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63 너 때문이니까 책임져 (9)
저벅, 저벅.
호수 안에서 한 명의 여인이 밖으로 나왔다.
폴림노스를 땅에 묻고 그 위에 폴림노스로 변하여 대기 중이던 나는 반갑게 그녀를 맞이했다.
"만나고 싶었던 이는 만나고 왔소?"
"예."
담담하고 차분한 목소리.
미리 내가 명계로 내려가 언질을 준 만큼, 그리고 헤르메스를 통해 그녀가 했던 행적을 알고 있는 만큼 나는 그녀의 변화를 이해할 수 있었다.
성장한 것이다.
한 단계 더.
들어갈 때는 몸만 어른이었던 녀석이 이렇게 지상으로 돌아오고 나니 어른이 되었다.
아직 한 명의 어엿한 주신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분명 자신의 행동에 대해 책임을 지고 자기 인생을 스스로 개척해나갈 수 있는 어른이 된 건 분명하다.
"제법 빨리 오셨군."
"...사고가 있어서."
어른이니까 자신이 명계에서 저지른 실수에 대해 부끄러워 할 줄 알며, 어른이기에 자신의 실수를 묻어두고 숨길 줄 안다.
어린 아이에 가깝지 않냐고 말할 수도 있지만, 어른은 자신의 잘못을 자랑마냥 남에게 떠벌리거나 함부로 말하고 다니지 않는다.
그게 잘못된 것임을, 부끄러운 행위임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으니까.
"그럼 내 부탁을 들어주시오."
"뭐든 해준다고 했죠. 좋아요. 제가 할 수 있는 건 뭐든지 해드릴게요."
여기서 술과 같은 걸 만들어달라고 하는 건 너무 작위적인 제안이 아닐까.
하지만 여기서 내가 술과 같은 걸 만들어달라고 하면, 디오니소스에게는 큰 영감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 한다.
너무 티를 내면 디오니소스가 의심을 하게 될 것이며, 그러면 분명 내가 폴림노스가 아니라는 걸 눈치챌 것이다.
솔직히 폴림노스 같은 놈을 계속 연기하기도 싫고.
그렇다면 가장 좋은 방법은 하나.
"나와 한 번 섹스해주겠소?"
노빠꾸로 달린다.
"뭐든지 들어주겠다고 하지 않았소? 지금 그것만 생각하면서 그대를 기다렸다오."
"......."
디오니소스는 나를 향해 역겨움과 경멸이 가득한 눈으로 노려봤다.
"미친 소리."
다행이다.
디오니소스가 함부로 섹스를 허락하지 않아서.
"어디서 감히...."
"다행이군. 거절해줘서 고맙소."
"...응?"
이제 오해를 풀고 잘 설명할 차례.
"나는 사냥꾼이오."
"사냥꾼?"
"그렇소. 동성을 사냥하는 자를 사냥하는 사냥꾼이지."
"...무슨 말입니까?"
"말 그대로.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탕.
나는 옆에 놓아둔 창을 들어 근처에 있는 나무를 향해 던졌다.
인간 수준 치고는 제법 강한, 적당한 힘을 가진 사냥꾼의 힘에 창은 나무에 꽂힌 채 파르르 떨었다.
"남자면서 남자의 엉덩이를 노리는 호모를 사냥하는 자지. 그러기 위해서 나는 나 스스로 호모인 척 연기를 해왔소."
"......."
"그들이 엉덩이를 까고 내게 내민 순간, 나는 놈들의 엉덩이에 좆대신 창을 꽂아넣고 죽여버렸지."
실제로 내가 그렇게 죽인 자들이 몇몇 존재한다.
그런 자들은 모두 타르타로스의 깊고 어두운 심연으로 들어갔다.
누군가는 너무 싫어하는 게 아니냐고 따질 수 있겠지만, 나로서는 나처럼 입혀놓고 '흐아앗 제우스 애널뷰지 안에 싼드아아앗!'하면서 외치는 불경한 자들을 신으로서 다스렸을 뿐.
다른 놈들도 마찬가지다.
판도라 이후에 여전히 살아있는 호모들은 그리스의 적일 뿐이다.
"혹시나 그런 자들이 있다면, 반드시 멀리하시오. 함부로 사람을 죽이라고 말은 하지 않겠지만, 그들을 죽여도 제우스 신께서 결코 뭐라고 하지 않으실 거요."
"...그 말은, 내가 남자같다는 말인가?"
"응?"
이제는 내가 놀라줄 차례.
"나는 여자야!"
"......오."
얼굴을 붉히며 화를 내는 디오니소스를 향해 놀란 얼굴 한 번.
"진짜로?"
"그럼 옷이라도 벗어볼까?"
"아, 아니오. 외간 남자의 앞에서...크흠. 그것 참 미안하군. 남자인 줄 알았는데."
미안함이 가득 담긴 얼굴로 진심어린 사과 한 번.
"남장을 하고 여행을 하는 거였소? 그것참 못 알아봐서 미안하구려. 영락없는 남성인 줄 알았소."
"......."
"여행하는 중이라 남장을 한 건 이해하지만, 음, 여자라고 듣고 나니 여자처럼 보이는군. 하지만 조심하시오. 세상에는 남자든 여자든 가리지 않고 범하는 자들도 있으니."
틀딱 꼰대...가 아니라.
아버지의 심정으로서 한 마디 추가.
"조심하시오."
"부탁은, 그것 뿐?"
"뭐, 딱히 내가 다른 말 할 것도 없고."
이제 디오니소스에게 뭐라고 말할 건 특별히 없다.
"건강하게 오래 사시오."
"...풉."
어이가 없겠지.
티탄인 자신에게 오래 살라고 하는 건 삐딱하게 생각하면 언젠가 죽으라는 말처럼 들릴 수 있으니.
"그대의 여행길에 사랑이 가득하기를."
하지만 디오니소스는 내게 오히려 세례를 내리며 자리를 떠났다.
나는 떠나가는 그녀의 방향을 보며 웃음이 절로 나왔다.
"일단 싸돌아다니지 말고 집에나 들어가라, 이것아."
더 사고 치지 말고.
나는 바닥에 누르고 있던 폴림노스의 영혼을 뽑아냈다.
그는 처음에는 어안이 벙벙한 채 가만히 있다가 자신으로 변장한 나를 보고는 삿대질을 했다.
"주신을 보고 어디서 삿대질이야."
짝.
나는 손뼉을 치는 것으로 가볍게 본모습을 드러냈다.
디오니소스가 사라진 지금, 굳이 더 몸을 숨길 필요는 없었다.
폴림노스는 그대로 굳어버렸고, 나는 명계로 향하는 입구를 향해 손을 뻗었다.
"카론, 거기 있나?"
쏴아아.
호수의 아래에서 늙은 뱃사공 한 명이 올라왔다.
그의 표정은 지극히 담담했으나, 그는 내 눈을 직접 바라보지 못했다.
본인도 본인의 잘못을 알고 있으니까 찔리는 것일 터.
"부르셨습니까, 위대하신 제우스 신이시여."
"한 가지 부탁을 하도록 하지."
"명령만 내려주십시오."
"명령이라니? 나는 네 상관이 아니다."
카론의 상관은 당연히 내가 아닌 하데스다.
그러니 나는 직접적으로 카론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위치는 아니다.
"내 부탁은 간단하다. 이 호모를 결코 배에 태우지 말 것. 설령 누군가가 이 놈의 무덤에 동전을 던져주더라도, 결코 배를 태워주지 마라. 이 자는...."
람쥐썬더.
나는 전격을 일으켜 폴림노스의 미간에 선명한 번개자국을 남겼다.
"호모니까.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제우스님."
"그래. 내 말을 잘 따른다면, 네 죄를 사해주지 못할 것도 없지."
"...제 죄라면."
"네가 나를 욕한 거?"
카론은 바로 넙죽 조아렸다.
아무리 태초의 존재로부터 태어난 이라고는 하지만, 올림포스의 주신을 함부로 이야기한 건 그냥 넘어갈 수 없다.
"너의 불경에 대한 죄로, 나는 네게 벌을 내리겠다."
다만.
"그 때까지 네 주어진 일을 하도록."
"네...?"
"못 들었나? 너는 네 일을 하라고."
지금 당장 벌을 내릴 건 아니다.
나랏님 욕하는 거야 인간이나 티탄도 별반 차이가 없고, 험담을 한 것도 딱히 죽일 것도 아니다.
그래도 벌은 내려야 한다고 생각하여 내린 벌은, 벌을 내릴 때까지 벌을 내리지 않는 것.
'존나 쫄리겠지?'
아주 유치한 벌이기는 하지만, 이것만큼 효과적인 게 또 없다.
'다음에 건수 잡히면 보자.'
언젠가 카론이 험담 정도가 아니라 스스로 중죄라고 생각하고 스스로 무릎을 꿇을 때.
그 때가 바로 이 자에게 형벌을 내릴 때가 되리.
"뭐하냐. 어서 저 호모 데리고 명계로 가지 않고. 죽은 자를 데리고 아케론 강을 건너는 건 네 일이 아니더냐."
"...알겠습니다, 위대한 제우스시여."
카론은 노를 저으며 명계로 향했다.
나는 그를 향해 훗날 내릴 벌을 생각하며 속으로 웃었다.
언젠가.
분명 벌을 내릴 때가 온다.
왜냐고?
'산 사람이 명계 들어가는 건 한 두 번이 아니거든.'
내가 아무리 그리스 로마 신화에 있어 세세한 건 모른다고 한들, 이것 하나만큼은 분명히 안다.
살아있는 놈들 중 명계를 들어가는 놈들이 더럽게 많다는 걸.
'그 때마다 카론 조져야지.'
조질 기회는 얼마든지 있다.
그 날을 기약하며, 나는 명계로 향했다.
하데스랑 섹스를 하러.
정확히는.
"하데스. 거래를 하러 왔다."
"무슨 거래요?"
"세멜레의 영혼을 엘리시움으로 데려가려고."
명계가 아닌, 인간 영웅들의 천국.
"어째서요? 아무리 그래도 그곳으로 보낼 이유는 없을 것 같은데."
"내가 보내고 싶어하니까."
"......그냥은 보낼 수 없는데."
"그렇다면 답은 간단하지. 페르세포네, 잠깐 여기서 네가 일을 맡아주겠니?"
"예, 아버님."
페르세포네에게 영혼들의 분류 관리 작업을 맡긴 뒤.
나는 하데스를 데리고 침실로 향했다.
그리고.
"하데스."
"네, 오라버니."
"날 따먹는 대신, 세멜레의 영혼을 명계에서 엘리시움으로 넘겨다오."
"......."
할짝.
"그거라면...."
하데스는 침대 위로 올라와, 스타킹만 신은 채 내 자지를 향해 서서히 뻗기 시작했다.
"뭐, 인간 영혼 하나로 오라버니 따먹을 수 있다면야."
"......."
나는 세멜레를 위해 잠시, 하데스에게 오늘 하루를 마음껏 내어주기로 했다.
* * *
디오니소스가 명계를 다녀간 지도 어언 3년.
무려 3년의 시간 동안, 디오니소스는 세계를 떠돌며 이것 저것을 연구해왔다.
정확히는 여러 세상을 떠돌며 많은 인간들을 관찰했다.
인간군상에 대한 관찰.
그녀가 3년 동안, 거의 천 일에 가까운 시간 동안 세상을 떠돌며 관찰한 인간들은 정말 각양각색이었다.
이방인인 자신을 아무 이유없이 보살펴주기도 했고.
자신이 있든 말든 아무 관심을 주지 않기도 했으며.
티탄인 자신을 감히 범하려고도 했으며.
심지어 '나는 제우스다'라고 하면서 여자를 범한 인간도 보고 말았다.
정말, 많은 곳을 봤다.
정말, 많은 것을 봤다.
그리고 디오니소스는 느꼈다.
감정이라는 것은 티탄 만의 전유물이 아니구나.
인간들도 희노애락을 느끼는 구나.
제우스 신께서 왜 인간들을 사랑해주는가.
디오니소스는 인간들에 대해 '이해'하기 시작했다.
아마 몸에 절반 흐르는 인간의 피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생각했다.
인간들에게는 망각이 필요하다는 것을.
시간이 흐름에 따라 잊혀지는 슬픔이 아니라, 한 순간만이라도 그 순간을 잊고자 하는 게 필요하다는 것을.
"근데 어떻게 그걸 만들면 좋을까."
디오니소스는 고민했다.
인간들에게 필요한 걸 찾았지만, 정작 그걸 만들 방법이 없다는 것을.
그래서 그녀는 언제나처럼 넥타르를 마시며....
"......유레카!!"
인간을 위한 망각의 넥타르를 만들자.
디오니소스의 두뇌가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두뇌...풀가동!"
며칠 뒤.
디오니소스의 집에는 거대한 공방이, 밖에는 넓은 밭이 만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