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27 에우로페 (6) 암운
왕가를 이룩하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고대 시대에는 민주적으로 투표를 받아서 왕이 될 필요도 없다.
강력한 남자가 왕이 되고, 압도적인 힘으로 누구도 감히 왕의 권위에 도전할 수 없게 만든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의 지지와 충성심을 받게 된다면, 나는 크레타의 진정한 왕으로 군림할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사람들로부터 진심어린 충성심을 얻을 수 있을까?
사람은 어떤 일이 있을 때 그 사람을 지지하고 믿을 수 있을까.
위험에서 지켜줄 때.
나는 인간들을 수없이 지켜본 결과, 그 방법을 터득했다.
끄어어어엉!
미친 황소가 마구잡이로 날뛴다.
농가를 마구 파헤치고, 사람을 향해 들이받는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위협하고 공격하고, 심지어 황소를 잡기 위해 온 병사들을 상대로도 머리를 들이받아 다치게 만든다.
"아니, 저 미친 황소는 어디서 나타난 것이오?"
"그게 중요해? 왕은 어디서 뭘 하고 있길래 황소 하나 날뛰는 걸 제압하지 못해?!"
"으아악! 황소의 발에서 전기가 뿜어져나온다! 미친 괴수다!"
황소는 크레타 섬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다.
공포에 질린 사람들은 위기를 해결해줄 해결사를 원했고, 국왕은 나라에 닥친 위기를 해결하지 못했다.
이제, 내가 그것을 해결할 차례.
"제우스의 이름으로!!"
퍼억.
나는 황소를 쓰러뜨렸다.
청도의 소싸움을 하듯, 힘으로 황소의 목을 졸라 쓰러뜨렸다.
"오오, 이방인이 미친 황소를 쓰러뜨렸다!"
"이방인, 대단해!"
크레타 섬의 주민들은 나의 힘에 찬사를 보냈다.
나는 전투형 카우섹스를 쓰러뜨려 크레타 섬의 모든 이들에게 선망을 받았다.
"그를 왕으로 추대하자!"
"오오, 이방인이 우리의 왕으로!"
"누가 와도 우리를 지켜줄 거야!"
"제우스 신이 보낸 영웅이야!"
정작 전투형 카우섹스를 보낸 자가 제우스 신이라는 것도 모른 채, 크레타 섬의 주민들은 환호성을 내질렀다.
당연히 바람잡이를 일부 꽂아뒀다.
내가 미리 포섭한 인간-플레이야스들이 마치 크레타 섬의 주민인 것마냥 바람을 잡았고, 분위기에 휩쓸린 크레타 섬의 주민들은 이방인인 나를 지도자로 추대하려고 했다.
"그건 안 될 말이오!"
하지만 당연히 나라는 이방인에 대해 기존의 지도자는 강한 불만을 드러냈다.
자기 권력이 순식간에 내게로 넘어오게 생겼으니, 불안감을 내비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고작 미친 황소 하나 죽였다고 왕이라니! 언제부터 왕의 자리가 그렇게 우스워졌지?!"
"그 황소도 처리 못한 남자가 지껄이는 것 치고는 우습구나."
"뭐라?!"
"백성들을 위해 스스로 검을 들지도 못하는 자여. 앞에 나서지도 못하는 용기 없는 자여. 분명 꼬추도 손가락 한 마디보다 작겠지. 왕으로써 군림하고 싶으면 사람들을 지키든가!"
"이, 이 놈! 나를 모욕하다니, 결투다!"
뎅겅.
나는 왕을 죽였다.
"백성들을 지키지 않는 왕 따위, 죽어 마땅하다."
겁쟁이를 죽이고 그의 자리를 차지했다.
진정한 왕이었다면, 목숨을 걸고서라도 황소를 죽이려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러지 않았다.
나의 추억이 깃든 마음의 고향에 이런 국왕이 지배한다는 것을 도저히 넘어갈 수 없었다.
"지금부터 내가 크레타의 왕이다! 이제부터 나를 왕 아스테리오스라고 불러라."
"""와아아아!!"""
사람들은 열광했다.
사실 사람들은 끄나풀로 심어둔 플레이야스들의 광기 어린 환호성에 자신도 모르게 이끌려 따라서 손을 들었을 뿐이다.
진정으로 나를 국왕으로 지지한다기보다는, 기존 왕에 대한 반감과 나에 대한 기대감으로 일단 함께 손뼉을 칠 뿐이다.
앞으로 내가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사람들의 반응이 달라지겠지.
하지만 나는 이미 하나의 거대한 집단을 성공적으로 만들어 본 남자다.
'올림포스 왕국의 1대 국왕 제우스 님이 경력있는 신입 왕으로 다시 오셨다 이 말이야.'
뭐든지 해본 사람이 잘하는 법.
"이 섬, 크레타 섬은 진정한 크레타 왕국이 될 것이다! 모두 축배를 들어라!"
축제로 크레타의 백성들을 현혹하고, 멀리서 잡아온 사냥감을 풀어 호감을 얻는다.
"내가 지배하는 동안 홍수가 일어나는 일이 없을 것이다!"
"오오, 진짜 홍수가 없어! 아스테리오스 왕, 대단해!"
"포세이돈께서 굽어살펴주시는구나!"
제우스는 넵튠과 했다.
"나의 치세, 흉년은 없을 것이다!"
"오오, 엄청난 수확입니다! 대단해!"
"데메테르 여신께 감사를!"
제우스는 데메테르와 했다.
"적군입니다! 왕이시여, 해적들이 섬을 습격하려고 배를 몰고 오는 중입니다!"
"위대한 제우스 신을 기리기 위하여, 기도를 올려라!"
번쩍!
"마른 하늘에 벼락이 떨어졌다!"
"해적들의 배가 침몰했다!"
"아스테리오스 왕이 제우스 님께 기도를 올렸어! 제우스 님이 들어주신 거야!"
"제우스! 제우스! 제우스!"
그리하여 나는 제우스 신이 비호하는 위대한 자가 되었다.
모든 신들이 나를 위해주는 존재!
나는 크레타 섬의 진정한 왕이 되었다.
그리고 나는 왕가를 만들기 위해 선언했다.
"오오, 아름다운 그대여! 나는 그대를 나의 아내로 맞이하고자 하오!"
크레타 섬에는 누구보다도 아름다운 미녀가 있었다.
미녀는 이제 걸음마를 뗀 아이들을 셋이나 데리고 있었다.
"...저는 이미 아이를 셋이나 가진 여인이랍니다."
"더 좋군! 그대의 아이들을 내가 자식처럼 여길 것이오. 나의 아내가 되어주시겠소?"
나는 과부인 여인을 내 아내로 맞이했다.
늠름한 사내 아이 셋은 나의 양아들이 되었고, 나는 과부 여인을 크레타의 왕비로 받아들였다.
"그대의 진짜 이름이 무엇이오?"
"...밖에는 알리지 마셔요. 저는 사실...."
페니키아의 공주, 에우로페!
상상도 못한 정체.
그녀의 배경은 진심으로 충격이었다.
그리고 더욱 충격적이었던 것은 그녀가 가진 아이들의 실체.
"저는 제우스 신의 아이를 낳았답니다."
"뭐라고?!"
"무려 셋이나요."
"셋 다!"
충격.
나는 그만 정신을 놓아버릴 뻔 했지만, 위대한 제우스 신의 아이들의 양부가 되었다는 것이 너무 기뻤다.
"위대한 제우스 신의 비호를 받는 내가 아이들의 양부가 되는 것은 당연지사! 제우스 신이시여! 제가 부디 당신의 아이들의 양부가, 대부가 되는 것을 허락하여 주십시오!"
번쩍!
"아아, 제우스 님...!"
"제우스 님이 허락하셨어! 아스테리오스 왕을 아이들의 아버지로 인정하신 거야!"
당연하지.
내가 내 아이들의 적법한 아버지가 되었으니.
비록 제우스가 직접적으로 아버지 노릇을 할 수는 없어도, 제우스의 혼이 깃든 플레이야스로 아이들을 기르면 되는 일 아니겠는가!
그리하여 크레타 왕가는 만들어졌다.
백성들은 누구보다도 강한 나의 힘에 두려워했다.
아이들은 장성하며 잘 자랐고, 나는 에우로페와 함께 크레타 왕국을 잘 이끌어나가며 아들들을 기르는 행복을 만끽했다.
그렇게, 행복은 영원할 것만 같았다.
* * *
"참으로 멀리도 왔구나."
한 여인이 조용히 신전처럼 생긴 곳으로 들어왔다.
금발의 여인은 정면으로 당당히 신전 안으로 들어갔으나, 신전을 지키는 그 누구도 여인의 움직임을 눈치채지 못했다.
스르르.
여인이 손을 올리자 신전 주변에서 스산한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신전을 지키던 병사들은 비명과 함께 호각을 불렀다.
"괴물이다!!"
스스스.
땅에서 솟아난 괴물들은 신전을 지키는 병사들을 순식간에 잡아먹었다.
여인은 괴물들이 주변을 청소한 것에 만족하며 신전 한 가운데에 있는 금빛의 관을 열어젖혔다.
"이것이구나."
여인은 관속에 파묻힌 여인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비록 인간으로 태어났으나 신의 정기를 받아, 결국에는 이 먼 남쪽 땅에서 신으로 추앙받은 여자. 그래, 네가 이오...아니 이시스렸다."
여인은 여인, 이시스의 몸을 쓸었다.
"영혼은 빠져나갔구나. 필히 올림포스에서 그 아이의 인정을 받아 여신으로 다시 태어났겠지. 그러나 육신은 이 땅에 남아있으며, 이 몸은 신의 아이를 가졌던 몸. 아아, 옅지만 여전히 그 아이의 흔적이 남아있어."
여인은 유리병을 하나 꺼냈다.
"내가 손수 저 멀리 유럽...이라는 땅을 돌며 얻은 그의 정기다. 비록 인간의 육신으로 화한 상태에서 얻어낸 것이나, 이것 또한 신의 산물이 틀림없지. 또한 이 땅의 존재들로부터 신성을 얻기도 하였으니."
스르르.
여인은 이시스의 육신에 유리병 속 하얀 액체를 부었다.
비쩍 마른 이시스의 육신이 점차 살이 돋아나듯 생기가 돌기 시작했고, 여인은 아랫입술을 깨물어 피를 만들었다.
"복수를 위하여. 세계의 흐름을 바로잡기 위해. 너는 나의 권속으로 다시 태어날지어다."
스르르.
여인은 생기가 불어나는 이시스를 향해 두 팔을 벌리며 웃었다.
"네 몸에 있는 마지막 생기를 내가 가져가마."
여인은 품에서 뿔을 하나 꺼냈다.
마치 염소의 뿔과도 같은 것은 불길하게 검은 기운을 뿜어내기 시작했고.
푸화아악!
여인은 이시스의 심장에 염소의 뿔을 꽂았다.
이시스의 몸은 다시 순식간에 말라비틀어지기 시작했다.
이시스의 몸에 남아있던 생기는 모두 염소의 뿔에 깃들었고, 여인은 뿔을 뽑아내며 뿔을 사랑스럽게 쓰다듬었다.
"이걸로 충분해. 후후, 기다려라. 제우스."
여인은 뿔을 볼에 비비며 황홀한 미소를 지었다.
"너를 위한 강인한 대적자를 보낼 것이니."
샐쭉.
여인은 뿔을 자신의 하복부 가까이까지 내리며 웃었다.
"내가 직접, 낳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