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30 거대한 위협 (3)
과거.
구 인류는 특별한 수명이 정해져있지 않았다.
짐승과 달리 티탄과 비슷하게 생긴 인류는 노화는 있어도 노환으로 인한 사망은 없었다.
대부분 노인이 되면 더이상 스스로 움직일 수 없게 되고 자식들과 후손들에게 민폐가 되는 걸 방지하고자, 노인들은 아주 편안한 방법으로 스스로의 죽음을 선택했다.
현대의 인류는 수명이 정해져있다.
평균 60년을 살면 오래 살았다고 할 정도였고, 판도라의 상자 이후 온갖 병을 앓게 된 인간들은 신체가 노화됨에 따라 노환으로 죽게 되었다.
그 외에도 온갖 종류의 병으로 사망하는 일이 비일비재했고, 인류는 수명이 정해진 종족으로 변했다.
그렇다면 님프는 어떤가?
님프는 따로 수명이 정해져있지 않다.
기원이 어떤지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으나, 티탄 신들 중에서도 님프로 태어난 자들이 있는 만큼 딱히 수명으로 죽거나 하지 않는다.
이들이 죽는다면 신에게 살해당하는 일 뿐.
자연의 일부에서 파생된 요정인 님프가 죽는다면, 그건 님프조차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신의 개입이 있기 때문이리라.
내게는 깊은 관계를 맺은 님프가 있다.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님프가 있다.
아말테아.
머리에 염소의 뿔이 달린 그 님프.
나의 유모이자, 나의 첫경험 대상이자, 내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큰 힘이 되었던 님프.
올림포스를 연 이래, 나는 그녀를 올림포스로 데려가고자 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걸 거부했다.
자신은 가이아의 권속이며, 님프가 올림포스에서 제우스의 총애를 받으면 여신들이 불편해질 수 있다는 이유로 올림포스로 찾아가기를 거부했다.
그리고 그 뒤로 나는 아말테아를 만날 수 없었다.
레토의 건으로 가이아와 대립을 한 이후.
나는 가이아의 영지로 찾아갈 수 없었다.
가이아의 영지로 간다는 것은 가이아와 전쟁을 치른다는 것이었고, 아직은 가이아를 상대로 대놓고 전쟁을 치르기에는 여러모로 난감했다.
그래서 나는 아말테아를 직접 만날 수 없었다.
하지만 님프가 죽는 게 아니니, 언젠가는 다시 만날 거라고 학수고대했다.
그리고 소식 정도는 주고받을 수 있었다.
어머니 레아는 올림포스와 가이아의 영지를 자유롭게 오다닐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고, 나는 그녀로부터 아말테아의 소식을 간접적으로 전해들었다.
사망.
예고도 없이 전해진 소식이었다.
갑작스럽게 가이아의 영지에서 들려온 아말테아의 사망 소식에 나는 정말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 세상에서 내가 처음으로 겪은 누군가의 죽음이었다.
시신이라도 확인했으면 좋으련만, 가이아는 아말테아를 내게 보여주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그녀가 죽었다고 생각했다.
죽은 것으로만 알고 있었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아말테아인데."
아말테아일까?
아닐까.
가슴은 이전보다 훨씬 더 커져서 머리보다 더 커졌고, 전차가 덜커덩 거릴 때마다 출렁거린다.
더 아름다워지고 더 색기가 넘치게 변했지만, 아말테아가 아니라고 한다면 그건 그거대로 믿을 수 있을 지경이었다.
'나의 아말테아는 저렇지 않아!'
누구보다도 상냥하고 인자했던 여자다.
결코 누군가를 따먹겠다는 식으로 저렇게 야릇한 표정을 지을 여자가 아니다.
그리고….
- 덤벼라! 나는 위대한 서풍의 신, 제피르스! 나는-끼에에엑!
찰싹, 찰싹.
티탄 남신을 저렇게 채찍으로 사로잡아 쓰러뜨릴만큼 강한 존재도 아니었다.
강하기는 했지만, 그녀가 가이아의 총애를 받을 정도로 대단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저 정도로 강력하지 않았다.
일단은 님프였던 아말테아가 순수하게 헬리오스를 쓰러뜨릴만큼 강하다고 할 수도 없었다.
헬리오스 뿐만 아니라, 다른 티탄 신들도 마찬가지.
"티폰은 현재 제우스 님을 노리고 올림포스로 오고 있습니다."
아폴론의 말과 함께 본격적인 대책 회의가 시작되었다.
가이아의 영지로부터 천천히 올림포스를 향해 다가오는 티폰은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모든 것들을 상대로 이겨 노예로 만들었다.
"보시는 바와 같이 헬리오스를 비롯하여 수많은 남자 티탄들이 티폰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속옷바람으로 티폰의 전차를 이끄는 짐승이 되었습니다."
찰싹, 찰싹.
티폰은 채찍을 휘두르며 노예가 된 티탄 신들을 재촉했다.
카하앗…!
그들은 채찍을 맞을 때마다 신음과 같은 비명을 흘렸다.
그에 올림포스에서 노예들의 고통 아닌 고통을 바라보는 모두가 인상을 찌푸렸으나, 지금 당장 도와줄 방법은 없었다.
도와주는 족족 사로잡혔다.
"...남자는 전부 노예로 만들고, 여자는 가차없이 죽입니다."
우리는 플레이야스를 보냈다.
하지만 플레이야스는 티폰의 힘 앞에 무참히 살해당했다.
여자는, 정말 처참하게 살해당했다.
아레스가 플레이야스로 도전을 했으나, 'ㅇ/ㅏ/ㄹ/ㅓ/ㅣ/ㅅ/ㅡ'가 된 이후로 여신들은 차마 당당히 나설 생각을 못했다.
"아르테미스의 저격도 실패했습니다. 티폰은 화살을 손으로 붙잡았고, 사로잡은 플레이야스를 방패삼아 화살을 막기도 했습니다."
"...알겠다. 그녀가 노리는 것은 결국 나라는 거군."
모든 남자들을 지배하겠다.
그런 의지를 보이고 있다.
"그런데 왜 저 놈들은 지들이 달려들어서 노예가 되는 거야?"
"그, 그게."
"...아무래도 티폰을 보고 범하려고 한 듯 합니다."
티폰은 주변 님프들을 건드리지 않았다.
덕분에 헬리오스가 요격당했을 것 같은 위치로 급히 헤르메스를 파견한 우리는 그곳에 있던 살아남은 님프들로부터 정보를 입수할 수 있었다.
"헬리오스가 티폰을 보자마자 따먹으려고 했고, 티폰은 그런 헬리오스를 잡아서 노예로 삼은 것이지요."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헬리오스를 쓰러뜨린 티폰을 쓰러뜨리면 자신이 티폰을 취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지는 몰라도, 티폰에게 덤볐다가 모두 저렇게 되어버리고 말았죠."
"...하긴, 범하고 싶을 만큼 매력적이긴 하군. 하지만 저건 아니지."
상대를 봐가면서 덤벼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도 덕분에 티폰이라는 저 여자의 싸움 방식을 알아냈다."
채찍을 주 무기로 활용하는 여자.
살짝 무섭기는 하지만, 그래도 올림포스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을 가만히 두고 볼 수는 없다.
"모두, 올림포스에서 잠시 피신해라."
"예?!"
"명령이다."
나는 올림포스의 모두에게 지시를 내렸다.
"저 여자는 내가 전력으로 상대해야 맞수를 이룰 것 같구나. 그래, 크로노스를 상대하던 때 이상으로 힘을 써야할 것 같다."
"그럼 저희도-"
"내가, 전력으로 싸워야 할 것 같다."
나는 아스트라페를 들어 원탁에 놓았다.
"넵튠! 하데스! 너희들은 여신들을 데리고 언제든지 도주할 수 있게 지켜다오. 한 명도 빠짐없이 내 지시를 따라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직접 기절시킬 것이다."
"어째서 그렇게까지 하시는 겁니까?"
"내가 혹시나 패배했을 때를 대비하기 위함이다. 나는 내 여자들이 범해지는 것을 못 본다."
나 스스로 패배라는 단어를 입에 담자, 여신들의 분위기가 착 가라앉았다.
"티폰이 남신들을 저렇게 노예처럼 데리고 오는 이유가 무엇이겠느냐? 만약 제우스를 잡는다면, 티폰은 내게 최고의 굴욕을 보여주겠지. 그래, 내 여인들이 저 노예들에게 강간당하는 것을."
저 여자의 눈에는, 그것이 보인다.
그래.
'독점욕.'
가이아가 나를 바라보던 그 눈빛과 비슷하다.
* * *
"후후, 어리석은 남신들이여. 나약하구나."
가이아의 영지.
가이아는 옥좌와도 같은 의자에 느긋하게 앉은 채 뭔가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어떤 '뿔'이 하나 들려있었다.
누군가의 머리에서 뽑혀진 듯한 뿔에는 신의 힘이 충만하게 깃들어있었고, 가이아는 그 뿔을 이리저리 만지며 야릇하게 웃었다.
"우라노스가 그렇게 된 이후, 억겁의 시간을 홀로 지내왔다."
가이아의 앞, 땅에는 넓은 환상이 펼쳐져있었다.
마치 멀리 있는 누군가의 시야가 눈앞에 아른거리는 것처럼, 가이아는 흔들거리는 시야 너머에 보이는 올림포스 산이 보였다.
"제우스, 너는 내 걸작이다. 크로노스를 쓰러뜨린 이후, 네가 보여준 행보는 정말이지 사랑스럽고 애틋했어."
가이아는 자신의 손으로 입술을 핥았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직접 제우스와 하지 못했지만, 이제는 본색을 드러낼 때.
"너는 나와 몸을 섞었지. 알고 있느냐? 아주 어렸을 때부터, 나는 아말테아의 몸에 깃들어 너와 사랑을 나누었단다."
가이아의 숨결이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너는 그걸 알고 있었어. 나와 할 때면, 유독 더 거칠게 대했지. 아아, 그래. 너는 누구보다도 인정이 가득하지만, 너는 누구보다도 가장 티탄스러운 아이야. 나는 너의 가능성을 보았다. 플레이야스. 그래, 너의 파멸적인 강간을 보았어."
가이아는 생각만으로도 짜릿한 듯 몸서리를 쳤다.
"나는 진리를 깨달았다. 티탄의 법도는, 남자가 여자를 강간하는 건 진리가 아니었어. 그래. 너는 나에게 그것을 가르쳐주었다. 진리는...."
츄릅.
"약육강식."
가이아는 두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만지작거리며, 터져나오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강자가 약자를 범한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자연의 진리였지. 그래,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것을 네가 깨우치게 했다. 그러니 그 보답으로...너를 따먹으러 간다. 나의 제우스. 나의 유피테르."
가이아는 떠올렸다.
그간, 제우스가 안았던 수많은 여인들을.
그들 중에는 자신의 혈통도 있고, 딸도 있었지만....
"...용서 못 해."
오직 자신만 제우스와 하지 못했다.
그러니.
"아아, 제우스. 너와 내가 새로운 세계를 만드는 것이다. 모든 것이 운명으로 정해진 세계를. 지금의 티탄을 모두 타르타로스에 처박고...오직 너와 나만이 신으로 추앙받는 새로운 세계를 만드는 것이야."
가이아는 멀리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을 제우스를 향해 두 팔을 벌렸다.
"판을 새로 갈자꾸나, 나의 유피테르."
* * *
"넵튠, 하데스. 너희에게 맡긴다."
"...알겠습니다, 제우스 님."
"부디 승리를."
나는 나 다음으로 가장 강한 둘에게 여신들을 맡겼다.
이들 또한 적이 얼마나 강한 지 알고 있다.
그래서 크로노스와 맞서 싸웠던 때처럼, 이들도 나와 함께 싸우기를 바랐다.
하지만 이번은 다르다.
강한 존재일수록 티폰의 강함을 체감하고 있기에, 이들은 군말 없이 내 지시를 따라 여신들을 데리고 올림포스를 떠났다.
"...강하지만, 나만큼은 아니야."
나는, 섹스를 할수록 강해졌다.
올림포스의 모든 여신들이 힘을 합해도 대적할 수 없을만큼 강해졌다.
넵튠과 하데스도 둘이서 나를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지금의 내가 과거로 돌아가 크로노스를 만난다면 손가락 하나로 가지고 놀 수 있을 정도로.
그리고 상대인 티폰은 나만큼, 강력하다.
세계의 최강자 둘이 싸우게 되었으니, 나의 것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울 뿐.
"와라, 티폰."
아니, 가이아.
"할매젖 주제에 감히 나를 따먹으려고 하다니. 용서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