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2화 〉 아라크네 (5)
* * *
아라크네가 나의 뚜껑을 열리게 하여, 나는 아라크네의 뚜껑을 열었다.
마음같아서는 모가지를 뜯어버리고 싶었지만, 그래도 인간으로서의 면모가 남아있어서 그런지 머리카락만 뜯어버렸다.
그리고.
람쥐 썬더!
모근을 전부 지져버렸다.
레이저 제모를 통해 털이 나지 않도록 하는 것처럼, 나는 아라크네의 머리에 대고 아스트라페를 휘둘러 번개로 화려하게 지졌다.
결국.
아라크네는 평생 대머리로 살아야 한다.
그것도 그냥 대머리가 아니고, 머리 윗부분은 벗겨지고 옆머리는 그대로 남은 형태로 살아야 한다.
그 왜, 일본 요괴들을 보면 갓파라고 하는 것들이 있지 않은가.
지금 아라크네가 딱 그런 형태다.
"아아악!! 아아악!!"
숲에서 혼자 비명을 지르며 괴로워하는 그녀를 보며, 나는 아주 살짝 동정심이 들었다.
사아아아알짝.
"인간 주제에 감히 신을 모욕한 업보지. 달게 받거라, 아라크네여."
신을 모독한 자에게 내리는 제우스 신의 형벌이다.
다른 신이었으면 '고작 그걸로?'라고 오히려 성을 냈을 만큼 일이다.
물론.
여신들은 '제우스에게 1년 동안 따먹힌다'는 게 딱히 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인간은?
아라크네는?
그 어떤 순간에도 손을 잡기는 커녕 마주하는 것조차 혐오스러운 자가 자신을 일 년 동안 범했다?
그리고 일 년 동안 쾌감을 느끼며 기뻐했다?
그리고 그 고통에서 깨어나보니, 머리는 벗겨지고 자신의 자리는 또다른 존재가 차지하고 있다?
'어떻게 할 거냐, 아라크네.'
빡치는 건 빡치는 거고.
이제 이 상황에서 인간들은 사람마다 서로 다른 결정을 내릴 것이다.
누군가는 좌절하고 절망하면서도 '내가 그렇게 잘못했던가'라고 후회하고 반성할 것이며.
"씨발…!"
누군가는 저렇게 화를 내며 고개를 치켜든다.
"다 죽여버리겠어…!"
그리고 내면의 분노를 주변에 터뜨리려고 한다.
딱히 이상할 건 없다.
좆간들이 어디 저러는 게 하루이틀도 아니고, 아라크네는 좆간 중에서도 꿀꽈배기 봉지도 입을 다물지 못할 만큼 표독스러운 좆간이라고 보는 게 정답이니까.
"죽일 거야…. 흐흐흐. 그래. 그 방법이 있지…!"
주변에 누가 없다고 생각하는 건지, 아니면 자신의 복수를 누군가 듣고 도와주기를 바라는 건지.
"일단, 그 여자의 자리를 빼앗는 거야…! 그 년이 그랬던 것처럼!"
아라크네는 급히 옆머리를 위로 올렸다.
물에 잔뜩 적셔서 옆으로 넘기고, 또 반대쪽 머리칼을 옆으로 넘기며 머리카락으로 층을 쌓았다.
'오.'
상당히 어색하지만, 뭔가 숏컷처럼 머리칼이 만들어졌다.
풍성한 머리칼은 아니지만, 적어도 머리 위가 벗겨진 것보다는 훨씬 보기 좋았다.
"흐흐, 흐흐흐…."
실성한 웃음을 흘리며, 그녀는 마을을 향했다.
'한 번 찔러나볼까.'
나는 그녀가 마을에 들어가기 전, 나와 함께 아라크네의 상황을 구경 중이던 여인을 불렀다.
"네메시스."
"예, 제우스님."
네메시스.
복수의 여신.
모든 인간들이 '저 새끼 좀 죽이게 해줘'라는 기도를 가장 많이 듣는 여신.
일단 전후관계는 차치하고, '복수'라는 카테고리에서는 네메시스를 따라올 여신이 없다.
"한 번 판을 짜보거라. 저 여자가 과연 어디까지 복수를 하려고 할 지, 지켜보자꾸나."
"어느정도로 도움을 주면 되겠습니까?"
"저 상황에서 단검 하나를 쥐여주는 정도."
네메시스가 복수를 돕는다는 건 그 복수가 정당하다는 게 아니다.
복수가 옳든 그르든, 복수를 하고자 하는 자가 악인이든 선인이든, 때때로 그녀의 마음에 드는 복수는 전력을 다해 도와줄 뿐이다.
가령.
"아앗, 이런 곳에 사냥꾼들이 쓰고 버린 장비들이…?!"
우연히 일어날 수도 있는 일을 필연으로 만들어 둔다거나.
"좋았어…. 밤이라서 사람들이 주변에 없어…!"
복수를 저지르는데 마침 운이 너무나도 좋은 상황이 연달아 일어난다거나.
"자고 있…."
너무나도 일이 잘 풀려서, 복수의 여신이 지금 나를 돕고 있는 다고 생각할 정도거나.
"......."
아라크네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복수의 여신이 자신의 복수를 도와주는 것을 두고 신에게 고마움을 느낄 지, 아니면 쓸데없이 도와주는 거라고 지랄을 할 지는 모르지만.
푸ㅡ욱!
아라크네는 침대에 누워있던 아라크네를 단검으로 찔렀다.
푹, 푸북, 푹푹푹!!
한 번이 아니고, 무려 수 차례, 수십 차례를 계속 찌르고 또 찔렀다.
심지어 첫 일격을 찌를 때, 소리조차 내지 못하게 목을 비틀어 찔러서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도록 찔렀다.
"굉장하네요."
아라크네, 거미 기간테스였지만 아라크네가 되어준 이는 네메시스의 옆에서 아라크네의 행동에 치를 떨었다.
"인간이 저런 식으로까지 악의를 품다니."
당연히 저 아라크네는 가짜다.
신의 힘으로 만들어낸 정교한 가짜, 플레이야스다.
"저렇게까지 죽이고 싶었을 까요?"
그러나 인간이 그런 걸 어떻게 구분할 수 있으랴.
그냥 냅다 찌르고 또 찔러서 죽였는데, 살아나지 않으면 그냥 죽은 거지.
"아무리 1년 동안 옆에서 따먹히면서 구경만 했다고 한들, 저건 좀."
"원래 계획대로 했으면 아마 지금쯤 토막을 냈을 걸."
"원래 계획이 뭐였죠?"
"아라크네가 잘생긴 남자와 결혼해서 행복하게 사는 것."
"와…."
아라크네, 심지어 네메시스마저도 '아 그건 좀'이라는 얼굴로 치를 떨었다.
하지만 나는 이것이야말로 자기 분수를 모르는, 자신을 과신하는 인간 아라크네에게 최고의 형벌이라고 생각한다.
"사촌이 땅을 사도 배가 아픈 법이고, 자기 여동생이 나보다 더 잘난 남자랑 사귀어도 질투심이 나는 법이지. 그런데 자기 존재를 빼앗은 여자가 잘생긴 남자랑 결혼하고 애까지 낳는다?"
"결코 참지 못하겠군요."
"그래. 그런데 거기까지 갈 필요도 없었네."
푹, 푹푹.
아라크네는 플레이야스를 기어이 난자하듯 칼로 찔렀다.
비릿한 혈향이 주변에 가득 퍼질텐데도,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플레이야스를 향해 칼을 찔렀다.
"자지에 박히던 걸 생각해서 칼로 찌르는 건가. 인간이라는 것들은 하여튼 잔인하기 그지 없군."
"어떻게 할까요? 지금이라도 막을까요?"
"아니. 저러고 한 번 지켜보자고. 내 생각에는 분명 자신의 빼앗긴 자리를 차지하려고 할테니."
역시나.
아라크네는 죽은 시신을 천으로 감쌌다.
그리고 둘둘 말아, 자신이 1년 동안 천막 너머에서 바라보던 곳으로 시신을 구겨넣었다.
"죄가 추가되었군. 시신 유기."
"저래봐야 걸릴텐데."
"아니지, 아니야. 저 여자는 지금 시신 유기가 걸린다는 게 중요한 게 아니야. '하루'를 넘기는 게 중요한 거지."
과연 내일 누가 아라크네의 집 '안쪽'에 신경을 쓸까?
신경을 쓰는 건 바깥, 아라크네가 밖으로 나와 아테네 여신과 대결을 할 대회장이지.
"저 여자. 지금 걸려도 상관없다는 마인드야."
목표는 그저 하나.
"베 짜는 실력으로 아테나를 이기겠다는 거지. 아테나가 아니어도 상관없고, 그냥 신을 상대로 이겨보겠다는 거야."
배짱 하나는 정말 두둑하다.
심지어.
화륵.
"...악독하기로는 그리스 최고의 인간이 아닐까 싶군."
정말 뒷 생각은 안 하는구나.
임기응변이 뛰어나다고 해야 할 지, 걸리면 죽든 말든 아무 상관이 없다는 건지.
"불까지 지를 줄은 몰랐는데."
화륵.
밤 사이.
아라크네의 집은 불꽃에 타들어갔고, 아라크네가 지은 원단은 모두 불타버렸다.
살아남은 건 오직 전신이 그을린 아라크네 뿐.
그녀는 머리에 자신의 원단을 두른 채, 자신의 손만은 지켜내며 불꽃 속에서 탈출하는데 성공했다.
* * *
날이 밝았다.
모두가 축제의 분위기에 들어간 가운데, 숙연한 분위기 속에서 아라크네가 대회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붉은 드레스.
그을린 피부.
그리고 얼굴은 옷감으로 칭칭 휘감아, 눈가만 밖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화재는 안타깝게 생각한다, 아라크네여."
신과 인간의 대결에 나선 아테나는 진심으로 아라크네를 위로했다.
"...흥."
아라크네는 그걸 비웃었다.
"제 실력이 나지 않도록 하필 화재가 대회 전날에 일어난 건 뭐때문일까요…?"
"그게 내가 한 짓이라는 것이냐?"
"글쎄요. 저는 그냥 여쭤보는 겁니다."
그래도 신을 앞에두고 대놓고 지랄을 할 깜냥은 아닌지, 아테나를 은근히 긁으며 그녀는 자리에 앉았다.
"지금부터, 대회를 시작하겠습니다!!"
끼릭, 끼릭.
많은 이들의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둘의 베가 굴러가기 시작했다.
아라크네는 오직 단 하나, 멀쩡한 손만으로 베틀을 돌리며 천을 짜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드디어 결과가 나왔다.
"보아라. 인간들이여. 나 아테나의 행적을. 나는 이 천에 아테나로서의 위엄을 드러냈으니."
천에는 갑옷을 입은 근엄한 아테나의 모습이 걸려있었다.
그 모습은 너무나도 웅장하고 아름다워, 아테네 신전에 당장 걸어도 될 정도였다.
그리고.
"아라크네의 그림은…세상에."
아라크네는.
똑같이, 아테나 여신의 모습을 천에 담았다.
갑옷이 아닌, 수려하고 아름다운 드레스 차림으로 '전신'을 담고 있었다.
반신의 갑옷.
전신의 드레스.
우열을 감히 가릴 수는 없지만, 같은 시간 안에 더 많은 부위를 표현하기도 했고, 여인의 아름다운 모습을 드러낸 건 분명 뛰어난 사실이다.
"아라크네가 이기는 거지?"
"그렇겠지…?"
아테나 쪽에 있던 이들 마저도 아라크네의 승리를 점치는 상황.
"잠시만요…!!"
관중석에서 한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걸 보세요! 저 여자, 천에다가 끔찍한 짓을 저질렀어요!"
사락.
로브를 벗은 여자는.
"아, 아라크네…?!"
"저 여자는…!!"
"너, 너…! 어떻게…?!"
"모두, 이걸 보세요!!"
우리의 아라크네[거미]는, 아라크네가 만든 천을 손으로 한 번 쓸었다.
머리칼의 색은 다르게 바꾼 덕분에, 관중들 대부분 그냥 신원불상자의 난입이라고 생각했다.
사락.
천의 결이 순식간에 뒤집혔고, 아라크네[거미]가 손을 휘저을 때마다 천은 새로운 그림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중 그림…? 호오, 그런 고급 테크닉을…!"
"그런데 왜 저렇게 살색이 많은…."
그리고.
꺄아아아악ㅡㅡㅡㅡㅡ!!
모두의 비명과 함께.
"...이 건방진 년이."
드레스 차림의 고결했던 아테나 여신이, 제우스 신의 자지 아래에 나체로 아헤가오를 하고 있는 그림으로 뒤바뀌었다.
"시, 신성 모독이다ㅡㅡㅡㅡ!!"
참고로.
저건 우리가 아무런 제지도 하지 않았다.
그저.
아라크네보고 어디 '할 거면 해봐라'라고 놔뒀더니, 저런 짓을 저지른 것 뿐.
"죽어야겠군."
신벌의 때가 왔나니.
"건방진 년이로구나!"
아테나는 하늘을 향해 손을 뻗으며.
"처녀신을 모독한 죄, 달게 받으라!!"
아라크네의 몸을 향해 푸른 빛을 떨어뜨렸다.
그리고.
"아, 아아…!!"
아라크네의 몸은 서서히, 흉측한 거미의 형태로 변하기 시작했다.
그리스 최초로 신을 음란 모독한 여자.
아라크네.
아테나 여신의 심판을 받은 뒤, 타르타로스로 갔다고 하더라.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