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48 마지막 올림포스 가디언 (1)
나 제우스.
은혜를 아는 남자다.
'유교제우스는 은혜를 강간으로 갚지 않지.'
어려서부터 제비의 다리를 고쳐주면 금은보화가 든 박을 가져다 준다는 이야기를 듣고 자랐으며, 구렁이가 여인으로 변해 선비를 잡으려고 하는 걸 과거 은혜를 입은 까치가 구해준 이야기도 듣고 자랐다.
은혜는 갚아야 하는 법.
복수에 복수로 갚고자 한다면, 누군가로부터 받은 건 반드시 보은해야 인지상정이다.
아무리 그 대상이 인간이라고 한들, 아니 오히려 인간이기에 나는 은혜를 갚아야 했다.
그 대상은 인간 영웅, 카드모스.
티폰에게 사로잡혀 죽을 위기에 처했던 때, 티폰에게 강제로 당하여 겁간을 당하고 있던 때, 인간 영웅 카드모스는 내가 티폰으로부터 살아남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나는 그에게 약조했다.
그를 위해서 여신을 한 명 붙여주기로.
물론 여신을 수배하는 과정이 그리 쉽지 않았고, 나는 결국 내가 차선책으로 준비한 방법을 사용했다.
하르모니아.
헤파이스토스가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낸 플레이야스에 나는 여러 신들과 힘을 모아 하나의 생명을 만들어냈다.
티폰을 쓰러뜨리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인간 영웅에게 보답을 하고자 하는 의미라고 하니, 많은 여신들이 올림포스를 지켜준 보답을 위해 저마다 자신의 아름다움을 불어넣어줬다.
덕분에 하르모니아는 수많은 여신들의 사랑으로 다시 태어난 존재가 되었다.
-다 완성했어요, 아버지. ...아버지?
-씁, 아, 아깝네. 막상 주려니까 아까운 걸. 새로 하나 만들까?
-이거 주신다면서요?
-내가 한 번 해보고 싶어서.
정말, 카드모스에게 주기 전에 내가 먼저 한 번 따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너무나 아름다웠다.
-인공 여신만 아니었으면 다산의 상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군.
-좋은 말이죠?
-평생 박으면서 아기만 낳게 하고 싶을 정도다.
-헤라 님을 상대로 그러고 계시잖아요.
-헤라처럼 만들고 싶다는 얘기지.
외형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정말 흠잡을 수 없는 풍요와 다산의 상징이었다.
자식들을 낳기 위한 맘마통도, 카드모스의 정을 받아 그 자식을 낳을 인큐베이터도, 카드모스와의 행위를 할 때를 위한 들박손잡이쿠션도 정말 완벽한 형태였다.
-씨발, 이거 처녀를 내가 먹어봐야 하는데....
한 번 보지는 맛보고 싶다.
여신들이 자신의 숨결을 불어넣어 만든 인공 여신의 보지는 어떤 느낌인지 너무나도 궁금했다.
그러나 이걸 내가 취할 수는 없었다.
-처녀 다시 달아줄 수는 없지?
-당연하죠.
-씁.... 아깝네.
-그냥 따먹고 주면 되는 거 아닌가요, 아버지?
-안 돼. 나를 구해준 남자에게 중고를 선물로 줄 수는 없다.
내가 하르모니아를 건드리는 순간, 하르모니아는 신상이 아니라 중고가 되어버린다.
-카드모스, 너를 위한 선물이다.
-오오, 위대하신 제우스 시여. 그런데 여신은 처녀혈을 흘리지 않습니까?
-내가 먼저 맛봤다.
-......크로노스 만세!! 티폰 만세!!
라는 상황이 만들어지지 않을까.
어떻게 신이 되어서 인간에게 선물로 중고를 줄 수 있겠는가?
'선물로 중고를 주는 건 미친 거지.'
아무리 탐나는 신상이라고 한들, 남자 대 남자로서 약속을 하고 구명지은을 입은 이상 나는 눈물을 머금고 하르모니아를 카드모스에게 시집 보냈다.
나, 제우스.
악으로 깡으로 좆으로 살아온 올리브남이자, 한 명의 '사나이'다.
-씨발, 언제 한 번 카드모스로 변해서 따먹으러 가볼까?
-중고는 취급 안 하신다면서요.
-그렇긴 하지? 카드모스가 이미 처녀 따고 임신까지 시켰을테니, 의미는 없겠지. 씁....
카드모스에게 하르모니아를 붙여준 뒤, 그는 정말 행복을 누렸다.
여동생이었던 에우로페와 감동의 재회를 하고, 하르모니아와 결혼을 하여 '테베'라는 나라를 건국하여 수많은 자식을 낳았다.
무려 다섯 명이나.
나라 이름이 '테베'라는 점에서 나는 뭔가 찝찝했지만, 내가 가이아도 아니고 운명을 미리 알아본다거나 하는 사람이 아니기에 나는 카드모스가 나라를 잘 다스리고 운영하기를 진심으로 응원했다.
그러나.
내가 데메테르의 건으로 겨울을 수습하는 사이, 카드모스는 상당한 고난을 겪었다고 하더라.
왕이자 부모인 그에게 있어 가장 큰 고통은 무엇일까.
한 명의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슬픈 일이 있다면, 자신이 사랑으로 낳은 자식을 잃는 슬픔일 것이다.
나는 비록 아직 자식을 잃은 슬픔을 직접 겪어보지는 못했지만, 레아를 통해 간접적으로 그 슬픔을 이해할 수 있었다.
카드모스는 그걸 직접 겪게 되었다.
인간들 중에서도 그런 경우가 거의 없지만, 카드모스는 슬하에 둔 자식들이 어린 나이에 사망하게 되는 경우가 빈번했다.
자식도. 혹은 자식의 자식-손자들 조차도 불행한 상황이 이어졌다.
대를 거듭할수록 커지는 불행은 마치 먼 훗날 불행의 끝판왕이 등장하여 테베를 멸망시키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설마 그러겠어.'
카드모스는 영웅이다.
그를 위해 만들어진 하르모니아는 모든 신들이 인간에 대한 은혜를 갚기 위해 만들어진 인공 여신이다.
그들의 자식들은 반인반신이라고 할 수 있으며, 헤파이스토스가 만든 만큼 신의 손길이 닿아 신의 피가 흐른다고 할 수 있었다.
설령 만들어진 신이라고 한들, 하르모니아의 정체성은 전쟁을 위한 것도 아니고 살육을 위한 것도 아니다.
판도라와는 다르다.
판도라와는.
나는 카드모스를 믿었다.
처녀인 걸 슬쩍 이야기해줬을 때,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뛸 듯이 기뻐하던 그를 보며 나는 인간 남자의 본성이 내가 아는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남자는 미녀를 좋아한다.
하르모니아와의 사이에서 1남 4녀를 낳았다고 하는 걸 보면 그가 얼마나 하르모니아에게 빠져있었는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자식을 낳는 것과 키우는 것, 그리고 자식이 사고를 당하는 것은 별개의 일.
카드모스가 영웅인 것과 별개로, 자식들의 일은 정말 안타깝기 짝이 없었다.
얼마 뒤.
나는 카드모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사인은 용의 저주.
그가 테베를 건국하는 과정에서, 나는 차마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이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아레스가 키우던 드래곤을 죽였다고?"
"예."
"그래서 드래곤의 저주 때문에 뱀이 되어 죽었다고?"
"...예."
저승.
"슉, 슉슉. 슉."
나는 뱀이 된 카드모스와 다시 만나게 되었다.
내가 그렇게 취하기를 바랐던 하르모니아 또한 뱀이 되어있었다.
올림포스의 모든 신들이 힘을 모아 만들어낸 인공 여신은 독사와 같은 모습으로 변해있었고, 나는 미물이 된 둘에게서 어떤 흔적을 발견해냈다.
아레스의 저주를.
* * *
짜악!
"끄윽...!"
아레스가 분노와 울분을 참는 소리가 울렸다.
나는 그녀를 내 허벅지에 엎어지게 한 다음, 그녀의 엉덩이를 때리며 물었다.
"아빠가 아끼는 영웅에게 저주를 내린 이유가 그거라고?"
"그, 그렇지만...!"
"올림포스를 구원한 영웅이지만, 신의 노여움을 사면 저주를 내릴 수도 있지. 하지만 나는 네가 저주를 내린 이유가 너무나도 어이가 없구나."
찰싹!
나는 한 번 더 엉덩이를 때렸다.
아레스는 울상을 지으며 벌벌 떨었고, 헤라나 헤파이스토스도 멀찍이 나를 지켜볼 뿐이었다.
"길냥이도 아니고 길드래곤을 잡았다는 이유로 저주를 내려?"
드라콘, 이스메니오스.
테베에 있는 샘, 이스메니오스에 터전을 마련한 이 거대한 금빛의 드래곤은 아레스가 아끼는 길드래곤이었다고 하더라.
그냥 드래곤도 아니고, 길냥이도 아니고 길드래곤인 이유는 둘의 습성 중 안 좋은 것만 골라서 하나로 합쳐져있었기 때문이다.
아레스가 직접 키우는 건 아니다.
단지 아레스는 금빛의 드래곤의 '색상'이 마음에 들어서 자신이 돌보기 시작했다.
문제는 이스메니오스를 자신이 키우는 것도 아니고, 이스메니오스가 목이 마를 때 자신이 종종 몸을 씻던 샘물을 마시게 허락해준 것일 뿐.
이스메니오스라는 드래곤의 이름도 자신의 목욕 용 샘의 이름을 본따 지은 이름이다.
신이 목욕을 하던 샘물로 목을 축이는 걸 허락받은 드래곤이니, 그 위상이 얼마나 큰 지 굳이 말할 필요는 없으리라.
문제는 이 드래곤이 카드모스에 의해 살해당했다는 것.
카드모스는 이스메니오스를 죽였다.
아레스가 돌보고 있던 드래곤을 죽이고, 그 샘을 드래곤의 피로 물들이게 된 것이다.
남자 한 명이 창과 방패 하나로 드래곤을 죽였다!
이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가.
역시 티폰으로부터 나를 구한 영웅인 만큼 그의 능력은 예사롭지 않았으나, 나의 피를 직접 물려받은 아레스의 저주는 피할 수 없었다.
"아레스야. 너는 어찌 네가 키우지도 않는 드래곤이 죽었다고 그런 저주를 내리느냐?"
"그냥 죽인 거 아녜요! 카드모스는 드래곤의 이빨을 빼서 그걸로 병사들을 만들었다고요!"
"병사들!"
"네! 용의 이빨을 깎고 갈아서 병사들을 만들었다고요! 드래곤 뼈로 만든 검! 드래곤 뼈로 만든 갑옷! 애완동물이기는 하지만, 이런 능욕은 참을 수 없었다고요!"
용아병의 이야기는 실은 드래곤본으로 만든 무구였던 건가.
머릿속에서 잊고 있던 기억들이 떠오를 때마다, '아, 이 놈이 그 놈이었어?'하는 생각이 든다.
아아, 안타깝도다.
카드모스는 용맘충인 아레스에 의해 뱀이 되어버렸다.
물론 본인이 자식들의 고난에 따른 슬픔에 좌절하여 삶의 의지를 잃어서 그런 걸수도 있겠지만, 인간 영웅이 고작 미물인 뱀이 되었다는 건 여러모로 슬픈 일이었다.
"다음부터는 사람을 확인하고 그래다오. 알겠니?"
"네...."
카드모스만 아니었으면 나는 아레스가 한 행동을 응원했을 것이다.
하지만 카드모스는 내 은인이며, 올림포스의 은인.
카드모스가 뱀으로 변한 것을 되돌려주지는 않아도, 아레스를 크게 벌하지 않으면 올림포스의 기강과 나 제우스의 위신이 서지 않는다.
"또다른 저승을 만들어야겠어."
과거 내가 어떤 게임을 할 때 보았던 '전사들의 성지'처럼, 인간 영웅들이 죽어서도 편안하게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영혼의 휴식 공간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충, 이름은 '엘리시움'이라고 지으면 될 터.
잠시 뒤.
"카드모스. 네게 이런 보상을 마련했다."
나는 카드모스를 위한 구상을 그에게 밝혔고, 카드모스는 머리를-뱀이지만-숙이며 내게 감사를 표했다.
"저를 배려해주시고, 따님을 배려해주신 위대하신 아버지 제우스 님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다만...."
"오, 뭔가 바라는 게 또 있나? 말하라. 나의 목숨을 구해준 이를 위해서라면, 내가 들어줄 수 있는 선에서 다 들어주마."
"제게 딸이 네 명이 있지 않습니까? 그 중에 아직 결혼을 하지 못한 아이가 있습니다."
앗.
"세멜레라고 하는데, 그 아이에게 제우스 님의 은총을 베풀어주시옵소서."
카드모스는 역시 영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