떤 문제니?"
"...당사자가 원하지 않습니다"
놀랍게도 당사자는 내 제안을 거절했다.
올림포스 12신의 대신이 되어달라는 내 제안을 당차게 거절했다. 사실 내 제안은 녀석의 모친이 직접 내게 베갯머리에서 부탁한 거였지만, 그녀는 명석한 두뇌로 내 부탁이 어머니의 부탁임을 알고 정중히 사양했다.
이유는 하나.
-저는 땅에서 지내는 게 더 좋아요.
하늘 높은 곳에서 지상을 내려다보는 것보다 지상에서 자연과 함께 벗삼아 사는 삶을 살고 싶다고 하더라.
"좋은 말이구나. 하지만 그렇게 하면 되잖니. 나는 네가 당사자의 의지를 꺾고 강제로 시킬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죠. 아이들이 하고 싶은대로, 자유롭게 키우고 싶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애 엄마입니다."
흠칫. 레아는 손이 굳었다. 그리고 내 머리를 쓰다듬던 손으로 내 볼을 쓰다듬었다.
"내게 고민을 물으러 온 걸 보니 내 딸이로구나. 누구니? 넵튠? 하데스?"
"데메테르 입니다."
나는 고자질을 했다. 고자질을 할 수 밖에 없는 게, 다른 자매들 중 레아와 가장 친한 사람이 바로 데메테르였다.
"그리고 제가 12주신의 자리에 올리고 싶어하고, 그 제안을 거절한 아이는...페르세포네지요."
페르세포네.
나와 데메테르가 관계를 맺어 낳은 아이.
"그러니까 네 말은 그런 상황에서 너는 포기를 했는데, 데메테르가 지금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다는 거니?"
"네."
원흉은 무엇이냐?
"대체 왜?"
"가이아 여신께서 예언을 했답니다. 데메테르가 낳는 자식은 언젠가 지옥의 왕에게 납치되어 부모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살 것이다."
"어머님은 또 그런 걸 언제 얘기하셨다니?"
"예전에 가이아의 영지에서 지낼 때요."
결국 또 가이아다.
좀 가만히 있으면 되는데, 나이를 먹으니 입이 근질근질한지 예언을 트롤링을 일삼는다.
지난 번에 내가 분명히 경고를 했는데도 왜 이런 예언으로 고통을 받느냐 하면, 이건 이미 예ㅡㅡ전에 가이아가 퍼뜨린 예언이기 때문이다.
그런 게 한두 개가 아니다. 가이아 여신에게 인생 스포일러를 들은 사람은 한 두 명이 아니고, 그들이 들은 스포일러가 또 하나둘이 아니다.
"데메테르는 페르세포네와 떨어질까봐 너무 두려워합니다."
레토의 건은 내가 참고 참다가 결국 폭발해서 급발진하다시피 저질렀지만, 그 과정에 이르기까지는 정말 숱한 인내의 과정이 있었다.
"그래서 데메테르는 페르세포네를 올림포스의 대신으로 만들려고 합니다. 분명 지옥으로 내려보내지 않기 위함이겠죠."
"그건 별 의미가 없을 것 같은데? 지옥의 왕이 하데스인데 누가 감히 페르세포네를 납치하겠어."
".......그러니까 말입니다."
나는 안다.
원전을 어느정도 알고 있고, 페르세포네를 납치하는 자가 누구인지도 안다.
하데스.
원전의 하데스는 지상에 나왔다가 페르세포네를 납치한다. 분노한 데메테르가 지옥이고 뭐고 땅을 뒤엎어버리려고 하다가 결국 페르세포네는 일정 기간마다 지상과 지옥을 오가면서 살게 되었다고 알고 있다.
미래를 알고 있다는 일이 이토록 머리아프다.
내가 가이아가 운명을 제발 좀 말하지 말라고 부탁한 것은 머나먼 미래의 일로 현재의 사람들이 그걸 두려워하고 고통을 받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페르세포네가 진짜로 하데스에게 납치당한다면 어떻게 해야하는가.
가이아가 말한 운명이 또다시 이루어지면 그 때는 어떻게 해야하는가.
머리가 아프다.
"하데스가 설마 그런 짓은 저지르지 않겠죠?"
"내 생각은 하데스 말고 차라리 타르타로스에서 뛰쳐나온 괴물이 페르세포네를 납치하는 게 아닐까 싶구나."
"어머니, 어머니는 아시지 않습니까. 데메테르에게 그걸 말한 건 다름아닌...어머니 아니십니까."
"......."
레아는 침묵했다. 따지러 온 건 아니지만, 나는 레아와 더는 고민을 나눌 수 없었다.
"에이, 모르겠다. 고민을 해봤자 더 나오는 것도 없죠."
"그, 그럼…?"
"섹스나 합시다."
현자타임이 되면 분명 뭔가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샘솟으리라.
* * *
라, 라라-
금발여인은 고운 미성으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여인의 앞에는 여인을 사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또다른 여인이 있었다.
"좋구나, 페르세포네. 정말 아름다워."
"고마워요, 어머님."
데메테르를 닮은 페르세포네는 한 떨기 꽃과도 같았다.
그녀는 머리 위에 데메테르가 만든 화관을 올린 채 말갛게 웃었다.
"저는 정말 축복을 받은 것 같아요. 어머님과 함께 이 대지의 작물을 키우고 꽃을 피울 수 있잖아요."
"그래. 하지만 그러니까 너는 더더욱…나와 함께 있어야 할 것이다."
데메테르의 표정은 단호했다. 페르세포네는 데메테르를 보며 쓰게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머니. 그건 구속입니다."
"구속이어도 좋다. 너를 노리는 자들로부터 너를 지킬 수만 있다면."
데메테르는 페르세포네를 와락 끌어안았다.
"네 진실이 드러나면 너를 노리는 자들이 얼마나 많을 것 같으냐? 내가 왜 너를 숨기고자 하는데!"
"......."
샘물에 비친 페르세포네의 얼굴은 누가 봐도 곱고 아름다웠다.
그러나.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 올림포스의 여신들은 네 정체를 알면 눈이 돌아갈 것이라고!"
페르세포네라는 신은.
"그 미친 년들은 너를 강간하려고 들 것이다! 특히 아폴론 그 년은 더더욱!"
너무나도 여성스럽게 생긴.
"내 아들이 강간당하는 것, 나는 못 본다!"
남자다.
손가락에 꼽을 정도만 진실을 알고 있는 제우스의 유일한 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