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1화 〉 아라크네 (4)
* * *
"아무리 지금 내가 추한 꼴로 나섰다고는 하지만, 빻았다는 이야기는 처음 듣는군."
"아하하!!"
미네르바는 배를 부여잡으며 웃었고.
"이런 봉변이 다 있나."
"그래도 그 얼굴이면 다들 그렇게 될 걸요. 헤라랑 섹스할 때 갑자기 그 얼굴로 바꿔보세요. 막 헤라 눈 까뒤집고 기절할 걸요?"
"그 정도인가?"
"네. 저도 솔직히 지금 제우스님과 섹스하라고 하면, 음, 조금 마음의 준비가 마아아아아않이 필요할 것 같아요."
"확실히 이 얼굴이 효과적인가보군. ...영혼이 죽을 정도면."
나는 심장마비로 기절한 아라크네의 상태를 살폈다.
"진짜로 죽은 건가?"
"네. 죽었네요. 자기를 상대로 1년 동안 뒤에서 박은 남자가 이렇게 못생긴 남자라고 알게 되었으니, 그 충격이 어마어마했겠죠."
"그렇겠지."
티폰에게 감금당했을 때, 나는 티폰에게 강간을 당했어도 최소한 시각 테러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도 가이아가 양심은 있었는지, 아니면 티폰을 통해 자신을 투영하라는 가이아의 메세지였는지.
티폰의 겉모습은 내가 처음 가이아를 봤던 때와 때때로 흡사한 모습을 보이는 미녀였다.
그런 티폰이 만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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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만 해도 끔찍하군."
티폰이 내 위에서 쿵쾅거렸다면, 나는 진심으로 지금쯤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평생 올림포스 안에서만 살았을 것이다.
그리고 가이아를 찾아서 죽여버렸겠지.
아라크네가 그런 심정일 것이다.
만약 내가 잘생긴 얼굴로, 유피테르의 얼굴로 나섰다면 그래도 얼굴이 자지 값을 한다고 이야기를 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의 얼굴은 그냥 평균 수준을 넘어, 아스팔트에 갈린 수준이다.
남녀의 위치가 변해도 이해가 갈 지경인데, 당사자는 어떤 기분일까.
알 필요는 없다.
죽은 것만으로도 충분하고, 나는 아라크네의 시신을 수습할 뿐이다.
"이제 어떻게 하면 좋을까."
아라크네는 일단 죽었다.
영혼만 따로 빼내서 강간을 했는데, 영혼이 쇼크로 죽어버렸다.
실제로는 심장마비에 걸릴 정도로 강한 정신적 충격을 받았다는 말.
육신과 연동이 되어있는 것도 아니라 아직 아라크네의 몸은 정상적으로 돌아가고 있지만, 이런 상태로 저 육신에 들어가봐야 식물인간이 될 뿐이다.
"아라크네."
나는 장막을 거뒀다.
얌전히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베를 짜고 있던 아라크네의 육신이 화들짝 놀라며 내게 고개를 숙였다.
"위대하신 제우스 님을 뵙습니다."
"인간의 몸은 익숙해졌나?"
"물론입니다. 이 몸에도 익숙해져서, 이제는 원래대로 돌아가면 오히려 더 어색할 것 같습니다."
아라크네는 선한 눈빛으로 내게 허리를 숙였다.
무슨 상황이냐고?
영혼이 빠져나온 아라크네의 몸에 또다른 영혼을 집어넣었다.
그냥 인간의 영혼은 아니고, 지상에 있는 수많은 기간테스 중 거미 암컷을 잡아다가 영혼을 뽑아 아라크네의 몸에 집어넣었다.
즉, 아라크네의 몸을 차지하고 있는 건 거미다.
능력이 특별하고 올림포스 신에게 순종적인 거미.
아테나가 직접 잡아온 만큼, 그녀는 아라크네의 몸과 손을 이용해 베를 짜며 자신의 실력을 뽐냈다.
"기간테스인 네가 판단하기에, 아라크네의 몸은 어느 정도 실력이더냐?"
"그리스 최고라고 자부할 수 있습니다."
"신과 비교를 하면?"
"...어찌 감히 그런 불경한."
"불경하다고 말은 하면서도 목소리가 흔들리는구나. 확신이 없거나, 아니면 이길 자신이 있거나. 어느 쪽이더냐? 진실로 고하라."
"...후자입니다."
아라크네는 자신감을 내비쳤다.
"감히 인간이 신을 범접한다거나 하는 소리는 할 수 없지요. 하지만 저, 아라크네. 베 짜는 실력 하나 만큼은 여신분들께 견주어도 손색이 없습니다."
보라.
자기 실력에 대한 자부심과 겸손이 함께 하는 모습을.
아라크네가 만약 이렇게 처음부터 나왔더라면, 나는 아라크네를 바꿔치기 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좋다. 네게 임무를 내리겠다."
"말씀하시옵소서."
"지금부터 너를 새로운 육신에 집어넣어주마. 그 몸은 우리 올림포스의 신들이 인간의 세상에 유희를 다닐 때 쓰는 몸으로, '플레이야스'라고 한다."
"제우스 신께서 사용하신 그것과 같은 것이군요."
아라크네(거미)의 눈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두 개의 눈동자지만, 뭔가 모르게 이마 쪽에 눈동자 같은 게 반짝인 것 같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 그리고 겉모습은 아라크네와 똑같이 생긴 모습이다."
"제가 아라크네라는 여인으로 계속 사는 겁니까? 아라크네는 다시 원래 자기 몸을 되찾고?"
"그래. 하지만 아라크네는 '아라크네'가 아니게 될 것이다."
나는 여전히 죽어있는 아라크네의 영혼을 가리켰다.
"이것은 이제 아라크네가 아니다. 아라크네였던 것이지. 영혼과 육신은 본인의 것일지 몰라도, '그리스 최고의 방적공'이라는 아라크네는 이 여자가 아니라 네가 될 것이다."
"동명이인이군요."
"그렇다. 어찌 생각하느냐?"
"저야 주신께서 시키시는 대로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인간 영웅들에게 사냥당해 죽을 기간테스를 구해주고 살려주셨는데, 인간 세상에서 영광과 부를 누리며 살게 해주시는데 제가 어찌 다른 생각을 할 수 있겠습니까?"
"좋다. 그럼 준비하라."
나는 밖을 가리켰다.
"한 달 뒤. 이곳에서 신과 인간의 대결을 펼칠 것이다."
"예...?"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융단을 만들어내는 대결. 너는 전력을 다하라."
아테나도 최선을 다할테니.
"얼마나 자존심이 상할까. 자기가 그렇게 신보다 더 뛰어나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정작 그 자리에 서있는 사람은 이름이 같을 뿐 본인이 아닌 것을."
아라크네로서 존재할 자리를 빼앗는다.
그리고.
"너 영혼 빠져나가고 나면, 아라크네 얼굴 좀 빻아둬야겠다."
아라크네가 아라크네라는 걸 모르게, 나는 그녀를 완전히 바꿔놓을 것이다.
* * *
째액, 짹.
참새의 지저귐이 들린다.
아라크네는 어질어질한 머리를 부여잡고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여기는...?"
어딘지 모르겠다.
그냥 평범한 숲속의 어딘가 같았다.
아니다.
아는 숲이다.
어려서 자주 놀러왔던 숲이다.
"!!"
아라크네는 마을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이라는 걸 깨닫고 바로 달렸다.
목적지는 당연히 마을.
자신의 집.
누군가가 자신의 몸을 빼앗았다.
자신이 아닌 자신이, 아라크네가 아닌 아라크네가 원단을 만들고 자신을 모독하고 있다.
신을 찬양하고.
올림포스 신들에게 원단을 바치고.
올림포스 신들의 업적이 그려진 천을 짜며 살아가고 있다.
"썅!"
어떤 년이 감히 아라크네의 몸을 빼앗았는가.
인류 최고의 방적공이라는 자리는 자신의 힘으로 쟁취한 것.
감히 어디서 굴러먹다 온 건 지도 모르는 자가 감히 아라크네의 자리를 대체할 수는 없다.
아라크네는 아라크네여야 한다.
"왔다...!"
리디아 왕국의 수도.
아라크네가 사는 곳.
"비켜...!"
아라크네는 황급히 사람들을 지나쳐 자신의 집으로 향했다.
수상할 정도로 자신의 집에 가까워질수록 사람들은 많아졌고, 점점 집으로 다가갈수록 사람들은 더 많아졌다.
평소에도 원단을 사러 오는 사람들 때문에 북새통을 이루었지만, 오늘은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수의 사람들이 몰려있었다.
"무슨 일이...."
"자, 드디어 내일! 내일이면 우리 왕국의 자랑, 아라크네가 아테나 여신과 '베 짜기' 대결을 합니다!"
왕국 대신의 힘찬 목소리.
동시에 울려퍼지는 사람들의 함성.
아라크네는 방금 들은 이야기에 정신이 나갈 뻔 했다.
아테나 여신과의 베 짜기 시합?
누구 마음대로?
내가?
왜?
아테나 여신과는 굳이 시합 따위를 하지 않아도, 앉은 자리에서 발라버릴 수 있는데?
까드득.
아라크네는 군중을 계속 밀어내며 앞으로 다가갔다.
자신을 본 이들이 기겁을 하며 옆으로 물러서는 것이 이상했지만, 일단 아라크네는 저기 대신의 옆에 선 여자를 향해 달려가는 게 중요했다.
"야!!"
아라크네의 외침에 공기가 얼어붙었다.
"네가 뭔데 거기서 내 행세를 하고 있어!!"
아라크네는 단상 위의 아라크네를 향해 소리쳤다.
마음 같아서는 올라가서 머리채를 쥐어뜯고 싶었지만, 단상 아래에 있던 병사들이 급히 창대를 밀며 아라크네를 막아섰다.
"이상자가...!"
"뭐? 이상자?! 내가 무슨"
아라크네는 병사를 밀치려던 순간, 병사의 반짝이는 갑옷에 비치는 자신을 보았다.
"어...?"
"젊은 여자가 제대로 정신이 나갔군. 신의 벌이라도 받은 건가? 쯧쯧. 끌어내!!"
병사들은 아라크네를 붙잡고 밀쳤다.
힘으로는 어떻게 저항을 할 수 없었고, 아라크네는 힘없이 병사들에게 끌려나가야만 했다.
저 멀리.
자신을 이상한 여자처럼 바라보며 인상을 찌푸리는 아라크네가 보인다.
그 눈빛이 너무나도 불순했지만, 아라크네는 당장 다른 걸 확인하느라 더 급했다.
"거울, 거울...!"
아라크네는 급히 유리창으로 향했다.
잡화점의 유리창에 비친 자신을 보았다.
그리고.
"아, 아아...!"
얼굴이 달라졌다.
미모가 여신 뺨치던 얼굴이 순식간에 그리스 길바닥 어디에서나 볼 것 같은 평범한 얼굴이 되었다.
그리고.
"머, 머리! 머리가...!!"
얼굴은 최소한 그렇다 치더라도.
머리가 달라져있었다.
"내, 내 머리...?!"
반짝.
눈썹의 윗 부분.
마치 일부러 그렇게 벗겨놓은 것처럼, 머리카락이 전부 사라져있었다.
반짝.
아라크네의 정수리에 햇빛이 반짝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