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우스 엑스 마키나-121화 (121/235)

EP.121 유희의 끝 (4) 끝은 새로운 시작

한 아이의 어머니가 되는 건 분명 쉬운 일이 아니다.

아이를 위해 헌신하고, 또 아이를 우선으로 생각하며 모든 것을 바쳐야 하는 순간이 있다.

대부분의 여인은 원하는 아이를 낳아 행복하게 산다.

아이가 말썽을 일으키는 경우는 있어도, 사랑으로 감싸안을 정도라면 뭐든지 다 괜찮다.

하지만 원하지 않는 아이라면 어떨까?

사랑하는 남자의 아이가 아니라면 어떨까?

"마-아!"

이오는 복잡한 얼굴로 찬란한 금발의 아이를 쓰다듬었다.

자신을 닮은 금발.

자신을 닮은 얼굴.

하지만 '그'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이국적인 외형도, 곱슬거리던 머리칼도, 그 무엇도 아이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었다.

사랑하는 남자.

사랑하게 된 남자.

첫 만남은 정말이지 끔찍했지만, 알아갈수록 더 사랑이 깊어진 남자.

자신을 위해 신이 부리는 괴물에게 목숨을 걸고 덤볐을 정도로 자신을 소중히 여기던 남자.

그저 자신을 대하는 방법이 여인으로써 다소 상처를 받는 방법이었을뿐, 그는 분명 좋은 남자였다.

좋은 사람이었다.

잊고 싶지 않은, 여전히 품속에 안고 싶은 남자였다.

떠나보내고 싶지 않고, 아직도 그가 죽었다는 것이 실감나지 않는다.

그의 흔적이 없기 때문에.

아르고스 왕국에 더이상 자신이 사랑하던 남자의 흔적은 없다.

-그 자가 쓰던 모든 것을 불태워라. 제우스 신께서 노하셔서는 안 된다!

남자는 마치 존재가 지워진 듯 사라졌다.

아르고스 왕국에 왔던 적이 없던 것처럼, 그는 자신이 살아서 돌아왔을 때는 이름조차 부를 수 없는 자가 되었다.

-이오야! 제우스 신이 분노하실 수 있다. 그 자는 잊거라.

-네 자식은 제우스 님의 자식이란다. 잊지 마렴. 네가 잘못하면 우리 모두가 제우스 님의 벌을 받아.

원하지 않는 아이였다.

그의 아이는 원했어도, 제우스 신의 아이를 원한 적은 없었다.

그러나 이오는 낳아야했다.

낳음을 강요당했다.

기름을 강요당했다.

배 아파 낳은 자식이 자신이 사랑하는 이의 자식이 아니건만, 그녀는 그의 흔적이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아이를 자신의 아들로 키워야만 했다.

씨를 뿌린 이가 제우스라는 이유로.

아이에게 젖을 물리고.

아이가 칭얼거리면 안아주고.

너무나도 싫었지만, 어머니로서 해야할 일들은 그녀에게 숙명이 되었다.

한 때.

나쁜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신의 아이라고 해도 결국 자신의 아이.

내 배 아파 낳은 자식이니, 아이의 운명을 내 손으로 끝낼 수 있을까.

하지만 그녀는 마음을 먹고도 시도조차 하지 못했다.

아니, 시도를 하려고 하기는 했다.

그러나 시도를 하지 못했다.

어째서일까.

"마-아!"

아이가 자신을 바라보며 활짝 웃는 모습에서, 그의 모습이 보이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아이의 미소에서 그가 마치 자신을 향해 '이오'라고 부르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고, 아이는 시간이 가면 갈수록 그와 점점 겹쳐보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아이를 기르며, 이오는 익숙해져갔다.

그의 여인이 아니라.

그와 사랑을 나눈 아르고스의 공주가 아니라.

제우스 신의 아들, 에파포스의 어머니로서.

여인이 아닌 어머니로서의 삶을 강요받았으나, 아이를 위해 어머니로 살기로 마음먹었다.

마음 속에 여자로서의 사랑을 묻은 채.

그렇게 살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그런 마음조차 불경했던 것일까.

아니면 헤라 여신은 감히 제우스의 아들을 낳았다는 것 자체에 불만을 가져서 속삭인 것일까.

"이오."

달빛이 유독 더 희미한 밤.

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고요한 밤에, '그'가 찾아왔다.

"이오."

위대한 존재는 마치 '그'가 사랑을 속삭이듯 말했다.

이오는 한낱 인간 따위의 마음을 철저하게 짓밟으려는 듯한 위대한 존재의 말에 울컥했다.

"이오."

위대한 존재의 목소리에 불쾌감이 깃들기 시작했다.

진짜로 화가 나는 건 누군데.

진짜로 화를 내야할 사람은 누군데.

어째서 '저것'은 마치 그가 자신을 부르던 때처럼 부른단 말인가!

"위대한 존재시여, 저는-"

"미안."

"...에?"

사과를 했다.

사과?

올림포스의 주신이 한낱 인간 따위에게 사과를?

자신의 귀가 잘못된 걸까? 이오는 고개를 들었다.

"어쩌다보니 너를 가지고 놀게 되었는데, 미안하다. 나도 내 입장이라는 게 있거든."

"아, 아, 아아...."

그가 있었다.

그가 보였다.

여전히, 그와 같은 무뚝뚝하지만 상냥한 목소리로 눈앞에서 말하고 있다.

"내가 쥬피터다, 이오."

그는 스스로를 쥬피터라고 말했다.

* * *

"너무...하세요."

"시원하게 욕 박아도 되는데."

"개새끼."

"......."

나는 이오의 욕에 혹시나 헤라가 들었을까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누가 감히 제우스를 상대로 개새끼라고 욕을 박을 수 있겠는가.

그만큼 이오가 억울하고 분노했다는 말이지만, 나는 그녀를 내 품에 안고 토닥이며 진정시킬 수밖에 없었다.

"미안하다. 인간을 상대로 욕정을 품어본 건 처음이라서."

이오에 관해서는 전적으로 내가 잘못했으니까.

"처음에는 인간을 그저 체험해보고 싶다는 생각 뿐이었다. 그러다가 너를 만났고, 너를 보자마자 범하고 싶어졌다."

"......왜요?"

"이렇게 크고 예쁜 가슴은 올림포스에서도 보기 힘든 가슴이거든."

나는 이오의 가슴을 움켜쥐었다.

"가슴의 신이 있다면 너로 만들고 싶을 지경이야. 알아?"

"...가슴의 신이라니, 정말."

이오는 허탈한 목소리로 자신의 가슴에 손을 올렸다.

"많은 사람들이 믿지 못할 거예요. 제우스 신께서 고작 인간의 가슴 따위에 욕정을 품으셨다는 게."

"가슴 따위라니. 가슴이 얼마나 위대한 건데. 여자에게 3가지 중요한 부위 중 하나라고. 알아?"

"3가지요? 다른 건 뭔데요?"

"얼굴, 가슴, 골반. 이거 세 개면 모든 남자가 넘어오게 되어있다고."

올림포스 여신들은 일단 이 세 가지 중 하나라도 부족한 게 없다.

그리고 이오는 골반은 조금 못하더라도, 얼굴과 가슴으로 충분히 상대할 수 있다.

골반도 아이를 낳으면서 살짝 벌어진 느낌이 드는 것이 이전보다 훨씬 더 매력적인 여인이 되었다.

"내가 그 날, 네 가슴보고 그냥 해버리자는 생각이 들었단 말이야. 알겠어?"

"...솔직히 말씀드려서."

이오는 베시시 웃으며 내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저도 쥬피터 님의 그걸 보고...조금 설렜어요."

"그래?"

"살면서 남자의 물건을 본 건 처음이었어요. 그런데 그게 정말, 평범한 사람과는 다르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는...정말이지."

이오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평생 이 사람과 이렇게 해야하나 싶은 생각에 정말 힘들었어요. 하지만...그게 더 좋았죠. 항상 사랑을 나누고 나면 머릿속이 하얗게 물들어서 뭘 어떻게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였어요."

"......."

불쌍한 이오.

헤라에게 자신의 섹스가 도둑맞았다는 것을 그녀는 모른다.

단지 절정의 여운은 남아 그녀를 기쁘게 해줬지만, 이오는 그것만으로도 너무나 행복했던 추억으로 생각해주고 있었다.

"그래. 나도 마찬가지다."

나는 이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는 너를 슬프게 하고 싶지 않았다. 나의 아이를 원하는 네게 배신을 하고 싶지 않았어. 쥬피터에게는 자지가 달려있지만, 아이를 낳게 하는 능력은 없다. 그래서...내가 직접 너를 안기로 했지."

스르르.

나는 순식간에 내 모습을 바꿨다.

"완전히 다른 육체의 존재가 아니라, 내 몸을 쥬피터로 바꾸어 너를 안았단다."

"아...."

"그래서 너는 나의 아이를 가지게 된 거다. 비록 그 과정에서 내가 너를 범했다는 식으로 되어버렸지만, 그게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어."

헤라를 생각하고, 이오를 생각하고, 아이를 생각하고 모든 것을 생각하다보니 벌어진 일이었다.

"미안하다. 그리고 쥬피터를 사랑해줘서 고맙다."

"...아니에요. 저도 이렇게라도 말씀해주셔서 고마워요. 한순간이라도 위대하신 제우스 님을 사랑할 수 있어서, 제 사랑이 결코 엇나가지 않게 해주실 수 있어서. 그리고...."

이오는 자신의 가슴에 손을 올리며 웃었다.

"제 아이를 이제는, 더 사랑할 수 있게 해주셔서."

"......."

인간은 변한다.

여인이었던 이오는 이제 한 아이의 어머니가 되었다.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며 내가 걱정했던 것들이 이제는 조금은 줄어든 것 같아 나는 안심할 수 있었다.

"이오."

나는 이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녀의 이마에 입술을 맞췄다.

"내 아들을 잘 부탁한다. 하늘에서 언제든지 지켜보고 있겠다. 아버지 없이 키우게 해서 미안하다."

"아니에요. 오히려...아이가 위대한 제우스 님이 아버지라고 막되먹게 행동하지 않도록 잘 다독이고 타이를 게요."

티탄이나 인간이나, 나는 같은 면모를 볼 수 있었다.

모성.

어머니는 위대하는 것을.

"그, 제우스 님. 그, 정말 불경한 부탁인데요. 진짜 진짜 불경하기는 한데...말씀드려도 돼요?"

"뭐냐?"

"......혹시나 생각이 나시거든. 혹시나 하고 싶은 날이 있거든. 혹시나, 혹시나 갑자기 제 가슴이 만지고 싶어지시거든."

이오는 입술을 혀로 핥으며 내 손을 자신의 가슴으로 당겼다.

"오늘 같이 달이 흐린 밤이면, 저를 덮치러 와주세요. 그 날처럼."

"......하나 물어보마."

나는 이오의 가슴을 들며 입술을 가까이했다.

"제우스로서 범해주기를 바라는 것이냐?"

"......제우스 님께서 범하시겠다면 제가 어떻게 거부하겠어요? 하지만. 그."

이오는 얼굴을 붉히며 작게 속삭였다.

"저는 그 이가 더 좋아요...."

어차피, 자지는 같았다.

* * *

"헤라."

"응."

"에파포스, 너무 미워하지 말아다오."

나는 헤라를 내 허벅지에 무릎베개를 해주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녀는 나를 이고 느긋하게 내 손길을 즐겼다.

"내가 에파포스를 왜 싫어하겠어. 오빠 아들인데."

헤라는 고개를 내쪽으로 돌린 채, 내 자지를 손가락으로 톡톡 건드리며 장난을 쳤다.

"딱히 아들이라고 질투하는 것도 아니야. 가슴 때문에 질투하는 것도 아니야. 덕분에 오빠가 나를 더 신경써주는 것 같아서 고맙기만 한 걸."

"...다행이네."

"오빠, 우리 또 하나 새로운 거 해볼래?"

"새로운 거?"

"응."

페니키아 왕국.

에우로페라는 한 아리따운 여인이 태어났다.

그 아이는 아기 때부터 여신을 닮은 듯한 아름다움을 가지고 태어나 많은 이들을 놀라게 했다.

마치, 헤라와도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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