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69 인생은 쓰고 (6)
인생은 쓰고, 술은 달다.
진짜, 정말 달다.
"크으."
나는 디오니소스가 만들어 가져온 술을 마시자마자 바로 옛날 생각이 떠올랐다.
'설마 이런 식으로 리큐르가 나올 줄이야.'
제우스가 되기 전, 나는 그저 평범한 맥주나 소주만 주야장천 마셨을 뿐이었다.
아르바이트로 버는 돈을 학비나 데이트, 그리고 사람 만나는데 주로 사용했던 만큼 비싼 술을 마신다거나 하는 일은 자주 없었다.
물론 클럽에서 친구들과 미친척하고 한 병 주문해서 괄괄거린다거나, 칵테일을 만들어보자며 대형마트에서 여러 병을 주문해서 자취방으로 간 다음 그 자리에서 비워버린다거나.
다양하게 술을 마시기는 했지만, 비싼 술을 마셔본 적은 없었다.
그래서 내 입맛은 그냥 호프집이나 술집에서 나오는 술 정도만 알 뿐, 자세한 건 전혀 알지 못했다.
값비싼 와인보다는 과일소주를 더 많이 마셨던 남자.
기껏해야 마시는 과실주라고 해봐야 복분자주가 전부였던 남자.
그런 내게 있어 공장제 술과는 다른, 이게 정말로 고급지고 기품있는 술이구나라는 맛을 느끼게 해주는 리큐르는 나로서는 최고의 술이 아닐 수 없다.
디오니소스하면 포도주?
이제는 과일주, 리큐르의 신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정말 달아.'
이게 술이었지.
오랜 시간 제우스로서 살면서 잊어버렸던 과거의 기억들이, 내 혼에 저장되어있던 현대인의 맛이 새록새록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거였어.'
나는 오랫동안 현대의 기억을 잊고 있었다.
심지어 알코올의 맛도 이제는 기억이 가물가물해진 상태.
그걸 떠올리게 해주니, 나로서는 디오니소스에게 정말 진심으로 감사를 할 수밖에 없었다.
이게, 추억이지.
이게, 술이지.
"...크으."
디오니소스가 만들어낸 리큐르의 맛은 과거의 나를 떠올리게 하는 맛이었다.
목부터 알싸하게 만드는 느낌이라든가, 배를 뜨겁게 달아오르게 하는 느낌이라든가, 전신이 갑자기 화끈거린다거나 하는 감각은 분명 알코올이었다.
"디오니소스, 이것의 이름을 뭐라고 지을 것이냐?"
"위대하신 제우스 님께 정해주십시오."
"그렇다면 나는 이것을, 이런 종류의 마실 것을 전부 '술'이라고 칭하겠다."
술.
인생에 있어서 빠질 수 없는 것.
아무리 올림포스 신들이 넥타르와 암브로시아로 연회를 매일같이 즐긴다고 한들, 술이 있다면 또 그 느낌이 다를 것이다.
'술이 얼마나 좋은데.'
일단 술을 마시면 기분이 좋다.
그게 신체의 혈중알코올농도를 높이는 생리학적 작용이라고 한들, 그런 상황에서라도 사람이 더 기뻐지는 건 분명 좋은 일이었다.
'이건 위대한 발명이야.'
잠깐이나마 자신에게 주어진 안 좋은 상황을 술로 잊을 수만 있다면, 술이 만들어진 목적은 충분히 달성했다고 보는 게 옳으니까.
'나도 개인적으로 만족하고 있고.'
과거의 아련한 추억을 떠올리게 만든다는 의미에서도 술은 큰 효과를 거둔다.
하지만.
"디오니소스여. 술의 부작용에 대해서 생각을 해본 적이 있느냐?"
"...잘 모르겠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기분을 즐겁게 하고, 판단력이 흐려지게 만들고, 또 여러 가지 사건 사고를 일으키지. 허니젤이 그랬던 것처럼."
"......."
아직 디오니소스는 술의 위험성에 대해 자세히 모른다.
"이게...정말 위험할까요? 아, 물론 그럴 가능성이 없다는 건 아닙니다. 허니젤도 결국 용도 이외의 장소에서 쓰이는 걸 봤으니까요. 하지만...."
"술은 위험한 물질이다, 디오니소스."
술로 인해 온갖 사건 사고가 일어나던 시대에서 태어나 그걸 어려서부터 보면서 자라온 나로서는 부작용이 걱정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퍼지면 인간들은 분명 머저리같이 죽는 자들도 생길 것이다."
"...예?"
"술을 마시고 이성을 잃어버린 나머지, 신전에 와서 여신상을 상대로 허리를 흔드는 자도 생길지도 모르지."
"아니, 그런 미친...?"
디오니소스는 큰 충격을 받은 듯했다.
"어떻게 인간이 여신상을 상대로 허리를...?"
"그걸 가능하게 만드는 게 술이지."
술이라는 게 원래 그런 거다.
"그, 그럼 이건 인간들에게 배포하면 안 되는...."
"아니지, 아니야. 그런 미친 자들을 솎아낼 수 있는 아주 훌륭한 물건이라고 생각하면 되지 않느냐?"
"......."
"직접 겪어보지 못해서 그렇지, 분명 술이 퍼지면 인간들은 상식을, 상상을 초월한 짓을 하게 될 것이다. 어쩌면 술을 마시고 주신을 욕할 수도 있을 터."
정말 말도 안 되는 행동들이지만, 인간들은 술을 마시고 정말 상식 밖의 행동들을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 미리 이야기하마. 네가 술을 퍼뜨린다고 해도, 결코 인간들에게 일어나는 술로 인한 사건 사고들은 신경을 쓰지 말아야 할 것이다."
"제가 만들어낸 물건으로부터 일어난 일이라면...."
"네가 책임질 일이 아니다. 술을 마신 건 그 인간의 선택이고, 그로 인해 일어나는 일은 오롯이 그 인간이 감내해야 할 문제지."
인간이 저지른 일은 인간의 실수일 뿐이다.
그걸 가지고 디오니소스가 걱정하는 건 분명 어리석은 짓이며, 굳이 디오니소스가 나서서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고 할 필요는 없다.
주류회사에서 일하는 사람이 모든 음주운전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게 아닌 것처럼, 결국 술을 마신 건 본인의 선택이니까.
"디오니소스. 마음 편히 생각하거라. 아니면 술을 오직 신들만 마실 수 있게 하는 암브로시아, 넥타르와 같은 것으로 해도 좋다."
인간에게 공유되지 않는, 오직 신들만이 마실 수 있는 특별한 음료.
하지만 그건 디오니소스가 바라는 게 아니다.
"어떠냐? 그렇게 하겠느냐?"
"...아니오."
디오니소스는 단호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술은 인간들에게 주려고 만든 것입니다. 허락해주신다면, 제가 인간들에게 직접 술을 만드는 법을 알려주고 싶습니다."
"그에 대한 책임은?"
"저는 물고기를 낚는 법을 가르쳐줬지, 물고기를 제대로 손질하지 않고 먹다가 배탈이 나서 죽은 자들에 대한 책임까지 지지는 않겠습니다."
"좋다!"
좋은 마음가짐이다.
"앞으로 많은 이들이 너를 원망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에 대한 생각은 어떻게 해야 하느냐?"
"상식과 이성으로 판단하는 자들은 자신의 실수에 대해 스스로 부끄러워할 것이며, 만약 술로 인해 사고를 일으켜놓고 저를 욕하는 자들은 '좆간'일 뿐입니다."
"완벽하구나. 이제야 너는 비로소 인간에 대해 진정으로 이해를 한 듯해."
인간은 말 그대로 인간일 뿐.
선한 자도 있지만, 악한 자나 미친 자들도 존재한다.
"술은 인간의 본성을 드러내게 하는 아주 훌륭한 음료지. 네게 그걸 보여주마. 디오니소스, 지금 술이 얼마나 만들어졌지?"
"......만들자마자 하나를 즉시 가져왔습니다."
"그럼 나와 함께 내려가서 한 100병 정도 만들어보자꾸나."
"아, 아버지께서요...?"
"그래."
술을 만드는 법을 배워둬야 올림포스에서 몰래 한잔 걸칠 수 있기도 하고, 또 100병이나 되는 걸 디오니소스 혼자 다 만들게 할 수는 없다.
"술의 탄생을 기념하는 축제를 열어야 하지 않겠니?"
* * *
테베 왕국의 어딘가, 어느 조용한 작은 마을.
그곳은 환희와 기쁨으로 가득 찼다.
"제우스 님께서 우리에게 선물을 주셨어! 우리를 엘리시움으로 인도해주실 거야!"
"위대하신 제우스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크읏...!"
마을 주민들의 앞, 광장에는 거대한 산 멧돼지가 횃불 위에서 노릇노릇 익어갔다.
집채만큼 거대한 멧돼지가 마을을 습격하여 사람들이 죽을 뻔 했으나,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져 멧돼지는 순식간에 사망했다.
-인간들이여.
-아, 아니...! 위대하신 제우스 신께서...?!
-지나가다가 우연히 보았노라. 내가 필요한 건 이 괴이한 멧돼지의 다리 한 짝이니, 나머지는 너희들이 잘 정리하여 즐기도록 하거라.
-아앗...!!
-덤으로 너희들에게 줄 선물이 있노라. 먹고 마시며 살아남은 것에 대한 기쁨을 마음껏 누리도록 하거라.
-감사합니다...! 위대하신 제우스 님...!!
-아, 애들은 먹이지 마라.
-...과연!!
살아남은 기쁨!
자칫 잘못하면 거대한 괴이 멧돼지에게 쓸려 모두가 죽을 수 있었지만, 위대한 제우스 신의 도움으로 간신히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 기쁨을 어찌 모두가 누리지 않을 수 있으랴?!
"불을 붙여! 오늘 집에 있는 거 다 가져와!"
"우오오!!"
"이거 마셔봐! 크으, 이거 진짜 끝내준다니까?!"
"여보, 한 잔 마셔볼래?"
"좋아요. ...이거, 애들은 진짜 먹이면 안 되겠는데요?"
"어이, 애들은 가라! 너희들은 고기나 먹어!"
축제의 분위기는 무르익으며.
어느덧.
"엄마, 나 가서 잘래...."
"...응, 그래. 가서 푹 자렴. 그럼 여보, 나 잠깐 씻고 올게."
"......크으, 역시! 당장 애 재우고 씻고 오라고!"
웅성웅성.
"...저 인간 미친 거 아니야? 지금 유부남이 씻고 오라고 했다고?"
"뭔가, 뭔가 이상한데.... 저 인간 몇 병 마셨어? 와, 많이도 마셨네."
"그러게. 오빠도 좀 마셔봐."
"...너 설마."
하나둘.
뭔가, 다들 주향에 이끌려 이성의 끈을 놓기 시작하고.
"흐아암.... 아버지, 저 들어가서 잘게요...."
"그래. 푹 자거라."
모든 아이들이 깊게 잠들고, 어른들이 서로 눈치를 보며 술만 깨작거리던 그 시각.
할짝.
어디선가 들린 소리와 함께, 모두가 이성의 끈은 놓아버렸다.
* * *
"축제에 술과 고기가 빠질 수 없지. 마침 잘 됐다. 저기로 한 번 실험해보지."
나는 멧돼지가 습격할 뻔한 마을을 구해준 뒤, 그들에게 술을 한가득 보내줘서 마을의 상태를 보기로 했다.
과연 어떠한 장면이 펼쳐질 것인가.
나는 그들로부터 얻어온 멧돼지 고기 한 짝을 구워 먹으며, 리큐르로 입가심하며 그들의 축제를 구경했다.
'역시.'
음주가무.
술을 마시고 기분이 좋아진 인간들은 살아남은 기쁨을 바탕으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제우스를 향한 찬양.
생존에 대한 기쁨.
미래에 대한 희망.
'저런 걸 보면 참 인간들에 대한 희망을 놓을 수 없단 말이야.'
때로는 정말 좆같지만, 인간이라는 존재는 너무나도 사랑스럽다.
가히, 애증의 존재가 아닐까.
"밤늦게까지 먹고 마실 것 같으니, 슬슬...어라?"
뭔가.
"......아니, 이 인간들이?"
먹고 마시며 기뻐하더니, 술이 다들 과하게 취한 걸까.
아이들이 늦은 시간에 지쳐 잠들고 모두를 재우고 난 뒤.
조용히, 어른들만 따로 남은 시점이 되니 모두의 시선이 변했다.
"디오니소스, 보지 마라."
"네? 왜요, 저도 볼...."
그곳은.
축제의 현장이었다.
섹스 파티.
그것도....
서양 포르노에서 나올 법한 대학가 광란의 섹스 파티를 연상케하는 모습이라, 나는 너무나 망측하여 등에 소름이 돋았다.
"이 무슨-"
아.
여기 그리스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