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66 인생은 쓰고 (3)
지옥.
제대로 동전 한 푼 챙기지 못한 채, 남자는 저승의 바다를 따라 내려가 간신히 명계의 입구에 도착했다.
"어우, 씨발."
명계의 입구를 지키는 케르베로스를 보자마자 남자는 등골이 오싹했다.
이미 죽었지만 한 번 더 죽을 것 같은 느낌에 소름이 돋았다.
"이보시오. 저건 어떻게 된 거요?"
"명계 입구를 지키는 지옥의 파수견, 케르베로스지."
남자의 옆에 있던 노인은 한탄하듯 케르베로스를 가리켰다.
"저 녀석이 저기서 자고 있으면 안으로 들어갈 수 없어. 저 안으로 들어가야만 명계의 주인인 하데스님을 만나서 환생할 수 있지."
"화, 환생...?"
"그래. 죽은 자들이 다시 태어나는 게야. 어떤 존재로 다시 태어날지는 모르지만."
"허...."
남자는 입맛을 다셨다.
"환생하면 다시 인간으로 태어날 수 있는 거요?"
"글쎄. 그건 나도 모르지."
"인간으로 태어나는 거 아니었소?"
"인간이 될 수도 있고, 다른 걸로 다시 태어날 수도 있고."
노인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인간이 다시 태어난다면 가장 좋게 태어나는 건 역시 님프겠지. 최악으로 태어난다면 짐승, 아니 벌레로 태어나는 것일 테고."
"인간이 벌레라니...."
"올림포스에 계신 신들의 관점으로 보면 우리는 한낱 미물에 불과해."
"음...."
확실히.
신들에게 인간은 고작 작은 미물에 불과하다.
신이 죽으라고 하면 죽는 거고, 영생을 살라고 하면 영생을 살 수도 있다.
그리고.
"...그럼 혹시 말인데, 신으로 태어날 수도 있는 거 아니오?"
"그게 무슨 개소리인가?"
"개소리라니? 그 얘기를 듣지 못했소? 테베 사람이 아닌가? 위대하신 제우스께서 인간 공주를 임신시켰다는 거."
"...진짜로?"
노인의 입이 떡 벌어졌다.
"그게 정말인가?"
"그렇소. 벌써 몇십년은 된 일인데, 아무래도 모르는 걸 보니 진짜로 테베 사람이 아닌 듯하군."
"허어.... 그런 일이."
"흐흐, 테베에는 지상에서 사는 현인신(現人神)도 있소. 내가 그분의 덕을 정말 많이 봤지."
"덕을 봤다니? 어떻게?"
"그게ㅡ"
펄럭.
바람이 불었다.
순간적으로 남자의 앞머리가 옆으로 휘날렸고, 노인은 남자를 보자마자 괴성을 질렀다.
"으아악!! 'Zll0l'다!!"
노인의 비명에 남자 주변에 있던 이들이 순식간에 남자에게서 거리를 벌렸다.
마치 닿으면 저주를 받는 것처럼, 남자에게서 멀어지며 급히 손을 들었다.
"케르베로스님!! 여기 Zll0l가 있습니다!!"
크르르.
케르베로스가 순식간에 고개를 들었다.
남자는 갑자기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케르베로스에 본능적으로 몸을 돌렸으나, 케르베로스는 빛처럼 빠른 속도로 남자를 덮쳤다.
크아아앙!
케르베로스는 남자의 목덜미를 물고 어딘가로 달렸다.
저항할 틈도 없이, 남자는 케르베로스에 의해 어딘가로 던져졌다.
"으, 으아아악!!"
마치 무저갱으로 통하는 통로.
인간을 마치 저승의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듯한 통로에 남자는 급히 허우적거리며 지푸라기라도 잡아보려고 했으나, 잡히는 거라고는 오직 어둠뿐이었다.
"씨바아알!! 내가 뭘 잘못했다고!!"
하염없이.
하염없이 수직으로 낙하한 끝에.
쿵!
남자는 바닥에 처박혔다.
전신이 으스러지는 고통에 남자는 비명조차 지를 수 없었다.
진짜로 죽은 것 같은 충격과 고통.
그 어디에도 힘이 들어가지 않았고, 남자는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했다.
그리고.
"어이쿠, 이거 또 신입이 들어왔군그래."
뒤에서 느껴지는 묵직한 느낌.
"이마에 붙은 'Z'의 흔적. 이놈은 범해도 되는 영혼이렷다."
"누, 누구...?!"
"알 필요 없고."
흑발의 남자는 비릿하게 미소를 지으며 바지를 내렸다.
"얌전히, 따먹히거라. 흐흐흐."
* * *
한 가지 확실히 해야 할 것 하나.
올림포스에도 율법이 존재한다.
당장 나의 전처, 테미스가 율법의 여신으로서 올림포스의 기본적인 법도와 질서를 만들어냈다.
이 법은 기본적으로 올림포스 최고 주신인 제우스도 지켜야 하는 법.
나는 올림포스의 12주신을 소집하기 전, 먼저 올림포스의 율법에 '그 항목'이 있는지 먼저 다시 한번 확인했다.
"다른 이를 강간한 자에 대해서는 어떻게 처벌을 내렸으면 좋겠는가?"
나의 말에 모두가 침묵했다.
강간이라는 것 자체가 상당히 불쾌감을 주는 만큼, 내가 굳이 12신을 한자리에 모은 자리에서 강간이라는 이야기를 꺼낸 것 자체에 불편해하는 이들이 있었다.
"위대하신 제우스시여, 갑자기 어떤 일로...."
"나의 딸, 디오니소스가 만든 물건에 대해서 너희들도 알고 있을 것이다."
헤라와 아프로디테가 뜨끔하고, 다른 이들은 그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허니젤.
여인을 즐겁게 해 주는 극상의 물건으로, 이곳 12주신들은 거의 사용한 자들이 없지만 올림포스의 많은 여신이 사용한 것으로 이미 다 알고 있을 터.
"이것이 바로 허니젤이다."
나는 모두가 보는 앞, 원탁의 한 가운데에 디오니소스의 발명품을 놓았다.
"테베 왕국을 중심으로 퍼진 이 약은 인간들이 먼저 사용했고, 곧 수많은 올림포스의 신들에게 진상되었지. 아마 너희들의 지인이나 주변 여신들도 이걸 사용한 경우가 있을 것이다."
헤라는 내가 직접 사용했었고, 아프로디테는...아마도 셀프 자위를 하는데 사용했을 터.
"이 물건의 취지에 대해 밝혀라, 디오니소스."
"위대한 올림포스 12주신의 앞에, 제우스 님의 딸 디오니소스가 감히 인사드립니다."
그간 디오니소스도 많이 성장했고, 마냥 아무에게나 함부로 말하던 철부지는 옛 저녁에 탈피했다.
"저는 인간들에게 고통과 슬픔을 잠시 잊고, 기쁨과 쾌락을 주는 물건을 만들어내고자 했습니다. 벌의 꿀을 이용해 만든 이 물건은 본래 바르는 게 아니라, 먹는 겁니다."
디오니소스는 직접 손가락으로 꿀을 떠서 입안에 가볍게 할짝댔다.
"기본적으로 인간은 단것을 먹으면 기뻐하고, 단것을 먹으면 기분이 좋아지더군요. 그래서 그들을 위해 꽃꿀을 벌들을 이용해 잘 정제하여, 여러 가지를 섞어 만들어낸 것이 바로 이 허니젤입니다. 가볍게 어디든 발라먹을 수 있게, 혹은 물에 타 먹을 수 있게 원래의 꿀에서 점성을 많이 낮췄지요. 그런데...."
디오니소스는 손으로 이마를 탁 쳤다.
"꿀을 입에 먹고 서로 섹스하던 남녀가, 이 꿀이 삽입에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을 발견해버렸습니다."
그렇다.
도대체 식용으로 만들어진 이 물건이 과연 어디서 러브젤로 승화되었는가.
그건 바로 펠라치오로부터 비롯된 일.
그리스 남자들이 여자의 음부를 빨아주는 커널링구스를 할 리가 없으니, 여자가 꿀을 먹고 자지를 빨고 그걸 보지에 넣었다가 가버린 것을 시작으로 다들 자지에 허니젤을 바르기 시작한 것이리라.
"사실 그런 용도로 쓰는 거야 아무래도 좋습니다. 여러 여신 분들의 사용 후기에 따르면, 윗입으로도 아랫입으로도 먹기에 좋은 것이라고 하더군요. 님프들은 뭐 서로의 안에 허니젤을 바르고 그걸 핥아먹는 놀이를 한다고도 하지만...."
"......."
뭔가 구미가 당기는 말이 지나갔지만, 나는 애써 진중한 얼굴을 풀지 않았다.
"허니젤이 삽입을 윤활하게 만들어준 이후로, 허니젤은 점차 음식보다 빠르고 쾌적한 삽입을 돕는 성기능 보조제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남자가 별도의 애무 없이도 여자의 안에 넣고 자지를 넣고 빼기에 좋아졌죠."
이제부터 할 이야기는 몹시 진지하니까.
"...인간, 남자들은 이것을 강간에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디오니소스의 말에 좌중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상대 여인의 기분과 관계없이, 일면식도 없는 여인을 단지 예쁘다는 이유만으로 이걸 써서 강제로 흥분하게 만든 다음 자지를 박고 여인을 범했습니다. 진실로 여인을 범한 겁니다."
"......."
"내가 그대들에게 이 이야기를 한 이유는 혹시나 그런 미친놈들이 없겠지만, 인간들과 같은 짓을 하는 자들이 있을까 봐 미리 주의를 주고자 함이며...."
나는 정말 오랜만에 아스트라페를 꺼냈다.
"남녀의 사랑을 돕기 위해, 그리고 여인이 아프지 않게 배려하고자 하는 이 물건을 함부로 사용하는 자들을 벌하기 위함이다. 모든 신전에 신탁으로 전하라. 타인을 함부로 범하는 자는 이 제우스가 신벌을 내리겠다고."
"...제우스 님의 의도는 이해하오나, 조금 힘들지 않겠습니까?"
"헤라."
"그리스 전역에서 일어나는 강간만 해도 하루에 수십...아니 그 이상일 겁니다. 티탄 중에서도 함부로 님프나 인간을 범하는 자들도 있어요. 심지어 어떤 자들은 제우스 님의 모형성기를 허리에 차고 다른 님프나 처녀를 범하고 다닌다고 합니다."
"알고 있다. 그것까지 포함해서 같이 말하려는 것이야."
이 기회를 빌어, 공식적으로 선언하고자 한다.
"남녀 사이에 합의로 이루어지는 화간이 아닌 경우, 한쪽의 의사를 묻지 않고 일방적으로 범하는 섹스는 모조리 강간으로 생각한다."
그리스에 현대인의 사고를 강요할 생각은 없었다.
제우스 자체가 강간의 화신이고, 또 어찌 보면 강간으로 태어난 존재니까.
그러나 이제는 다르다.
내 딸이 만들어낸 물건을, 용도를 바꾸어 악의적으로 사용하고자 한다면 나는 그들에게 단죄를 내릴 것이다.
"그대들은 그저 조용히 신탁을 내려주면 된다. 전하고자 하는 신탁은 단 하나."
타인을 범한 자.
명계, 지옥의 나락에서 평생 범해지게 될 지니.
"...강간의 신이 지옥에서 그대들을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전하라."
누구라고 말은 하지 않았지만, 아는 사람은 다 아는 누군가.
"그리고."
이건 꼭 말하고 싶은데.
"강간은 원래 나쁜 짓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