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19 유희의 끝 (2)
아르고스가 젖소 축제에서 이오를 비롯한 수많은 여인들을 납치했다!
아르고스 왕국은 혼돈에 빠졌다.
아르고스가 누구인가?
아르고스라는 왕국의 이름과는 관련이 없지만, 공통점을 찾아보자면 '헤라'라는 여신과 관련이 깊다.
아르고스 왕국에서 가장 믿고 따르는 여신은 헤라였고, 아르고스라는 거인은 헤라의 명령을 받는 수하였다.
그런 아르고스가 왕국의 젖소들을 모두 가져갔다.
이는 거인의 잘못이 있다고 할 수 없었다.
거인, 티탄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이나 젖소나 둘 다 똑같은 동물이다.
딱히 인간이 지성을 가지고 있다고 한들, 인간과 젖소를 굳이 구분하지는 않는다.
아르고스가 기간테스, 땅에서 태어난 존재라고 해도 마찬가지.
아르고스는 헤라의 부하다.
헤라에게 바쳐진 공물을 회수하라는 명령을 받은 이상, 아르고스는 그걸 챙겨갈 의무가 있다.
-인간들이 젖소랑 비슷하게 입고 있던 것이 잘못이지.
헤라를 향해 신앙을 바치는 아르고스에서 젖소를 공물로 바치는 것 까지는 좋았지만, 그 과정에서 사람들이 의복을 맞춰 입는 것이 문제였다.
인간들의 관점에서 잘못은 아무리 생각해도 티탄이 잘못한 것 같지만, 그렇다고 티탄에게 화풀이를 할 수는 없는 노릇.
그러니 모두의 원망은 젖소 무늬 옷을 퍼뜨린 자, 왕에게로 향했다.
국왕 이나코스는 백성들을 위해, 그리고 납치된 자신의 딸을 되찾기 위해 헤라 신전으로 향했다.
"헤라 여신이시여, 부디 자비를 베풀어주소서!"
이나코스는 헤라 여신상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의 간곡한 외침에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헤라 여신상은 대리석 째로 마치 살아있는 듯 움직이기 시작했다.
"자비? 자비라고 하였느냐? 너는 내가 마치 분노를 하여 뭔가를 저질렀다는 듯이 말을 하는 구나. 내가 무엇을 잘못했기에 너는 내게 자비를 구하느냐? 내가 무엇을 화냈다고 그러는 것이냐?"
"그, 그건...."
이나코스는 차마 말할 수 없었다.
굳이 잘못을 했다고 말하자면, 평범한 복장을 하지 않은 아르고스의 주민들이 잘못을 했다.
"너는 내게 젖소를 바치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나는 아르고스를 보내 젖소들을 챙겼지. 그래, 젖소 옷을 입은 여자들을 말이다."
헤라의 눈에 불빛이 반짝였다.
"너는 네가 입힌 그 수많은 젖소 옷의 여자들을 그냥 입혔다고 할 것이냐? 아, 그 여자들은 그저 그 옷을 즐기기 위함이었을 뿐이다? 그것을 공물로 아르고스가 착각한 것이 결국 내 잘못이다? 그래, 너는 이렇게 얘기하고 싶은 것이냐?"
쿠구궁.
"나, 헤라가 잘못했다고?"
마른 하늘에 번개가 쳤다.
신의 분노를 나타내듯, 헤라는 이나코스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헤라의 뒤로 보이는 번개는 마치 제우스가 날리는 번개와도 같았다.
"다, 당치 않습니다! 여인들에게 그런 옷을 입힌 것이 잘못입니다!"
이나코스는 급히 고개를 조아렸다.
"그런데 왜 내게 자비를 베풀어달라는 것이냐. 신에게 바쳐진 공물을 다시 돌려달라고? 하, 네가 인간왕국의 왕 노릇에 너무 심취한 것 같구나. 이나코스여, 너는 강의 신이다. 티탄이야."
"으...."
"공물을 다시 받고 싶으면 그에 상응하는, 아니 그 이상의 가치를 가진 것을 바쳐라. 아르고스가 챙긴 여인의 수만큼 젖소를 가져와 바꿔가거나, 아니면 털이 하얀 준마를 데리고 오너라. 생명은 생명으로써 교환해야 하는 법."
헤라는 자비를 베풀었다.
이미 공물을 바친 것 자체를 물릴 수는 없으니, 바꾸고 싶다면 인간과 같은 수의 젖소와 백마를 바치라는 것.
"그, 그런...! 수십 마리나 되는 젖소와 백마를 구해오라는 것입니까?"
"나는 이미 네 부탁을 들어주는 것 만으로도 자비를 베풀고 있다. 생명의 경중을 두고 거래를 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여신으로서 자존심이 상하고 굴욕적인 일이란 말이더냐? 그것도 공물을 가지고. 설마 너는 나를 상대로 흥정을 하려는 것이냐? 네가 뭐라고?"
"크윽...!"
이나코스는 차마 얼굴을 들지 못했다.
헤라의 말대로, 자신이라도 신에게 바쳐진 공물을 가지고 흥정하거나 하기 힘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염치없게도 무릎까지 꿇고 간언하는 이유는 하나.
"제 딸을...제 나라의 백성들을 부디...!"
"하! 어처구니가 없구나. 티탄이 인간인 딸을 가지고 눈물을 흘릴 지경이더냐? 인간 나라의 국왕을 하면서 백성들의 고통에 마음 아파하는 것이냐?!"
헤라의 분노는 진심으로 커지기 시작했다.
"좋다! 네가 하는 것이 고작 소꿉장난이 아니라는 것은 알겠다. 네가 진심으로 네 딸을 소중히 여기고, 네 백성들을 소중히 여긴다는 것은 알겠다. 비록 인간이지만. 백성들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존재이나, 너와 네 백성들이 지금까지 나의 신전에 보인 정성을 생각해서 이번의 무례는 용서하마."
"감사합니다...!"
아버지가 딸의 안위를 걱정한 것이 뭐가 무례일까.
국왕이 백성의 안위를 걱정한 것이 뭐가 무례일까.
무례는, 그 문제의 화살이 약간이라도 티탄을 향하게 했다는 것 자체가 무례였다.
마치 티탄이 잘못한 것처럼 인간들이 생각하거나, 생각할 수 있게 만든 것 자체가 무례였다.
설령 그 진상은 다를 지라고 하더라도.
"어리석은 이나코스여. 너는 어찌 그렇게 인간에게 몰입하는 것이냐? 어찌 그리 인간인 딸의 일에 슬퍼하는 것이냐? 어찌 인간들을 그렇게 사랑하는 것이야?"
헤라의 목소리에는 분노가 점차 잦아들기 시작했고, 안쓰러움이 스며들었다.
"인간은 필멸자다. 언젠가 죽을 존재야. 그런 인간을 낳았으면 비단 이번 일 뿐만 아니라, 언젠가 죽을 거라고 생각을 했어야지. 생명이 영원할 것 같으냐? 네 딸, 이오가 옛날에 존재하던 인간인 줄 아느냐? 이오는 필멸자다. 너보다 먼저 죽을 것이야."
"큭...!"
"너는 감당할 수 있으냐? 자식을 잃는 슬픔을? 나의 어머니, 레아께서 느끼셨던 그 감정을 그대로 느낄 것이냐? 인간인데도?"
"인간이나...!"
이나코스는 바닥에 머리를 찧으며 답했다.
"제, 딸입니다...!"
"...좋다. 너의 의기는 알겠다. 너의 결연한 의지를 알겠다. 그래, 조금은...알겠구나."
헤라의 목소리는 서서히 잠기기 시작했다.
그녀는 슬픔이 가득한 얼굴로 이나코스를 향해 손을 뻗었다.
"자식을 잃는 슬픔은 너의 몫이고, 그런 걸 알면서도 자식을 낳은 건 너의 선택이겠지. 안타깝꾸나. 진심으로 안타까워. 결과를 알면서도 어찌 그런 선택을 했어. 인간은 한낱 짐승일 뿐이다. 티탄이 아니야. 인간은 그저 인간일 뿐이거늘...."
헤라의 목소리는 점차 잠기기 시작했다.
처음의 분노는 누그러들고, 이나코스의 처지에 대한 한탄만이 남게 되었다.
"좋다. 젖소를 모아와라. 그러면 젖소 한 마리와 사람을 바꾸도록 하겠다."
"아아, 헤라 여신이시여! 감사합니다! 정말, 정말 고맙습니다!"
"그래. 단, 이오는 내어줄 수 없다."
"예?! 어째서입니까?! 제, 제가 무엇을 잘못했습니까?! 제 딸이 무엇을 잘못했습니까! 차라리, 차라리 제가 벌을 받겠습니다! 프로메테우스가 그러했던 것처럼, 제가 대신 벌을 받겠습니다!"
"네 딸의 잘못이 아니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다만 이오는 내어줄 수 없어."
헤라는 짜증이 가득 섞인 목소리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잘못이 있다면 있지. 너는 도대체 딸을 어떻게 관리한 것이냐? 어떻게 딸이 지아비도 알아보지 못해!"
"...예? 서, 설마."
이나코스는 창백한 얼굴로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아이고, 아닙니다! 제 딸은 누군가와 간통할 그런 여자가 아닙니다! 녀석의 옆에는 항상 쥬피터가 있었습니다! 제가 보장합니다! 만약 쥬피터가 아닌 다른 놈과 통정했다면, 제가 쥬피터에게 목을 내놓겠습니다! 딸년을 똑바로 가르치지 못한 제 잘못입니다! 그러니 부디, 제 딸은...!"
"인간이 아니다!"
"...인간이 아니라고요? 예? 제 딸이 인간이 아닌 자와...불경한 짓을 했다는 말입니까?! 아아, 죽여주십시오! 저를 타르타로스에 처박아주십시오! 그러나, 제 딸만은...!!"
"후, 아무래도 진정으로 모르는 듯한 눈치구나."
헤라는 딱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제우스가 이오를 임신시켰다."
"제우스!"
이나코스는 분통을 터뜨리며 자신의 딸과 몰래 통정한 자의 이름을 외쳤다.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죽일 수 있었다면, 눈앞에서 갈기갈기 찢어버릴 기세였다.
하지만, 그 이름을 가지고 있는 자는 오직 한 명 뿐이다.
"...제우스 님? 위대하신 올림포스의 주인이시자 만물의 지배자이자 하늘의 주인인 제우스 님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제우스다.
"아."
털썩.
이나코스는 턱이 아래로 툭 떨어졌다.
그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연신 가로저었다.
"세상에, 말도 안 돼. 어떻게 그런 일이...."
"네 사위로 변장하여, 이오와 하룻밤을 보냈다고 하더구나. 이미 본인에게서 듣고 오는 길이다."
"......."
"불쌍한 쥬피터. 제 자식인지도 모르고 그리도 기뻐하더구나. 밤이면 밤마다 내 신전을 찾아와 자기 자식을 잘 봐달라고 간청하던 모습이 눈에 선해. 아아, 안타까운 남자여. 그는 지금 어디에 있느냐?"
"그, 그게."
이나코스는 전신의 핏기가 가셨다.
"시, 실은...."
"바른대로 고하지 못할까?"
"......이, 이오를 구하겠다고...떠났습니다.... 목숨과 바꿔서라도 반드시 이오를 구하겠다고...."
"......."
쥬피터는 아무것도 모른다.
* * *
"헤라는 자비로움과 관용을 보여서 좋고, 제우스는 어차피 강간마라서 남의 아내 빼앗는 정도로 욕을 먹어도 문제 없고, 쥬피터는 불쌍하지만 영웅적인 면모를 보이며 죽을 수 있어서 딱 좋군."
"오빠만 발정난 개새끼가 되는 거잖아."
헤라는 내 자지를 꽉 움켜쥐며 나를 훈계했다.
"오빠, 이오의 자식이 오빠보다 먼저 죽으면 감당할 수 있어?"
"...글쎄. 그것 또한 이번 일로 겪어봐야 알지."
인간 여인을 임신시키고, 반신이 태어난다.
나는 그 아이를 과연 어떻게 생각하게 될까.
티탄 신처럼?
아니면 반려동물처럼?
...후자면 조금, 진심으로 소름이 돋을 것이다.
전생에 인간이었던 내가 인간을 키우는 애완동물의 죽음처럼 받아들인다면, 그건 내가 어느새 누구보다도 가장 '티탄'다워졌다는 이야기니까.
오랜 세월을 살아서 그런 걸까.
벌써 수백 년도 넘는 시간을 살아와서 그런 걸까.
나는 '제우스'가 되어가고 있었다.
인간이 아닌.
한 때는 인간이었던.
티탄.
주신, 제우스.
...인간을 개처럼 존나게 따먹은, 강간마 제우스.
"그럼 오빠, 준비됐어?"
"그래."
나는 헤라와 함께 지상을 내려다봤다.
"영웅적으로 죽을 차례다."
인간, 쥬피터.
아르고스를 상대로 감히 이오를 되찾기 위해 맹렬히 싸우나, 격렬한 전투 끝에 아르고스에게 패배하여 죽었다.
"아참, 오빠. 나 씻고 올게."
"뭐? 씻고 온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이오 보지로 단련된 테크닉을 보여줄게. 후후."
"......."
헤라는 이류 보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