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8화 〉 거인사냥꾼 오리온 (6)
* * *
언젠가 아폴론과 다프네의 이야기를 짧든 길든 할 수 있는 시간이 오겠지만.
지금은 다프네 플레이야스의 희생을 바탕으로, 오리온 아제우스의 눈을 고칠 때.
"어디보자."
아폴론 신전의 한가운데에 누운 나는 아폴론의 손길에 모든 걸 맡겼다.
"가이아여신이 가져온 독약이라고 했지? 가장 처음 본 이에게 호감을 느끼고 사랑에 빠지게 된다는."
아폴론의 목소리가 딱딱해졌다.
아무래도 다프네와 이런 관계가 된 계기가 '금사빠'와 관련이 깊은 만큼, 아폴론은 불쾌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짜증나네. 분명 에로스한테서 받은 묘약일 거야. 에로스의 짓이 분명하다고."
뭐, 간단히 이야기를 하자면.
이 델포이라는 곳에는 기간테스 티폰이 있었고.
티폰을 상대하는 과정에서 아폴론이 쉽게 사냥을 하다가 에로스를 무시하게 되었으며.
에로스가 아폴론에게 '큐피트의 화살'을 쏴버렸고.
거기서 그만 마침 '인간 여자의 플레이야스'를 시범 운영하고 있던 다프네 플레이야스(나)를 보게 되어 사랑에 빠지게 된 것.
즉.
아폴론은 에로스 때문에 레즈가 되었다.
플레이야스라는 걸 알면서도 아폴론은 어쩔 수 없이 사랑에 빠지게 되었고, 다프네인 나는 매일밤 아폴론에게서 백합물을 빼느라 여념이 없었다.
뭐, 그렇다고 내가 가위치기를 한다는 건 아니고.
그냥 남들이 밖에서 보면 끈적한 가위치기같지만, 실제로는 엄연히 달고 한다.
단지 남들이 볼 때는 비비는 것처럼 보일 뿐.
"일단 눈 뜰 때 조심해. 다 됐어."
"벌써 다 되었소?"
"벌써라니? 거의 반나절은 누워있었는 걸?"
내가 생각을 잠시 깊게 했던 걸까.
아폴론과 다프네의 이야기를 생각하는 사이, 벌써 눈이 치료되었다.
"아. 함부로 눈 뜨면 안 돼. 조심히 눈 떠. 아직도 눈에 약기운이 남아있을 수도 있으니."
"음...."
나는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그리고 한 손은 내 눈을 가리고, 다른 손은 앞으로 뻗었다.
"혹시 거울이 있소?"
"거울은 왜?"
"괜히 다른 이에게 사랑에 빠지느니, 차라리 내가 나 자신을 사랑하는 쪽이 훨씬 더 나을 것 같아서."
그러면 오리온 나르시스트 아제우스가 되겠지.
"여기있어."
"그럼...."
나는 조심스레 눈을 열었다.
거울 속 곰같은 남자는 키오스 섬에 들어가기 이전과 다를 바가 없었고, 내가 오리온에게 반하거나 하는 일도 없었다.
"완벽한 치료였소. 고맙소, 아폴론 신이시여."
"흐흥. 내가 한 의술하지. 나중에 내가 자식 낳으면 분명 걔는 의술의 신이 될 거야."
"그 재능이 자식에게 잘 이어졌으면 좋겠군."
"그래서 하는 말인데!"
아폴론은 목소리를 낮추며 작게 속삭였다.
"...아빠. 혹시 딸내미 상대로 손자 볼 생각 없어요?"
"뭐래."
이 미친 년이?
"아, 왜. 아빠. 좋은 제안 아니에요?"
"족보 꼬인다."
"이미 티탄 신의 족보는 할머님 세대부터 이미 다 개같이 꼬인 거 아녜요? 아빠가 어머님들 다 아빠 어머니 배로 낳았잖아요."
"머리아프게 하지 마라."
내가 레아를 통해 지금의 자매들을 다시 낳기는 했지만, 그건 크로노스로부터 잡아먹힌 다섯 자매들의 신격을 부활시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했던 고육지책이었다.
"너 한 명 임신시키면 그 뒤로 얼마나 많은 애들이 임신시켜달라고 하겠어. 그리고 위험해."
"위험하다고요?"
"내가 너희를 직접 임신시키면 조금 위험한 티탄신이 나올 수 있어."
내 씨로부터 태어난 자식을 상대로 내가 또 임신시킨다?
그리스 티탄 신에게 둘 잣대는 아니지만, 유전적으로 몹시 위험해질 수 있다.
"좋아요. 그럼 이건 어때요? 섹스는 제우스님이랑 하고, 아기 씨뿌리는 건 이걸로 하고."
"...이거?"
"네. '아제우스'라고 했죠. 어때요?"
"......미친 소리를 하는 것 같은데, 뭔가 괜찮은 것 같기도...?"
만약.
아제우스를 통해 임신하는 자식들이 전부 유전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다면.
오리온 아제우스야 포세이돈의 도움으로 태어난 내 아들격 존재지만, 완전히 새로운 아제우스를 만들어내서 내 유전자와는 전혀 관계없는 씨를 티탄 신에게 뿌린다...?
"...아니지. 그럴 바에는 그냥 지금 오리온 아제우스로 덮치고 말지."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
사촌끼리 하는 게 문제가 된다!
라는 건 K유피테르의 생각.
이 그리스에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당장 가이아와 우라노스, 크로노스와 레아 세대만 하더라도 비일비재하게 일어난 일 아닌가.
'뭐든지 가능한 신화 속 세상.'
신화의 시대에 불가능한 건 없다.
게이 빼고.
"아제우스로 씨를 뿌릴 바에는 그냥 제우스로 임신시키고 말지."
"오...드디어 하시는 건가요?"
"좀 준비 좀 하고."
마음의 준비도 필요하지만, 세간의 인식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에 대한 부분도 준비가 필요하다.
아직도 내 안에 남아있는 유피테르의 인자, 더 K유교인의 영향이 조금은 남아있나보다.
"그럼...응?"
저 멀리.
아래에서 큰 충격이 울린다.
지진이 일어난 것 같기도 하고, 괴수가 크게 몸을 흔드는 것 같기도 하다.
"뭐야?"
"아...또 왔네."
아폴론은 머리를 벅벅 긁으며 난감해했다.
"아, 아폴론님!"
밖에서 급히 달려온 여자 님프가 아폴론의 앞에 고개를 조아렸다.
그녀는 예의를 갖추고 있지만, 얼굴이나 행동은 몹시 허둥지둥거리고 있었다.
"피톤의 자식들이 또 나타났습니다!"
"뭐? 티폰?"
"피톤이에요. 비슷한 이름인데, 전혀 다른 녀석."
놀래라.
티폰이라는 이름에 나는 조금 트라우마가 있어, 피톤이라는 이름도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왜 하필 이름이 피톤이래? 자꾸 티폰이라고 부를 것 같군."
"기간테스...다. 이곳 델포이에 제가 터를 잡을 때, 피톤을 죽이고 그 위에 신전을 세웠지."
"아아. 과연. 아폴론 님의 위명 덕분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있는 앞에서 아빠 거릴 수는 없으니, 나는 바로 아폴론에 대한 예우를 갖췄다.
"그런데 피톤이라는 놈...에잇, 저는 다른 이름으로 부르겠습니다. 피소나스라고 하죠. 그 놈의 자식들이 지금 저기서 날뛰는 겁니까?"
"그냥 자식은 아니고, 놈의 피로 저주받아서 피소나스가 된 놈들이 날뛰는 것이다."
아폴론의 말에 따르면.
피소나스의 피는 저주와도 같아, 아폴론의 영향력이 미치는 델포이 신전 반경 십수 km 밖으로 땅을 이용해 저주를 뿌린다고 한다.
"저주에 걸린 짐승은 피소나스의 형체를 가지게 되고, 그게 델포이 신전을 습격하는 거지. 이 신전이 억누르고 있는 피소나스를 해방하기 위해서."
"뭔지 알겠습니다."
나는 바로 내가 챙겨온 활을 꺼내들었다.
"제가 직접 상대하겠습니다. 아폴론님."
"괜찮겠나? 그대는...인간이 아닌가?"
부캐로 괜찮겠냐.
본캐 들고 오는 게 좋지 않겠냐.
"하."
그런 뉘앙스같은 말이길래, 나는 가볍게 활을 들어보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그리스 최고의 거인사냥군이 어떤지, 직접 보여드리겠습니다."
타다닥.
단숨에 신전 밖으로 달린다.
십수 km 정도지만, 그 정도면 한 시간 조금 안 되게 달리면 바로 도착할 수 있다.
더군다나 나만 달려가는 것도 아니고, 저쪽에서도 델포이 신전으로 달려오고 있다.
"후."
한 번 가볍게 호흡을 가다듬은 뒤, 주변보다 살짝 더 높은 언덕에 올랐다.
"저게 피소나스군."
구구구.
땅을 달리는 드래곤이다.
네 발을 도마뱀처럼 앞뒤로 움직이며 기어오는 속도가 정말 빠르다.
등 뒤에 펼쳐진 날개로 하늘을 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지만, 날개는 그저 장식인 것 같다.
"그럼."
활을 당긴다.
화살을 챙겨온 건 아니지만, 아제우스답게 이 몸에 흐르는 미약한 신력을 이용해 활을 당기며 각을 잡는다.
노리는 것은 미간.
그리고 미간에 이어, 다리, 몸통, 눈.
타ㅡ앙!
가볍게 활 시위를 놓는다.
벼락같은 화살이 순식간에 피소나스를 향해 날아가 꽂혔다.
키아아악!
피소나스는 괴성을 질렀지만, 괴성만 지를 뿐 별다른 타격이 없었다.
"...응?"
의아하다.
실제로 존재하는 화살이 아닌 신력을 빚어 쏜 공격이라서 그런가.
분명 피소나스를 꿰뚫었는데, 적의 몸에 피해를 입혔다는 감각이 없다.
멀리 있는 괴물을 상대로 어떻게 그런 감각을 느낄 수 있냐고 묻는다면, 그리스 최고의 거인사냥꾼으로서의 감각 덕분.
"뭔가 이상한데...."
내가 의아함에 활시위를 당기려던 순간.
새애액ㅡㅡㅡ!
피소나스로부터 무언가가 날아왔다.
나는 급히 몸을 뒤로 날렸고, 피소나스가 날린 검붉은 액체는 내가 있던 곳을 순식간에 뒤덮었다.
"극독?!"
독이다.
가이아가 뿌렸던 이상한 미약 같은 독이 아니라, 진짜로 사람을 녹여내릴만큼 강력한 독이다.
가까이 있는 것만으로도 피부를 따갑게 만드는 강렬한 자극에 나는 빠르게 뒤로 물러났고, 바로 자리를 이탈했다.
저격수의 위치를 알고 저격수가 있는 곳을 포격한다.
그 공격은 분명
"자기가 전갈인 줄 알아!"
피소나스는 꼬리를 바짝 세운 채 나를 노렸다.
꼬리가 마치 포격을 위한 포대인 듯, 전갈의 그것처럼 빨딱 선 꼬리의 끝이 내가 있는 곳을 정확히 노리고 있었다.
새애액!
빠르게 화살을 날리며 거리를 좁힌다.
나를 노리던 독액은 내 화살에 맞아 터져서 주변에 흩뿌려졌고, 나는 원을 그리듯 달리며 피소나스와의 거리를 좁혔다.
키아아악!
피소나스가 아가리를 벌리며 나를 향해 다가오고 있다.
가까이 다가오면 자기가 이길 수 있다 싶은지, 아주 자신감 넘치는 상태로 내게 달려오고 있다.
"미안하지만 간 보기는 끝났다."
사락.
빛처럼 빠른 속도로.
준비된 사수로부터. 사격.
"천정호의 화살!"
네가로기어 애로우.
앞으로 금빛의 화살이 날아가 피소나스의 미간에 꽂힌 순간.
푸ㅡ욱!
하늘에서 떨어진 푸른색의 달빛이, 피소나스의 몸통을 꿰뚫었다.
"...어?"
하늘에서 천천히 내려오는 푸른 머리칼의 여인.
"...내가 먼저 잡음."
아르테미스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