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우스 엑스 마키나-134화 (134/235)

EP.134 반격의 서막 (2)

내가 죽기 전, 나는 금발벽안의 미녀와 원나잇을 하다가 죽었다.

어쩌다가 원나잇을 하게 되었냐하면,

술을 마시다가 눈이 맞아서 모텔로 갔다.

그렇다면 어쩌다가 모텔로 갔느냐.

성을 주고 샀나?

그건 아니다.

안 해본 건 아니지만, 적어도 그녀를 꼬셨을 때 나는 당당히 입을 털어서 모텔로 데리고 들어갔다.

제우스 시절, 그러니까 지금의 나는 명명백백 쓰레기가 맞다.

레아부터 시작해서 다른 남자의 여자를 빼앗고, 수많은 여인의 처녀를 앗아갔다.

내가 한국에 있을 때부터 이랬냐?

전생에도 올림포스, 그리스에서 하던 것처럼 하고 다녔냐?

그건 아니다.

나는 그냥 평범한 한국의 남자였고, 그냥 평범한 대학생이었다.

오히려 모범적이라고 할 수 있는 학생일 뿐이었다. 그다지 성실하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성기는 실해서 마음에 드는 여자를 상대로 껄떡거리는 그런 놈이었다.

많이는 아니었지만 이 여자 저 여자 사귀어보기도 했고, 마지막으로 사귄 여자는 반년 가까이 사귀기도 했다.

그런데 차였다.

정확히는 내가 차고, 차였다.

별로 유쾌한 기억은 아니다.

잘못은 그년이 먼저 했으니까.

반년 가까이 사귀었는데, 여름 방학 중에 잠시 아는 친구랑 같이 둘이서 내일로 여행을 갔다고 했다.

자꾸 그년이라고 하면 어감이 좀 그러니, 여자친구로 사귀었던 여자를 '여정원(가칭)'이라고 하자.

이 여정원이라는 여자의 실체를 알게 된 건 축제 이후 남자들끼리 모였던 술자리였다.

2차, 3차를 지나 자취방에 모여 술을 마시던 때.

나는 친구의 친구와 술을 마시게 되면서 여정원에 대해 알게 되었다.

-야, 너희 학과에 얘랑 아는 사이냐?

-와, 씨발. 세상 더럽게 좁네. 내가 김천 근처에 놀러 갔을 때 얘랑 다른 여자애랑 둘이서 만났거든?

-존나 잘하더라. 방학 때마다 이거 하나 봐. 키킥, 누구는 일본으로 원정 나가는데 얘는 국내 원정을 뛰네.

-......여자친구라고?

거기서 돈이 부족했는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당사자는 그 친구가 자신을 꼬드겨서 한 번 잘못했다고 했지만.

-와, 정원이 창녀였네?

알고 보니 나 몰래 그런 짓을 하고 다니는 여자였다고 하더라.

한두 번 한 게 아니고, 여름 여행 이후로 제법 여러 번 하고 다녔더라.

-씨발, 어떻게 사람이 그럴 수 있어!

-어쩌다가 한 번 실수한 거라니까?!

-지랄! 네 폰에 이름 적힌 년들 중에 년이 아닌 놈들 다 확인해봤어!

-......아, 씨발. 걸렸네.

심지어 내가 그녀와 처음 한 날, 오전에 이미 다른 남자와 살을 섞었다는 것을 알고 난 뒤에는 토했다.

-너는 나 만나기 전에 클럽 다니고 원나잇하고 그랬잖아! 나랑 만나기 전에도 클럽에서 한 번 만났고!

-나는 최소한 여자친구 사귀면 안 해! 근데 씨발, 너는 나랑 사귀고 나서 여행 갔잖아!!

-아, 어쩌라고! 자지도 작고 섹스도 좆나 못하는 게!

-뭐...라고....

-너랑 떡칠 바에는 크리스랑 마크 불러서 3인종 인류 화합을 하는 게 더 나아!

-

그렇게 헤어졌다.

200일 기념 여행에 대한 플랜은 모두 쓰레기가 되었다. 나의 반년은 창녀에 의해 더럽혀지고 말았다.

바람난 여정원을 상대로 온갖 쌍욕을 퍼붓고, 술에 취하기도 하고 담배도 태워보고 자신을 괴롭혔다.

군대에 지원할까 생각도 해봤다가, 에라 모르겠다 싶어서 지갑에 돈 두둑이 넣고 해운대를 기웃거리다 금발 눈나랑 만나서 신세 한탄을 했다.

그러다 당했다.

이제 와서 드는 생각이지만, 아니 예전부터 든 생각이지만.

-불쌍한 새끼.

-죽을 때 죽더라도 떡이나 치고 죽어라.

-에휴, 씨발. 존나 불쌍한 새끼.

그녀가 나와 떡을 쳐준 건 내가 헤어진 사연이 존나게 기구해서 한 번 대준 것이리라.

언제든지 죽일 수 있었음에도 떡 치고 죽여준 건 좆같지만 나름의 자비에 감사는 한다.

응?

왜 지금까지 이런 얘기를 안 했냐고?

갑자기 이게 무슨 신세 한탄이냐고?

'몰라.'

그냥 그 생각이 나더라.

티폰에게 사로잡혀 계속 정액만 싸지르는 생체 딜도가 되고 나니, 전생부터 시작해서 현생까지 반추하게 되더라.

그래도 전생에 그렇게 데여놓아서 그런 건지, 현생은 나름 내 것을 챙기려고 애쓰며 살았다.

내가 처녀를 가진 여자는 함부로 다리를 벌리지 못하게 만들었고, 내가 빼앗은 여자는 다시는 원래 남자가 생각나지 못하게 만들었다.

앞으로 내 것을 빼앗기지 않겠다.

그렇게 다짐했는데, 티폰에게 잡힌 게 억울해서 그런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는데, 나는 티폰에게 결국 지고 말았다.

아아, 그렇구나.

내가 티폰에게 당하고 있는 모습이 마치 그때의 금발 여자를 보는 것 같아서 기시감이 든 것이다.

교미를 마친 사마귀 수컷이 암컷에게 잡아먹히는 것처럼, 나는 한순간의 쾌락을 즐기고 장렬히 죽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나의 여자들은, 나의 딸들은 내가 모르는 곳에서 남자들에게 당하게 되겠지.

그렇게, 나는 죽....

'을 수 없어.'

죽을 수 없다.

나의 후손, 저 카드모스라는 자가 한 말을 결코 용서할 수 없다.

'이제 더는 빼앗길 수 없다.'

나는 이제 더 빼앗기지 않는다.

남의 것을 빼앗을지언정, 내 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설령 그게 내가 대적할 수 없는 자라고 한들.

아니다.

죽일 수 있었다.

단지, 그게 부족했다.

'죽일 각오가 부족했어.'

티폰이 설령 아말테아를 닮았다고 한들.

가이아의 원한이 깃들었다고 한들.

그녀가 내 딸을, 내 아내를 다른 남자에게 팔아치우는 건 결코 용납할 수 없다.

사내로서.

남자로서.

한 아이의 아버지로서.

한 여자의 남편으로서.

아, 한 여자는 아니라고? 아무튼.

'결코, 여기서 쓰러질 수는 없다.'

움직일 시간이다.

나여.

거기 있지, '제우스'?

함께 싸우자.

나의 것을 지키기 위해.

우리의 것을 지키기 위해.

그를 위해서는 내가 마지막으로 가지고 있던 인간성을 버릴 것이다.

내가 그토록 제우스와는 다르다고 주장했던 나의 정체성을.

버리겠다.

파지지직.

나는 이제 더는 'K-제우스'가 아니다.

"여자를 배려하는 남자와는 잠시간 이별이다."

나는.

올림포스의, 제우스다.

- 남자는 하늘이요, 여자는 땅이라. 그대가 인정하지 않는 그 사상, 나는 너무나도 마음에 들어.

나는.

- 지금부터는, 그대와 함께 싸우리.

'안녕.'

과거의 나와, 이별했다.

* * *

파지지직!!

올림포스의 정상에 푸른 번개가 쳤다.

노예 티탄들이 이끄는 황금마차에 탄 티폰은 올림포스에서 반짝이는 푸른 번개에 입맛을 다셨다.

"역시 그냥은 끝나지 않네."

티폰은 고삐를 잡아당겼다.

"기수를 돌려! 올림포스로 돌아간다! 아무래도 제우스가 한 번 더 내게 따먹히고 싶은 모양이로구나!"

티폰의 말에 남신들은 고개를 조아리며 달렸다.

"어서 달려라! 이번에 제우스를 범하고 나면, 그에게 절망을 안겨주기 위해 여신들을 너희들에게 선물로 주마!"

"오오오오!!"

남신들은 탐욕스럽게 웃으며 달렸다.

그들은 아주 빠른 속도로 올림포스에 도착했고, 티폰은 우아하게 전차에서 내려 올림포스 정상을 향해 발걸음을 옮겻다.

그리고, 그녀는 보았다.

"......어?"

올림포스 신전의 정상에는 한 남자가 있었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하얀 백발을 휘날리며, 명치까지 내려오는 수염을 펄럭이며, 순백의 옷을 입은 이가 두 주먹을 움켜쥔 채 서 있었다.

"당신은...?"

"누구겠나."

중후하게 울려 퍼지는 목소리.

분명 그의 목소리이나, 어딘가 이질적이다.

"나다, 티폰."

"우라...노스?"

"우라노스가 아니다."

남자는, 우라노스를 닮아있었다.

동시에 크로노스도 닮아있었다.

두 주신의 피가 가장 짙게 흐르는 남자.

"나다, 제우스."

"아, 아니야. 너는, 내가 아는 제우스가 아니야...!"

티폰의 목소리가 갈라지기 시작했다.

두 눈은 당황으로 얼룩지기 시작했고, 손끝은 파르르 떨렸다.

"제우스는 어디 있어?!"

"여기에."

백발의 남자, 제우스는 자신의 가슴을 두드렸다.

"이상하구나. 내가 제우스다. 새삼스럽게 뭘 그렇게 놀라는 거지?"

"제우스...아니, 유피테르를 돌려줘!!"

"아아, 유피테르 말인가."

제우스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는 죽었다. 네가 올림포스의 여신들을 도망치게 만든 시점부터, 네가 제우스의 여자들을 강간하겠다고 말한 시점부터 유피테르는 죽었다. 이제 이곳에 남은 건 강한 남신, 제우스뿐."

파지지직.

"내가 크로노스를 상대했을 때도 가졌던 신념이 있지. 아무리 힘이 강하다고 한들, 여자는 패지 말자. 모두가 여자를 자기 깔로 취급하는 이 시대에서, 나라도 여자를 조금이라도 신경 써주고 챙겨주자."

"그, 그래! 그게 바로 유피테르-"

"유피테르는, 죽었다. 내 앞에 있는 건 여자가 아니고, 한낱 괴물일 뿐이다."

제우스의 손에 번개가 반짝이기 시작했다.

"감히 주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괴물은 패야 정신을 차리지."

마치 몽둥이와 같은 형태로 굳어가는 번개에 티폰은 식은땀을 흘렸다.

"어떻게 힘이...?"

분명 이전과 마찬가지로, 올림포스에서 둘이 싸우게 되었는데, 왜 이전과는 다른 느낌일까.

"어, 어떻게 힘을 되찾은 거지...?!"

"힘을 잠시 맡겨놓았을 뿐이다. 나의 딸에게. 나의 전령...헤르메스에게."

제우스는 작은 원반을 하나 꺼냈다.

"헤르메스 덕분에, 한 인간 남자 덕분에 나는 내 힘을 되찾을 수 있었다."

"거짓말! 모든 힘을 빼앗았어! 힘이 솟아나지 않도록 내가 너를 얼마나 착정했는데?!"

"고작 착정 따위로 내 힘을 가져갔다고? 그래, 그렇겠지."

제우스는 입꼬리를 비틀었다.

"근데 그건 유피테르의 힘이고, 제우스의 힘은 아니라는 거지."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말이 된다. 지금까지 유피테르는, 나는 억제기를 달고 있었거든. 그래. '더 케이 유교'라는 것 말이야."

제우스는 검지로 관자놀이를 톡톡 건드리며 티폰을 비웃었다.

"할머니라서 봐줬더니깝치고 있어."

"뭐, 뭐라고...!"

"여성 배려도 없고, 노인 공경도 없다. 그리스의, 올림포스의 존재답게 해결하도록 하지. 주먹으로. 힘으로."

파지지직!!

제우스의 손에서 뿜어져 나온 번개는 마치 낫처럼 변했다.

그래, 스퀴테처럼.

"더 이상의 배려는 없다. 유피테르라는 페미니스트는 죽었다. 여기 있는 남신은 올림포스에서 가장 강한 남신, 제우스."

제우스는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덤벼, 개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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