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43 겨울의 시작 (6)
지금의 데메테르는 미쳐있다.
좋게 말하면 딸을 못보는 슬픔에 빠져있고, 솔직하게 말하면 히스테리를 지구 단위로 부리고 있다.
'진짜 내가 미칠 것 같네.'
데메테르가 올림포스에 가져온 겨울은 상상 그 이상이었다.
수많은 인간들이 굶어죽는 것은 기본이고, 데메테르가 지나간 곳에는 수많은 생명들이 신의 분노로 인해 죽은 일이 허다했다.
가령, 페르세포네(처럼 생긴 나 제우스)가 납치당하는 순간에 대해 물었을 때 하데스가 두려워서 입을 열지 못했던 님프들이 모두 죽음을 면치 못했다.
그들은 땅 속에 영원히 갇히게 되었고, 아무리 나라고 한들 데메테르가 내린 벌에 대해서는 직접적으로 관여하지 못한다.
내가 님프들을 구해주는 건 데메테르를, 그리고 다른 신을 모독하는 행위로 보일 수 있다.
설령 내가 그럴 의도가 없었다고 한들, 이걸 다른 이들이 멋대로 생각하고 오해할 수 있다.
나는 땅에 갇힌 님프들을 뒤로한 채, 명계에 내려와 재판을 받던 이들의 증언을 토대로 데메테르의 방랑길을 추적했다.
"혹시 이 근처를 지나가는 여인을 보지 못했소?"
"여인?"
"그렇소. 금발에 이삭과도 같은 향을 품은 여인이오."
"여인은 없었소. 이곳을 방문한 이라고 하면 늙은 노파 뿐이었소."
"노파도 여인이지 않은가?"
"형씨, 혹시…."
"그런 건 아니고."
혹시나 모를 사태에 대비해 나는 아스트라페를 몰래 움켜쥐고 바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만약 이름을 불러선 안 될 그 이름을 부른다면 당장 아스트라페로 뚝빼기를 깨버릴 각오로.
"등이 굽은 노파가 한 명 있었지. 등이 굽은 채 검은 옷을 두르고 가던 백발 노인이었는데, 자식을 잃었다고 했소."
"저런…."
"그런데 아마 그 여자, 마녀가 아닐까 싶소."
"마녀?"
"그렇소. 노파를 받아준 집이 있었는데, 그 집의 자식이 노파를 놀려서 저주를 받았다고 하더군."
나는 나그네의 말에 따라 저주를 받았다고 하는 집을 찾아갔다.
이미 마녀의 저주 이야기는 널리 퍼졌는지, '미스메'라는 여인의 집 근처에는 수많은 인간들이 모여있었다.
"뭘 봐! 구경났어?! 개자식들, 가만 안 둬!!"
미스메라고 생각되는 여인은 악에 받친 얼굴로 칼을 휘두르고 있었다.
사람들을 향해 휘두르기는 했지만, 그건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게 하려는 위협이었다.
"여기가 그 마녀가 지나갔다고 하는 그곳입니까?"
"당신은 누구요?"
"저는 제우스 님을 믿는 사제, 쥬지우스라고 합니다."
나는 적당한 가명을 두른 뒤, 인파를 가르고 미스메의 앞에 나섰다.
"칼을 거두어주십시오, 부인. 소식을 듣고 왔습니다."
"무, 물러나세요…!!"
"부인."
나는 미스메에게 다가가 그녀의 칼을 맨손으로 움켜쥐었다.
"!!"
당연히 칼날에 손은 베이지 않았다.
나는 미스메가 당황한 사이 잽싸게 방 안으로 들어갔고, 저주를 받았다고 하는 자식을 보고 탄식했다.
'이건 저주가 아니고 그냥 화상인데?'
"......."
소년도 아닌 청년은 얼굴이 붉게 익어있었다.
원래의 얼굴은 거의 남아있지 않았지만, 우둘투둘 일어난 얼굴 피부가 마치 도마뱀의 비늘처럼 생긴 모습이었다.
"저주를 받았다고 들었습니다만, 구체적으로 무슨 일입니까?"
"...그 년이 제가 대접한 죽을 끼얹었어요."
그 년.
나는 그 말에 잠시 심사가 뒤틀렸지만, 일단 한 번 참고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대여. 혹시 그 노파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말해주겠나?"
"...흥."
"말해주지 않겠나?"
"...몰라, 씨발."
청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연히 내 시선은 미스메에게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말씀해주시지요. 아드님이 뭐라고 했길래 마녀가 저주를 내린 겁니까?"
"그, 그걸 왜 물어보는 건데요?"
"저주를 해주하기 위해서는 저주를 걸기 전의 배경을 알아야 합니다. 마녀가 어떤 기분으로 저주를 걸었는지, 저주를 걸 때의 말은 어땠는지. 그걸 모르면 이걸 해주할 방법은 없습니다."
"그, 그게…."
미스메는 우물쭈물하다가 입을 열었다.
"...아들이 말하기를, '죽도 제대로 먹지 못하는데 아들보러 가야하는 거 아니냐'고…."
"허."
내가 있는 곳이 사실은 올림포스가 아니고 잼민이랜드였던 것인가?
나는 상당한 수준급 패드립에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그래, 감탄사다.
인간 중에 나를 순수하게 화나게 만든 인간은 과거 내가 판도라를 보내어 인간들을 전염병으로 죽여버렸을 때 이후 정말 오랜만, 아니 사실상 처음이다.
"알겠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어떤 저주를 걸었는지 알겠군요. 저주를 해주하기 위한 방법을 찾아오겠습니다. 단."
나는 미스메와 그의 아들에게 신신당부를 했다.
"앞으로 3일. 총 3일간 무슨 일이 있어도 문 밖으로 나오지 마십시오. 알겠습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문 밖으로 나오면 안 됩니다."
나는 둘에게 분명한 경고를 남겼다.
그리고 밖에 서있는 이들, 미스메의 자식이 저주를 받았다고 하는 모습을 보기 위해 구경하러 온 이들에게 말했다.
"이 집으로부터 반경 스무 발자국 안으로 접근하지 마십시오. 마녀의 저주가 여러분에게 닿을 수 있습니다."
"히, 히익…!"
주변에 모여있던 이들은 전부 다 흩어졌다.
나는 금방 사라진 이들을 보고 잠시 땅을 두어번 발로 두드렸고, 짐을 챙겨 잠시 자리를 피했다.
"3일? 하, 절대 가만히 못 있지."
화상으로 인해 다쳤으면 그냥 얌전히 집에서 열을 식혀야 한다.
미스메의 아들에게는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죽이 얼굴을 덮어 흉측해졌을 뿐, 고름이 일어나거나 화상으로 인해 죽을 지경은 아니다.
그냥 물을 끼얹거나, 수건으로 얼굴을 덮어주거나, 얼음은 없겠지만 최대한 차가운 물건으로 냉찜질을 하면 된다.
하지만 과연 저들이 내가 정한 '금기'를 지킬 수 있을까?
"인간들은 원래 하지 말라면 꼭 해야 직성이 풀리는 법."
나는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올라 잠시 자리를 잡았다.
'데메테르의 흔적은 확인했다.'
데메테르는 정처없이 걸어가고 있었다.
목적지는 뚜렷하지 않지만, 나는 그녀가 남기고 간 신의 힘에서 잔향을 확인했다.
땅에 남은 그녀의 발자취를, 향을 따라가면 금방 만날 수 있을 터.
지금은 감히 처음보는 노파에게 아들 따라 지옥이나 가라고 한 자에게 얼굴의 화상보다 더 한 벌을 내려야 할 때.
'기다릴 때까지 누구 하나 불러볼까.'
잔뜩 성난 아랫도리 제우스를 위로할 사람을 물색하던 순간.
끼이익.
"와우."
내가 떠난 지 30분도 지나지 않았는데 문이 열렸다.
뭔가 옥신각신하는 걸 보니, 아들 놈이 문 밖으로 뛰쳐나오려고 하는 듯 했다.
"그만둬! 아스칼라보스! 멈춰!"
"병도 아니야! 그냥 얼굴 피부가 이렇게 됐을 뿐이라고! 저주는 지랄!"
쾅!
아스칼라보스라고 하는 청년은 기어이 문 밖으로 나왔다.
주변을 경계하던 이들은 전부 기겁을 하며 삿대질을 했고….
"나오지마! 너, 너 지금 저주를 옮기려고 하는 거지?!"
"저주같은 소리하고 있네!"
"마녀의 저주가 분명해! 미스메, 당장 네 아들을 멈추게 해! 마을 전체를 감염시키고 싶어?!"
"씨발, 좆같은 소리하고 자빠졌네!!"
갑자기 문 밖으로 뛰쳐나온 아스칼라보스의 폭주에 마을 주민들이 모두 기겁을 하며 물러났다.
"마녀의 저주?! 그 딴 거 없다니까! 그냥 얼굴에 죽이 튀었을 뿐이야!"
"아들! 안 돼! 제발, 제발 방 안으로 들어와!"
"꺼져!"
퍽.
아스칼라보스가 거칠게 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미스메는 뒤로 넘어지며 크게 다쳤고, 나는 내 직감이 틀리지 않았음을 눈으로 직접 확인했다.
"애 엄마는 착한데 아들내미가 인성이 개차반이군."
데메테르가 변장한 노파를 집에 들여 친절하게 대접을 해줬겠지만, 거친 성정의 아들이 노파에게 욕을 했다가 호되게 당한 상황이리라.
아무리 쓰레기같은 짓을 한다고 해도 아들은 아들.
데메테르 또한 자식을 가진 어머니이기 때문에, 자신이 당한 모욕을 아들놈의 피부를 뒤집어버리는 것으로 끝냈으리라.
"다음 생에는 한 번 더 모자 관계로 태어나되, 아들 놈은 어머니가 다시 아이 가질 때까지 지옥에서 물 좀 빼야겠어."
나는 아스트라페를 위로 들었다.
나의 의지는 저들의 영혼에 담길 것이며, 명계에서 저들을 심판할 하데스와 페르세포네가 나의 의지를 읽고 적절한 판결을 내릴 것이다.
어머니 미스메에게는 환생을.
아들 아스칼라보스에게는 어머니가 다시 품어주기 전까지 지옥에서 살기를.
그리고 지금은.
"람쥐썬더."
콰과광!!
하늘에서 떨어진 날벼락이 미스메의 집에 떨어졌다.
미스메가 고통을 느낄 새도 없이, 나는 벼락을 조종해 그녀를 고통없이 단숨에 절명시켰다.
하지만.
눈앞에서 모친이 죽는 고통을 한순간이라도 맛보기를.
"체인라이트닝."
파지직.
하늘에서 떨어진 번개는 정확히 아스칼라보스를 관통했다.
나는 두 모녀를 향해 내려진 천벌에 두 손을 모아 합장했다.
"하늘이 벌을 내리신 것이다."
* * *
데메테르의 잔향을 쫓아 가던 중,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한 여신과 마주하게 되었다.
"헤라?"
"걱정되서 내려왔어."
평소보다 다소곳한 차림으로 내려온 붉은 옷차림의 여신은 내 앞에 살포시 한쪽 무릎을 굽히며 인사했다.
"데메테르, 어떻게 설득할 거야?"
"걱정되서 내려온 거야?"
"지금 다들 걱정하고 난리야, 난리."
헤라는 한숨을 푹푹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 추운 '겨울'이라는 것 때문에 다들 고통스러워하는 것도 있지만, 이게 꼭 데메테르가 느끼는 슬픔 같아서 더 안쓰럽더라고."
"그래서 데메테르를 위로하고 설득하려고 쫓아가는 거 아니겠어?"
"설득할 수 있겠어? 데메테르, 지금 상당히 위태위태해보이던데."
"그거라면 다 방법이 있지."
"오빠가 방법이 있다고 할 때면 좀 불안하던데."
헤라는 팔짱을 낀 채 고개를 갸웃거렸다.
"혹시 무지성으로 덮치고 보는 건 아니지?"
"어허. 무지성이라니? 내 사전에 무지성으로 덮치는 건 없어."
"하긴, 그렇지."
"다 생각하고 덮치는 거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말이 안 된다니. 당연히 말이 되지."
이 여자를 범했을 때 과연 내게 피해가 올 것인가, 오지 않을 것인가.
그 판단을 내리고 덮친다면 과연 그걸 무지성이라고 할 수 있을까?
"혹시 내가 덮쳐서 데메테르가 더 빡칠까봐 걱정한 거야?"
"...걱정이 안 된다고 하면 거짓말이지."
"왜?"
"오빠가 제우스니까."
제우스니까.
제우스니까.
그 말이 내 귀에 맴돌기 시작했다.
나는 헤라의 말에 갑자기 멍한 기분이 들었고, 내 뺨을 두드리는 걸로 정신을 차렸다.
"어우, 내가 설득당할 뻔 했어."
"그러니까 말해봐. 무슨 계획이야?"
"간단해."
짝.
나는 몸에 전격을 흘려 신의 힘을 사용했다.
그리고, 나는 변한 내 모습으로 헤라를 향해 단 한 마디를 했다.
"■■."
"......하, 쎅쓰…."
헤라는 코피를 흘리며 엄지를 척 들어올렸다.
잠시 뒤.
나는 헤라와 함께 데메테르가 머무는 것으로 추정되는 인간 왕국으로 향했다.
엘레우시스라고 하는 곳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