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95 즂간 네버 체인지 (1)
올림포스 12주신이 자리를 잡은 이래.
세상은 점점 안정되어갔다. 땅을 관장하는 여신들이 지상에 곡식과 과일을 풍성하게 만들고, 하늘을 관장하는 신들은 나를 도와 기후를 안정화시켰다.
아아, 이것이 지중해식 기후!
그리스가 왜 융성했는지 알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날씨는 워낙 안정적이었고, 우리는 이곳에서 삶을 만끽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티탄 신의 위엄을 몸소 체험할 수 있었다. 시간은 상대적이라고는 하지만, 내가 처음 이 세계에 전생한 지도 어언 20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렇다.
200년.
나는 여전히 크로노스를 이겼던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고, 다른 신들도 자신의 모습을 전성기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아마 특별한 일이 없으면 지금의 모습이 고착화될 터. 앞으로 이 얼굴들을 평생 본다면 질리겠다는 생각도 가끔 했지만, 워낙 미인들밖에 없어서 그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200년이 지난 지금.
나는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좆같다."
인간들이.
"좆간이 밉다."
인간.
내가 너무나 사랑해마지않은 인간.
그들이 현재 내게는 좆같음을 보여주고 있다. 너무나도 그리스인 다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우라노스의 저주인가? 크로노스의 저주인가?
아니면 나와 척을 진 가이아의 저주인가?
그도 아니면 타르타로스에 처박히던 티탄 남신들의 저주인가?
"아테나, 인간들을 확 쓸어버릴까?"
"저는 아무래도 좋지만, 제우스 님께서 그러시다면."
이제는 아테나마저도 나를 옹호하는 처지에 이르렀다. 메티스였을 때는 지성을 가진 인간들을 보호하고 아꼈던 그녀가, 이제는 인간들을 전부 몰살시켜버리자는 내 제안에 동조를 하고 있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을까."
정말 어이가 없다.
나는 인간들이 절로 번성하고 번영할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실상은 달랐다.
약육강식은 모든 동물들의 기본이며, 인간들은 보통 미친 게 아니었다.
"아테나, 우리 잠깐 여행객으로 변장해볼까?"
"직접 인간으로 변장해서 인간들의 삶을 보실 생각이십니까?"
"그래. 아무래도 직접 겪어봐야겠어. 저들이 어떤 생각으로 살아가는지."
프로메테우스가 불이라는 것을 지상에 나누어 준 지 고작 200년.
그 사이에 인간, 인류는 제법 번성했다.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빠르고, 이상하고, 역겨운 방향으로.
"위험하지 않을까요, 제우스 님?"
"그 때는 네가 나를 구해줘야지."
"알겠습니다. 그러면...뭘로 변장할까요?"
"글쎄다.... 놈들을 속이려면 남매가 적당하겠지."
인간들의 행적을 직접 눈으로 보고 듣는다.
* * *
"전능하신 제우스시여. 자비로운 프로메테우스시여. 오늘도 저희에게 빛과 불을 내려주셔서 감읍드립니다."
호모에로스는 두 손을 모아 마을 앞에 있는 두 남자의 석상에 기도를 올렸다. 마치 마을을 지키고 있는 듯한 수호신상 둘은 서로를 마주보며 침입자를 노려보는 듯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응?"
호모에로스는 제우스의 석상 아래에 있는 두 남녀를 발견했다. 고급스러운 복색을 갖춘 두 남녀는 저 멀리 다른 부족에서 온 듯한 이들이었고, 가만히 서있어도 기품이 느껴졌다.
보통 존재가 아니다. 호모에로스는 그들을 향해 조심스레 다가갔다.
"안녕하십니까, 이방인이여. 프로메테폴리스에는 무슨 일로 찾아오셨습니까?"
"이곳의 이름이 프로메테폴리스라고 합니까?"
남자의 목소리는 중저음의 미성이었다. 듣기만 해도 아래쪽이 울리는 것 같은 목소리에 호모에로스는 괜히 부끄러워졌다.
"그렇습니다. 인류를 위해 불을 가져다주신 프로메테우스 님을 기리기 위해 이곳의 이름을 프로메테폴리스라고 지었답니다."
"...흥."
남자의 아내로 보이는 금발 여성은 어딘가 불만스러워보이는 눈빛이었다. 여자가 감히 저런 눈빛을 한다는 것 자체가 프로메테폴리스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이방인이니 그러려니 했다.
"그래서 이곳에는 무슨 일로...."
"저희는 순례자입니다. 지혜로운 아테나 여신의 인도에 따라, 세상 곳곳을 돌아다니며 지혜를 모으고 있습니다."
"아테나 여신이요? 크흠, 지혜로운 분이시지요. 하지만...."
호모에로스는 가슴을 두드리며 활짝 웃었다.
"아무렴 위대하신 제우스 님보다 지혜롭겠습니까?! 아무리 지혜롭다고는 하지만 그 분은 여신들 중에서 지혜로운 분. 하늘같은 제우스 님보다 지혜롭지는 못하겠지요. 하하하."
"......."
남자의 표정이 굳었다. 오히려 방금 전까지 불만이 가득해보이던 여자가 남자의 팔을 잡으며 다독였다.
"...크흠, 죄송합니다. 아테나 여신의 인도에 따르고 있다고 하셨죠. 실례했습니다."
"......하루, 묵고 가려고 합니다만. 혹시 따로 마을의 대표님께 허락을 구해야하는 겁니까?"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평소라면 모를까, 지금은 도시가 모든 이들에게 열려있습니다. 마침 오늘 밤에 축제가 시작되기 때문이죠."
"축제요?"
"그렇습니다. 남자들을 위한, 진정한 전사들을 위한 축제죠."
호모에로스의 말에 두 남녀는 표정이 굳었다. 그들은 호모에로스의 뒤로 걸어가는 두 명의 남자를 보고 사색이 되어버린 것이다.
"하악, 하악."
남자들은 각기 목줄을 쥐고 있었다. 그들이 붙잡고 있는 목줄은 한두 개가 아니었고, 목줄은 누더기를 간신히 걸친 여자들의 목에 걸려있었다.
"이전에 전쟁에서 포획한 노예들입니다. 감히 나무로 된 무기로 덤비는 어리석은 짓을 저질렀죠. 하하, 자비로운 프로메테우스 님께서 주신 불의 힘이 저희에게 있거늘. 혹시 '청동'이라고 아십니까? 굉장합니다, 그것."
"혹시...다른 인간들을 약탈한 건가요?"
"미네르바."
남자는 여자를 미네르바라고 칭했다.
"이건 이곳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이야. 이방인인 우리는 그저 이들의 삶을 바라볼 뿐이야. 진정해. 미안합니다."
"아닙니다. 같은 여성분이니...불편할 수 있죠. 하지만 이건 자연의 섭리입니다. 이곳에서는 흔한 일입니다. 저희는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호모에로스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위대한 제우스 님이 남자인 것처럼, 남자는 곧 위대한 하늘과도 같은 존재. 남자가 어찌 여자와 시선을...크흠. 아무튼 이곳은 그렇습니다."
호모에로스는 여자를 마치 장신구처럼 들고 가는 남자들을 가리키며 비릿하게 웃었다.
"자연에서 약자는 도태되는 법. 약한 자들은 강한 자들에게 잡아먹히는 법입니다. 이들은 가만히 있었으면 짐승들의 먹이가 되었겠죠. 하지만 저희가 이들을 보호하는 겁니다."
"저렇게 데리고 다녀서 어떻게 하려는 거죠? 막 침대에 서너명 눕혀놓고 희롱하고 그러나요?"
"예? 남자가 뭐하러 여자랑 합니까? 아이를 낳게 할 것도 아닌데."
두 남녀는 호모에로스의 말에 큰 충격을 받은 듯 했다.
"남녀가...."
"섹스를 안 한다고...?"
"하하, 성을 탐하는 건 남녀의 일이 아니지요. 아무튼 환영합니다. 이곳, 프로메테폴리스는 순례자분들을 환영합니다."
떫은 표정의 두 남녀는 이방인을 위해 마련된 집에 조용히 들어갔다.
사방에 가득한, 여자를 노예로 부리는 남자들을 두 눈에 담으며.
* * *
"뭔가 특별한 취향이라도 있는 건 줄 알았는데 아니었네요. 그냥 변태놈들이었어요."
"그러게."
미네르바, 아테나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다는 얼굴로 침대에 주저앉았다.
"인간들에게 고작 불을 줬을 뿐인데 이렇게 바뀐 건 어째서일까요? 크레타 섬의 그들은 이렇지 않았는데."
"힘이 생겼기 때문 아니겠어."
약육강식이라는 말에 동감한다.
나는 현대를 살다왔기에 직접 경험하기도 했고, 역사에 대해 배우면서 인간은 지배와 피지배층으로 나뉘는 수많은 경우의 수를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리스는 달랐다.
내가 크레타 섬에 살던 시기, 그 때의 인간은 성선설이 확실한 이론이구나 싶을 정도로 착한 녀석들이었다.
-하하, 유피테르 님! 빵 구워왔는데 먹을래요? 메티스 님도 같이 드십시오!
-이게 빵인가? 돌 덩어리지.
-하하, 유피테르 님이 오실 때마다 메티스 님이 좋아하시는데 저희가 이렇게라도 보답을, 히이익!
-나가!
-감사합니다, 유피테르 님!
미래의 인간들에 비하면 착해빠진 호구들밖에 없었지만, 순수하고 착했기에 우리는 인간을 믿었다.
인간의 가능성을 믿었다.
"뭔가 자식 농사를 잘못 지은 기분이예요."
"키운 것도 아닌데 무슨 농사."
"인간에게 불을 주기로 한 건 저희 결정이었잖아요."
아테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런 결과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어요. 힘 좀 있다고 노예로 부리고, 자기들이 대단한 존재인양 생각하고...."
"괜찮아. 낙심하지마. 원래 인간은 이런 존재였을 지도 몰라."
"그런 걸까요...."
끼이익.
문이 열렸다.
밖에는 머리를 프로메테우스처럼 밀어버린 남자가 바지만 입은 채, 가슴에 올리브 오일을 듬뿍 바른 채로 문앞에 서있었다.
"자기, 축제를 즐기지 않겠어?"
자기? 자기?
"축제요?"
"그래. 오늘이 축제야. 이방인들도 함께 즐기자구. 다, 함, 께."
오한이 들었다.
뭔가 좆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게 축제야."
"......."
ANG!
나는 분명 가르쳐준 적이 없는데, 그리스 놈들은 200년 정도 흐르자마자 서로 좆을 비비고 있었다.
"남자는 정말이지 위대한 거야. 위대하신 제우스 님도 남자잖아? 그러니까...남자와 남자가 이어지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만남이라는 거지."
새삼스럽게 나는 다시금 깨달았다.
이들이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라는 것을.
"자기야. 인간에게 엉덩이 구멍이 또다른 용도가 있다는 거...알-"
퍼-억.
내 앞에서 지껄이던 놈은 아구창이 날아갔다. 어지간하면 이런 표현은 쓰지 않으려고 했는데, 놈의 면상을 보니 그런 생각이 절로 들지 않을 수 없었다.
"미네르바."
"오빠! 저 새끼가!!"
미네르바는 눈에 불을 켜고 자신이 주먹질로 얼굴을 묵사발내버린 놈을 가리켰다.
"감히 오빠 엉덩이를 만지려고 했잖아요!"
"그래. 잘했다. 근데 저 더러운 놈 얼굴에 네 주먹이 꽂힌 게 더 나는 더 마음이 아파."
나는 벽에 놓여있던 삽 같은 물건을 들었다.
"다음부터는 도구를 사용하자꾸나."
깡.
깡깡.
깡깡깡깡깡깡깡깡깡깡깡깡깡깡깡깡깡깡깡깡깡깡깡깡깡깡깡깡깡깡깡깡깡깡깡.
"후우."
다짐했다.
"미네르바."
"네."
"이...씹게이 새끼들 대가리 다 깨버리자."
감히 제우스를 상대로 좆을 비비려고 하는 걸 넘어서 좆을 박으려고 하는 놈들이다.
"신성, 모독이다."
노예제도도 참았다.
약탈경제도 참았다.
정복전쟁도 참았다.
인간멸시도 참았다.
하지만.
"좆간이 밉다!"
프로젝트 <판도라>의 시작을 알리는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