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메아의 사자를 기어이 죽였다.
목을 물어뜯고 가죽을 뜯어도 놈은 버티고 또 버텼다.
기간테스, 티폰의 자식 개체 답게 놈은 정말 질겼다.
가죽도 고기도 모두 질겼지만, 가장 질긴 건 놈의 의지였다.
무려 30일.
농담을 하는 게 아니라, 내가 처음에 놈의 위에 올라타 가죽을 뜯기 시작한 날로부터 놈은 30일 동안 내게서 버티고 또 버텼다.
다행히 동굴 밖으로 뛰쳐나가는 일은 없었고, 한 사흘 째 되는 순간부터는 아예 버티기로 들어가더라.
놈의 살점을 뜯어먹고, 사자생고기를 씹어먹으며, 놈의 혈관에 흐르는 피를 물처럼 받아마셨다.
그렇게 내가 버텼는데, 놈은 신체 재생속도는 정말 미친 수준이었다.
뜯어낸 가죽이 사흘 정도 지나니까 새살이 돋기 시작하고, 뜯어낸 살점도 며칠 지나니까 아물어 딱지가 남더라.
거의 부활에 가까웠다.
그래서 부활할 때마다 죽였다.
죽이고 또 죽이고, 뜯고 씹고 찢고 맛보고 하기를 30일 동안 반복하니, 놈은 결국 살고자 하는 의지를 내려놓았다.
30일 동안 계속되는 끊임없는 고통.
그리고 그 고통을 주는 인간이 자기 몸에서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온갖 역경과 오물을 뒤집어씀에도, 나는 놈을 붙잡고 죽이고자 했다.
그리하여.
결국, 나는 놈을 죽이는데 성공했다.
놈이 삶의 의지를 잃은 순간, 놈의 목을 뒤에서 졸라 질식사시켰다.
아쉬운 점 하나.
나는 놈을 상대로 질식사로 죽일 생각이 없었다.
암컷이라면 한 번 놈의 질을 식사한 뒤에 죽이면 죽였지, 나는 그냥 30일 동안 사자와 한 우리에서 뒹군 셈이 되었다.
"으으으."
"괘, 괜찮으시오...?"
"아아, 물론."
나는 강물에서 몸을 한 시간 넘게 씻어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사자의 피로 절여져있었다.
"그냥 이 사자를 죽이느라 며칠 씻지 못했을 뿐이오. 피를 뒤집어 쓰고도 난 뒤에도."
다행히 놈이 오물을 뿌리거나 하지는 않았다.
사자라고는 해도 기간테스 자존심이 있었던 건지, 놈은 역겨운 짓은 하지 않았다.
"괴, 굉장하군. 그런 거대한 사자를 어떻게 혼자서...?"
"그냥, 나니까 가능한 거지."
"당신은 도대체...?"
"나? 헤라클레스."
당당히 카드모스 대제전에서 받은 나의 명패를 꺼내 보여주려고 했지만, 사자와의 격전에서 나무패는 이미 첫 날부터 망가졌다.
"헤라클레스...! 누구보다 강한 전사의 이름, 똑똑히 기억했소."
인근 마을의 주민, 몰로르코스는 나를 향해 두 손을 모아 기도했다.
"그대는 나를 구원했소. 그대가 네메아의 사자를 사냥한 덕분에, 나는 살아서 내 아내에게 돌아갈 수 있게 되었소."
"응? 그건 또 무슨 말이오."
"그게."
몰로르코스 왈, 30일 동안 네메아의 사자가 두문불출하자, 몰로르코스를 희생양 겸 정찰병으로 내세웠다고 하더라.
"아내가 인질로...?"
"그렇소. 그녀는 선천적으로 다리가 불편하여, 도망치자는 말을 했지만 마을 주민들에게 붙잡혔소. 이제 사실대로 말한다면 내 아내는 풀려나겠지. 후우, 고맙소. 정말."
"사람이 조금 너무 순박하군."
나는 마저 몸을 씻어낸 뒤, 물을 털며 밖으로 나왔다.
"헉...!"
"아, 이거. 뭐, 인류 최강의 사냥꾼이기도 하고, 인류 최강인 남자지."
나는 내 아래를 보자마자 기겁을 하는 멜로르코스가 어색하지 않게, 아직도 핏물에 절어있는 붉은 의복을 대충 허리에 둘렀다.
"그대, 생각보다 사람이 너무 착해서 탈이군. 마을 주민들이 과연 그대가 돌아가서 사실대로 이야기한다고 하도, 그걸 그대로 믿어주겠소?"
"그, 그럼...?"
"남의 아내를 인질로 잡을 정도로 흉악한 자들이라면, 필경 그대의 말을 거짓이라고 생각할테지. 이 남자가 우리를 곤경에 빠뜨리려는 게 아닌가하며, 네메아의 사자가 죽은 증거를 가져오라고 말할 것이오."
"그, 그건...!"
이 남자.
너무 착하다.
한국이었다면 진작에 다른 사람들에게 보증을 서주다가 자기 집안을 쫄닥 말아먹을 그런 착한 사람이다.
판도라의 상자 속에 가득했던 증오와 원망 속에 단 하나의 희망이 남은 것처럼, 이 남자 또한 좆간 사이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선인'일지도 모른다.
"마침 내가 옷도 필요하고, 무엇보다 이 녀석을 '작업'해야 하니 그대의 도움을 받아야겠소. 마을로 안내해주시오. 그리고, 나를 그대의 집에 초대해주시오."
"우, 우리 집에...?"
"사자를 사냥한 사냥꾼과 함께 간다면 다들 믿겠지. 나는 일단 가까운 곳에서 이 사자를 손질해야 하오. 그리고 이걸 테베까지 가져가야하는데, 그러기에는 너무 무겁지."
나는 여전히 바닥에 축 늘어진 사자의 시체를 가리켰다.
"완전히 죽었으니 걱정하지 마시오. 안심하고 마을로 안내해주시오. 그리고 내가...그대와 그대의 아내를 위해 대신 복수를 해주지."
"보, 복수...?"
"그렇소. 아, 죽이겠다는 건 아니오. 내가 죽이는 건 이런 괴물들이지, 인간쓰레기들이 아니오."
"......그래도 그들을 죽이는 건."
"허어."
착해도 너무 착해서 탈이다.
"누군가가 죽이는 게 아니오. 지금 당장 죽는 것도 아니고. 단지 본인들이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앞으로 죽느냐 사느냐가 달라질 뿐. 흐흐흐."
"그대는...혹시, 신입니까?"
"신? 틀렸소. 나는 인간이오."
명실상부한 인간이다.
"하지만 선한 자도 아니고, 악한 자도 아니지."
"...믿어도 되는 거요?"
"아아. 물론. 제우스 신께 맹세하겠소. 나는 결코 그들을 죽이지 않을 것이오."
알아서 뒤질테니까.
"안내하시오."
* * *
몰로르코스의 안내에 따라, 나는 마을로 들어왔다.
"저, 정말로 네메아의 사자를 죽인 겁니까? 이, 이게 그 사자...?"
"그렇소."
촌장을 비롯한 많은 이들은 내가 사자의 시체를 직접 가져왔음에도 불구하고 사자가 그 네메아의 사자인 걸 믿지 않았다.
지금까지 수십 명을 죽이고도 죽지 않은, 카드모스 대제전에서 A급이라는 위험 난이도를 받은 괴물이 죽을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 같았다.
"이, 이런 괴물이 어찌...."
"물러나시오. 슬슬 '해체'작업을 해야하니. 혹시 무두질용 나이프 있소? 좀 빌립시다."
"이, 이거라면...."
몰로르코스가 건넨 무두질나이프는 이가 다 빠져있었다.
마을의 열악한 상태를 대략적으로 가늠할 수 있었고, 나는 아쉽게도 무두질나이프를 이용해 사자를 해체할 수 없었다.
"끙...!"
내가 화살을 쐈던 때와 마찬가지로 칼이 전혀 들어가지 않았다.
죽었는데도 여전히 가죽은 질겼고, 이래서야 뭐 어떻게 손질을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다.
"뭔가 자르기에 적당한...오."
하나, 눈에 들어오는 물건이 있었다.
"뭐, 뭘 하는 겁니까?!"
"뭘 하긴. 다이아몬드르 자르려면 다이아몬드로 잘라야 하는 법. 그것도 모르시오?"
"그, 그게 뭡니까...?"
"그것도 모르면서 내가 하는 행동을 단정하지 마시오. 피 튈 수 있으니, 물러나시오."
주변에 있던 마을 주민들이 뒤로 물러났고, 나는 사자의 앞발을 잡고 놈의 다른 발을 향해 발톱을 겨눴다.
사각, 사각, 사각.
"오."
역시나.
잘 잘린다.
사자의 발을 잡고 반대편 발목을 향해 긁으니, 가죽이 순식간에 잘리기 시작했다.
서걱, 서걱.
한쪽 앞 발을 자르고, 그 잘린 발을 이용해서 발에서 발톱을 긁어낸다.
하나하나가 어지간한 무슨 검치호의 이빨처럼 날카롭고 단단하여, 이걸 사람 머리에 찍으면 사자굴에 있던 수많은 두개골처럼 머리에 구멍이 뻥 뚫릴 것만 같았다.
"저, 저기.... 위대한 전사시여."
"응? 왜 그러시오."
"그, 혹시 괜찮으시다면, 저희 마을에서 조촐한 연회를 준비하고자 합니다."
"오, 연회? 좋지. 술과 처녀가 있다면, 그 어떤 연회라도 마다하지 않는 게 나지."
처녀라고 하자마자 바로 촌장의 표정이 굳는다.
적당히 술을 먹이고 뭔가 저지르려고 한 것 같았지만, 유감스럽게도 나를 상대로 그런 개수작을 벌이려면 어지간한 티탄신의 권능을 이용해도 들키기 마련이다.
그런데 그저 마을 주민에 불과한, 좆간 놈들이 감히 나를?
어불성설이다.
오히려 내가 이들에게 아주 무시무시한 저주를 내린다면 모를까.
"연회에 고기가 빠질 수는 없지. 고기는 어디에 있소?"
"그, 그게."
"만약 괜찮다면, 이 녀석을 먹어치우는 것은 어떤가?"
"예...?"
"보시다시피."
푸화아악!
나는 발톱을 이용해 사자의 목을 잘라냈다.
발톱이 날카롭기는 해도 몸통보다는 짧아서 자르기가 영 힘들기는 했지만, 그래도 발톱을 이용하니 금방 가죽을 자르고 목만 따로 빼낼 수 있었다.
"내가 이 사자를 해체할테니, 그대들은 이 사자를 구워먹을 수 있게 불을 피우시오."
"저, 정말 그걸 먹는 겁니까?"
"아아. 물론. 내가 먹어봐서 아는데, 구우면 조금 질기긴 해도 어지간한 들소보다는 훨씬 맛있지. 와인도 좀 뿌려서 구우면 잡내도 다 사라질 거요."
"그, 그렇다면...! 감사합니다, 전사시여! 모두, 들었지?! 장작을 가져와! 불을 지피는 거다! 내 창고에 있는 술을 전부 가져와!"
"""우와아아아ㅡㅡㅡㅡㅡ!!"""
마을 주민들이 탄성을 지르고, 나는 마저 네 발의 발톱을 모두 빼낸 다음 하나하나를 단검삼아 계속 해체를 이어나갔다.
가죽은 나의 것.
갈기달린 모가지 또한 나의 것.
나머지, 쓸데없는 고기나 내장은 이곳에 '버리고' 간다.
"저기...."
"아, 아내분인가?"
"안녕하십니까. 그, 제 남편을 구해주셨다고...."
"구했다고 하기에는 그렇고."
나는 몰로르코스와 그 부인을 향해, 누구도 듣지 못하는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오늘 밤에 떠날 거라면 지금 떠나고, 결코 사자고기를 먹지 마시오."
"...예?"
"나야 이 사자를 사냥한 정당한 사냥군이니 권리가 있지만, 이들은 내가 호의를 베푼다고 해서 먹으면 아주 큰 저주가 내릴 것이오."
왜냐?
이 사자는 '기간테스'니까.
"나는 감당 가능하지만, 과연 이들은 감당 가능할지. 흐흐흐."
언젠가.
네메아의 사자가 죽은 걸 알고 다른 기간테스가 찾아온다면.
그 기간테스는 동족의 육향이 인간마을에서, 그것도 다수 인간의 몸에서 풍긴다는 걸 알면 어떤 행동을 보일까?
"아. 거기, 어린 아이들에게는 먹이지 마시오. 그거, 어린 아이들에게는 독이 될 수 있으니."
나는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달아둔 뒤, 두 부부에게 눈짓을 보냈다.
"가시오. 나중에 1년 뒤에 이 마을에 왔을 때는.... 흐흐흐. 어떻게 되어있을지는 나도 모르겠군."
그렇게, 네메아의 사자는 죽었다.
뭐, 훗날.
분노한 기간테스 하나에 의해 마을이 쑥대밭이 되었다고 한다면, 나는 모르는 일이다.
인간이 아닌 좆간들의 죽음 따위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