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97 즂간 네버 체인지 (3) 프로젝트 판도라
새삼스럽지만 그리스에서 인간을 나보다 더 신경쓰는 티탄은 없다.
기껏해야 아테나가 있겠지만, 아테나도 지금은 나와 같은 위치에 서 있다.
인간, 아니 좆간박멸!
"이런 건 인간이 아니야!"
내가 생각하는 인간은 이런 자들이 아니다.
약자를 약탈하고 강간하고 노예로 삼고 지배 계급과 피지배 계급을 나누기야 하는 일을 하는 건 분명 인간이기는 하지만, 남자가 남자와 사랑을 나누는 것이 인류 전체의 사랑은 결코 아니다!
'그리스라서?'
그리스인이기 때문에?
내가 너무 잘난 남자이기 때문에?
아니다.
올림포스에는 제우스 이하 수많은 여신들이 있다. 그리고 제우스가 이들을 모두 통솔하고 있는 형국이다.
바다의 신도 저승의 신도 모두 여자인 판국.
남자가 여자보다 더 대단하다는 남존여비는 존재할 수 있다. 모든 여신들의 위에 만인지상의 존재로서 제우스가 존재하니까.
인간들은 올림포스를 보며 '오오, 위대한 제우스시여!'를 외치며 제우스의 행보를 흠모하고 있다.
그렇다면 제우스가 여신들을 지배하듯, 자신들도 일부다처제와 같은 형식으로 하렘을 꾸미는 것이 순리가 아닐까?
정말로 제우스를 존경하고 '아, 나도 제우스처럼 되고 싶다'고 생각한다면, 거대한 집단을 형성하면서 여러 미인을 붙잡아다가 축첩을 하는 것이 자연현상이 아닐까?
그런데 남자와 남자가 한다?
이건 뭔가 이상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모르겠다.
지금의 인류에게 남자로서 박는 것이 유전자 단위로 뿌리깊은 곳에 박혀있다면, 인류는 새롭게 다시 태어나야한다.
그래.
새로운 인류로 거듭나야할 때가 도래했다.
"모두 이렇게 모여줘서 고맙소."
나는 정장을 갖추고 올림포스 12신을 전부 모았다. 평소와 달리 원탁에 모인 11명의 여신들 모두 긴장한 얼굴로 내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오늘의 안건은 하나 뿐이오. 프로젝트 판도라."
내 말에 여신들의 표정이 굳었다.
"제우스 님, 그 말은 인류를 멸망시키겠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렇소, 나의 부인 헤라. 누구보다도 아름다운 여인을 만들어 지금의 인간들을 멸망에 빠뜨릴 것이오."
짝.
나는 손뼉을 쳤다. 헤스티아는 파르르 떨리는 눈으로 원탁 가운데 놓인 화로에 손을 뻗었고, 푸른 불꽃이 활활 타오르며 천장까지 치솟았다.
"이건...."
"프로메테우스x제우스. 보는 바와 같이 대머리 남자와 금발 청년이 서로 안고 있는 모습이오. 누군지는 적혀있지 않지만, 누가봐도 그 대상을 알 수 있지."
모두가 충격에 빠졌다. 아는 이들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내가 공식적인 자리에서 나를 두고 만들어지는 불온서적을 꺼낸 건 처음이었다.
"문제는 이것이 인간들에게서 발견한 물건이 아니라는 것이오."
"그럼...?"
"인간들의 물건이 올림포스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아테나의 말에 여신들은 입을 벌리며 놀랐다. 서로를 바라보며 누구의 것인지 살피지 않는 게 천만다행이었다.
적어도 여기에는 저런 걸 보는 자가 없었으니까.
"나의 부인, 헤라가 이것을 발견했소. 여신들 사이에서 유행처럼 퍼지기 전에 미리 차단했지."
"역겹기 짝이 없습니다. 인간들이 감히 신을 모독하고자 하는 것을 어찌 올림포스까지 가지고 온단 말입니까? 주신 제우스와 여신 헤라의 사랑을 노래로 꾸며도 모자랄 판에!"
쾅!
헤라는 탁자를 주먹으로 내리쳤다. 조금 분노의 핀트가 엇나간 것 같기는 했지만, 나와 은퇴한 대머리를 엮는 건 나만 화날 일이 아니었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감히 제우스 님께서 사용하신 가명, 유피테르를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차마 말하기 민망하지만, 이야기 속 금발의 청년을 두고 그들은 '쥬피터', '쥬피테르'와 같이 명명했습니다. 그래요, 어린 시절 제우스 님께서 아명이자 가명으로 쓰셨던 이름, 유피테르를 말입니다!"
쾅!
이번에는 아테나가 화를 냈다. 여기 있는 여신들 중에 유일하게 유피테르로서의 나와 만난 적이 있던 만큼, 유피테르라는 이름이 함부로 사용되는 것에 크게 분노하고 있었다.
"그...말씀 중에 죄송한데요."
아레스가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표지만 봐서는 안에 내용이 도대체 뭔지 모르겠는데, 봐도 돼요? 같이 저렇게 알몸으로 있는 거 봐서는 그냥 남자 둘이서 근육 운동 하는 거 아닌가요?"
"아레스...!"
헤라는 손으로 입을 막으며 울컥했다.
"아레스, 저건 근육 운동을 하는 게 아니라...."
"그럼 왜 알몸이에요? 남자랑 남자랑 같이 알몸인 이유가 뭐가 있어요?"
아아. 거지같은 인간 놈들 때문에 저 순수한 아이에게 금단의 지식을 알려줘야한다니!
나의 자식들 중에 저 책의 실체를 아는 건 세 명 뿐이다.
한 명은 메티스요, 한 명은 가장 나이가 많고 성적인 부분에 대해 어느정도 잘 알고 있는 헤파이스토스이며, 다른 한 명은 저들을 없앨 병을 만들어낸 아폴론이다.
즉, 아레스와 아르테미스와 페르세포네는 이 일에 대해 자세히 모른다. 그냥 인간들이 제우스를 모욕했기에 멸망시켜야한다고 알고 있을 뿐이며, 일부러 이들에게 정보를 알려주지 않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는 알아야 한다.
왜냐면 이제 이들도 어엿한 올림포스 12대신의 한 사람이니까.
"...볼 각오가 되었다면 봐도 좋다."
"제우스 님!"
"직접 보고 판단하지 않으면 나중에 오해가 생긴다. 인간을 꼭 멸망시켜야했냐는 불만을 가질 수 있지. 보지 않겠다면 안 봐도 된다."
"...보겠습니다."
아레스는 진지한 얼굴로 금단의 서적을 펼쳤다.
그리고.
부우욱.
"아, 아레스!"
증거물을 찢어버렸다. 자신이 증거를 찢어버렸다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아레스는 굳어있었다.
"어째서...위대하신 아버지가...? ???????"
아레스는 혼란에 빠졌다. 두 손에 움켜쥔 종이가 아래로 흩날렸다.
ANG!
"......허, 허허."
아르테미스는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뒤로 하는 것 자체에 혐오감을 가지고 있는 그녀에게 있어 저 서적은 당장이라도 하늘에서 인간들을 쏘아죽이고 싶어지게 만드는 것이리라.
"........"
풀썩.
"페, 페르세포네!!"
데메테르가 자리에서 일어나 황급히 페르세포네에게 다가갔다. 페르세포네는 안의 내용물을 확인하고 그만 기절해버리고 말았다.
"아테나, 수습해다오. 페르세포네가 다시 깨어날 때까지 잠깐 휴식을 취하도록 하지."
회의는 잠시 멈췄다.
* * *
그 시각.
양손에 사슬을 단 노인은 어깨에 작은 독수리 한 마리를 얹고 도시에 도착했다.
도시라고 해야할까, 폐허라고 해야할까.
도시에서 유이하게 빛나고 있는 것은 도시 입구에 우뚝 솟은 두 개의 석상 뿐이었다.
제우스와 프로메테우스.
두 신을 기리기 위한 석상을 제외하고, 나머지 모든 것들은 전부 파괴되고 붕괴되어 있었다.
"이곳이...."
"프로메테폴리스지요. 딸꾹."
노인은 석상 옆에 주저앉은 남자를 보며 눈을 찌푸렸다. 남자의 얼굴에는 푸른 반점같은 것이 도드라졌고, 금방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처럼 혈색은 새파랬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나?"
"사랑을 했을 뿐이오."
"사랑?"
"그렇소. 위대한 사랑. 신들은 알지 못하는...진정한 사랑. 끌끌."
남자는 술을 입에 털어넣었다. 술에 취해 뭔가를 잊어버리려고 하는 듯, 그는 회한에 가득찬 얼굴로 낄낄 웃었다.
"이보시오, 노인장. 당신이 생각하는 사랑은 무엇이오?"
"...."
노인은 자신의 어깨에 얹은 독수리의 등을 쓰다듬었다. 독수리는 노인을 위로하듯 머리를 노인에게 비비적거렸다.
"이곳은 가장 융성했던 도시가 아닌가? 그런데 왜 이 지경이 되었지?"
"병이 돌았소. 남자와 남자끼리 사랑을 나눈 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전부 병에 걸렸지. 오직 남자만 병에 걸렸소. 여자들은...자신도 걸릴까봐 도망을 갔지."
"남자들만? 이상한 짓을 한 건 아닌가?"
"이상한 짓? 뭐가? 누가 감히 이상한 짓이라고 할 수 있겠소?"
남자는 빈 술병을 높이 치켜들었다.
"언젠가 우리의 세상이 올 것이오. 이런 병에 굴복하지 않는, 이 넓은 세상에 우리의 사랑이 퍼지게 될 것이오. 그리고 그 때가 되면 사람들은 그제서야 알게 되겠지. 우리가,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이게 인간인가."
노인은 너무나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인간이란, 도대체...?"
노인은 스스로의 손을 보며 눈물을 뚝뚝 흘렸다.
"아아, 위대하신 제우스 시여. 당신은...이런데도, 이런데도...."
데구르르.
뭔가가 땅을 굴러 노인의 발치에 멈췄다. 마치 근육질의 엉덩이를 형상화한 듯한 것 가운데에는 커다란 구멍이 있었다.
에주스 홀
正正正
"이런데도...정녕 인간을 믿으시는 겁니까?"
노인은 다리에 힘이 풀려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 * *
회의, 재개.
충격에 빠진 페르세포네가 기절했다가 다시 정신을 차리고, 나는 화로의 불을 바꿨다.
"프로젝트 판도라는 두 번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한 번은 인류의 대청소. 먼저 인간들이 사는 곳을 물로 한 번 청소할 것이다. 넵튠, 대홍수의 준비는?"
"언제든지 할 수 있습니다. 데메테르의 도움으로 바다에서 육지로 물이 범람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좋다. 하데스, 지옥의 준비는 끝났나?"
"예. 지옥은 이미 망자들을 선별할 준비를 마쳤습니다. 스틱스 강에서부터 망자들은 병에 걸린 자들을 따로 분류할 것이며, 억울하게 죽은 이들에 대해서는 공명정대한 판결로 다음 생을 보장할 것입니다."
멸망을 위한 준비는 모두 끝났다.
나머지는 '임계점'에 다다르게 되면 실행하는 일 뿐.
"아폴론, 지금 몇 %지?"
"......."
"아폴론."
"......지금의 발병률은."
아폴론은 눈을 감으며 조용히 읊었다.
"69%. 이미...'대홍수'의 단계로 나아가기 위한 60%를 넘겼습니다."
"나머지 병에 걸리지 않은 30%의 인간은?"
"거의 대부분 여자입니다."
아폴론이 만든 병은 오직 남자만 걸리는 병이었다. 정확히는 '제우스 엉덩이를 범하고 싶다'는 생각을 가진 이들이 걸리는 병이었다.
여자도 걸리긴 했다. 하지만 남자의 1/100만도 못한 수였다.
"이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죽이지 않으실 거라면, 제가 바다의 주민으로 품어도 되겠습니까?"
넵튠이 가장 먼저 의견을 냈다.
"대홍수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도록 바다의 주민으로 만들고 싶습니다. 하반신을 물고기처럼 만들면 되겠죠."
"음, 좋소. 그러면 대홍수를 진행하기에 앞서...미리 다음 단계의 준비를 시작하려고 하오."
끼이익.
화로의 가운데.
헤파이스토스가 만들어 온 마네킹이 놓였다.
아직은 대리석 그 자체였지만, 몸의 형태나 모습은 여느 여신 못지 않은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판도라."
내가 '비너스 여신상'을 생각하며 만들어낸 재앙의 씨앗.
"판도라가 낳는 아이들, 후대 인류는 기존의 인류가 가지고 있던 것들이 결핍된 상태에서 태어날 것이다. 그대들은 인간들에게 줄 '재앙'을 이 인형에 담아라."
인간은 궁핍을 알 것이다.
인간은 질병을 앓게 될 것이다.
인간은 절망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의 인류가 건드리지 않으면, 결코 열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인류 스스로 봉인을 푼다?
"이제 남은 인류에게 선택을 맡기겠다. 판도라를 사랑하고 아껴주면 선한 인류가 태어날 것이고...."
인류는 스스로 재앙을 가져온 셈이 되리라.
"만약 판도라를 강간하고 절망만을 남겨준다면."
판도라의 상자.
"판도라가 낳는 자식들, 아이들은 악(惡)을 가지고 태어날 것이다."
그것은, 판도라의 뱃속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