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우스 엑스 마키나-216화 (216/235)

나는 헤라클레스다.

괴물사냥꾼이다.

기간테스 학살자다.

그런 내가 기간테스를 잡는 것도 아니고, 기간테스로 추정되는 괴물을 잡는 것도 아니고, 아무런 관계도 없는-그것도 민간에 피해를 주지도 않는 짐승을 잡을 이유는 없다.

"와, 왕의 명령이다!"

"내가 이 나라 사람이 아닌데, 왜 내게 명령을 내리는 것이오? 누구도 내게 명령을 내리지 못하오. 제우스 신이 아니면."

내가 제우스고, 내가 헤라클레스인데 내가 왜 인간 왕의 명령을 들어야 한단 말인가.

쾅!

나는 가볍게 주먹으로 바닥을 찍었다.

왕성의 대리석 바닥에 주먹모양이 그대로 찍히고, 땅이 쩍쩍 갈라졌다.

"내게 명령을 한 이유가 무엇이오?"

"그, 그게...."

"누가 왕을 죽이겠다고 협박이라도 했소?"

"......."

왕은 침묵했다.

나는 내 주먹에 묻은 대리석 가루를 가볍게 털어낸 뒤, 왕을 향해 엄포를 놓았다.

"나는 사냥꾼이지만, 아무 짐승이나 사로잡는 자가 아니오."

"......."

"그러니 내게 다시는 그런 방식으로 명령을 내리지 마시오. 기분이 더러울 뿐이니."

"그, 그게."

서서히 압박을 가하니, 그제야 입을 열기 시작했다.

"꿈에 신께서 나타나시더니, 그대에게 명령을 내리라고...."

"하, 어느 신이?"

"그, 그게."

"어느 신인지도 모르는데, 명령을 따른단 말인가? 신이 어찌 스스로의 존재를 감출 수 있단 말인가?"

"마, 말을 조심하라! 신성모독이다!"

왕은 진심으로 겁을 먹고 있었다.

"왕의 위엄을 무시하는 건 좋다! 하지만 신을 모독해서는 안 돼! 그대가 존경하는 제우스 신이나 그대에게 영광을 준 헤라 여신 이외에도, 인간은 그 어떤 신도 모독해서는 아니된다! 설령 그것이 자신의 정체를 숨긴 신이라고 할지라도!"

꿈에서 만났다고 하는 그 신이 어디 사는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왕을 상대로 아주 제대로 협박을 한 듯 그는 진심으로 겁을 먹고 있었다.

"신께서 자신의 이름을 감추신 것은 그것이 그럴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신을 의심하지 마라, 헤라클레스!"

"나의 신성모독이 테베를 곤경에 빠뜨릴까 두렵소?"

"그렇다...! 신께서 진노하시어, 이 테베에 재앙을 내리시면 어찌하겠느냐!"

"그 신의 이름이 참으로 궁금하군."

"허어어!!"

크레온 왕은 뒷목을 잡으며 옥좌에서 몸을 떨었다.

혈압이 올라 넘어가기 일보직전인 것 같아, 나는 괜히 늙은 사람을 괴롭히는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크흠. 그래도 양보할 수 없는 건 양보할 수 없소. 그 신이 만일 다시 나타난다면, 그 때는 왕이 아니라 헤라클레스의 꿈에 직접 나타나라고 간청하시오. 나는 스스로를 밝히지 않는 신을 따를 생각은 없으니."

"헤, 헤라클레스!!"

"자신을 숨기는 신이 신일 수는 있겠지. 하지만 그 신에게서...."

이거, 말하면 테베가 혹시 엎어지는 거 아닐까.

그래도 만일 다른 이가 아니라 크레온 왕을 괴롭히는 존재가 그 신이라고 한다면.

"닭장냄새 풍긴다면, 나를 직접 찾아오라고 하시오."

가이아라면.

나는 가이아의 뜻대로 해줄 생각이 없다.

* * *

-에리만토스 산에 거대멧돼지가 나타났소.

-멧돼지? 맛있겠네.

-사람을 죽인 멧돼지라고 하더군.

-그럼, 내가 잡으러 가야지.

나는 갓 들어온 따끈따끈한 정보에 바로 사냥에 나섰다.

크레온 왕이 뒤집어지든 말든, 테베에 땅의 재앙이 내려오든 말든, 일단 나는 바로 짐을 챙겨 에리만토스 산으로의 여정을 떠났다.

문제 하나.

"쯧."

내 뒤를 따라오는 자들이 생겼다는 것.

네메아의 사자를 잡고 히드라를 죽였다보니, 아무래도 사람들의 이목이 끌린 것에 대해 또다시 문제가 생겼다.

'유명해지는 것도 탈이야.'

어그로가 끌린다.

호기심에 따라나서는 이들이, 팬심으로 따라나서는 이들이, 악의를 품은 이들이 내 뒤를 따라온다.

헤라클레스는 어떻게 괴물을 사냥하는가?

그런 호기심으로 접근하는 자, 나는 그들에게 괴물을 상대하는 방법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줄 의향이 있다.

나의 설명과 훈수로 그 사냥꾼이 죽지 않는다면, 그건 인간과 인류에게 큰 도움이 되므로.

헤라클레스는 정말로 혼자서 괴물을 잡는가?

그런 궁금증으로 접근하는 자가 있다면, 나는 혼자서 아주 멋지게 괴물을 물리치는 모습을 보여줄 것이다.

물론 네메아의 사자나 히드라를 잡았을 때처럼 다소 괴랄한, 야만적이고 원시적인 전투방식보다는 좀 더 멋있는 방법으로 누구나 '오오오오'하고 감탄할 수 있는 방식으로 싸우겠지만.

헤라클레스는 진짜로 괴물들을 죽일 실력자인가?

이런 의구심을 품은 자가 있다면, 그저 이 근육이 허세가 아니라는 걸 확실히 보여줄 것이다.

아무리 내 방을 습격한 도둑들을 내가 퇴치하더라도, 인간은 눈으로 직접 보지 않으면 죄다 의심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그들에게 나의 위용을 직접 보여준다면, 다들 알게 되리라.

뭐, 여기까지는 그냥 그러려니 한다.

비유가 조금은 이상하겠지만, 내가 아는 친구가 20대 백인 처녀랑 섹스했다고 하면 궁금해서라도 한 번 그 여자 얼굴이라도 보고 싶을테니까.

순수한 의도로 친구가 잘 되기를 바란다거나, 친구와의 우정을 빌어준다는 의미로 다가가는 경우가 지금까지의 경우다.

그렇다면 나머지는?

죄다 나를 노리고 있다.

"쯧."

"왜, 왜 그러십니까, 헤라클레스 님?"

"아무것도 아니오. 그, 어디까지 이야기했지?"

"자신보다 더 거대한 괴수를 상대하는 법에 대해 이야기를 했습니다. 원거리 공격이 통하지 않을 경우, 접근전에 대해서요."

"아아, 그래. 일단 힘으로 맞받아칠 생각은 하지 말아야 하는데...."

나는 나의 추종자 비슷하게 된 사냥꾼들에게 나의 사냥 노하우를 전하면서, 동시에 멀티태스킹으로 내게 따라붙는 수많은 이들에 대해 깊게 생각하고 있다.

"오오, 과연! 힘으로 이기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인간이 짐승과 가장 큰 차이점이 있다면, 도구를 이용한다는 거지. 그게 그 짐승을 사로잡기 위한 가장 적당한 도구라면 더 할 말도 필요 없고."

"오오...!"

이렇게 순수하게 감탄하는 이들이 옆에 있는데 화가 날 리가 없다.

이들은 나를 귀찮게 하려는 게 아니라, 순수하게 나라는 존재를 흠모하여 따라오는 이들이니까.

정말로 몸 좋은 남자가 헬스장에가서 운동을 하거나 다른 이에게 운동법을 알려줄 때, 다른 이들이 슬쩍 와서 몰래 보거나 듣거나 혹은 직접 도와달라고 하는 게 어찌 싫을 수 있겠는가.

싫은 경우가 있다.

수많은 인파 속에 섞여, 어떻게든 내게서 뭔가를 훔치려고 하는 자들.

한 부류는 나중에 내가 사냥을 할 때 숟가락이라도 올려서 카드모스 대제전에서 이름을 올리려고 하는 자들.

-아니, 왜 단독사냥이 아닌가!

-멧돼지를 쓰러뜨린 건 테세우스 님이지만, 같이 간 이들 중에 이 사람이 화살을 쏴서 멧돼지를 맞췄다고....

-그 화살 한 방이 얼마나 강하다고!

-원칙은 원칙입니다. 비록 뜻은 함께 하지 않았으나, 같이 사냥한 것으로 간주....

-씨발!

테세우스가 말해줬다.

자기가 당한 일을 그대로 이야기해줬다.

사냥의 지분이 100% 자신이었는데, 어느 미친 놈이 0.1% 숟가락을 올려서 자기 이름 밑에 떡하니 스푸니우스니 뭐니 하는 이름이 달라붙었다고.

여기에도 그런 스푸니우스들이 많다.

그리고 차라리 그런 놈들은 약과라고 생각될 정도로, 쓰레기같은 놈들도 따라붙는다.

"음...."

"왜 그러십니까?"

"좀 떨어지지, 자네는. 내 몸으로부터 1m 이내로 접근하지 마라."

"......."

사냥법에 대해 질문을 하는척 나를 염탐하는 자들이 있다.

내 몸 어딘가에 숨겨져있을 히드라의 내단을 찾으려는 자들이 있다.

나한테는 없으니까 그냥 레르네 늪에 가서 히드라 봉인을 풀어서 다시 꺼내라고 소리를 쳤지만, 그런 말을 했는데도 여전히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판단하여 내 뒤를 쫓아오는 자들이 있다.

눈치빠른 놈들.

공식적으로 히드라의 독을 사용한 적도 없는데, 그냥 히드라를 잡았으니 당연히 히드라의 독을 숨기고 있을 거라고 판단하고 쫓아오는 자들이 있다.

"이제 슬슬 해가 지는 건가."

그리고 한 부류.

"음. 그러면 여기에서 슬슬 야영을 하려고 하는데...."

"아앗, 헤라클레스 님이 야영을 하신다고 하신다!"

"야영을 준비하라!"

정말 골치아프기 짝이 없는 한 부류가 내 뒤로 따라붙었다.

"...하."

"텐트를 펼쳐라! 불을 지펴라! 헤라클레스 님이 드실 음식을 마련하라!"

"간이침대부터 펼쳐! 헤라클레스 님이 주무시기 편한 자리를 만들어라!"

편리하기는 하다.

내가 뭔가 준비하지 않아도, 알아서 이 숲의 공터에 텐트를 깔아주니까.

문제는 본격적으로 야영지를 설치하는 자들이 사냥꾼들이 아닌, 내 뒤를 따라오던 '병사들'이라는 것.

"어머, 헤라클레스 님. 불편하신가요?"

"......."

테베의 병사들.

이들은 크레온 왕이 내게 붙여준, 정확히는 나를 따라온 여자를 위해 붙여준 병사들이다.

금발 벽안.

거유.

장거리 이동을 위해 편한 복장을 입었지만, 그녀의 몸은 옷으로 가려져있음에도 너무나도 육감적이고 아름다웠다.

"메가라 공주."

"네, 헤라클레스 님."

"혹시 이번에도 침대를 같이 쓸 생각인가?"

"물론이죠. 그래야 헤라클레스 님께서 그런 생각이 들지 않으시겠어요?"

히죽.

메가라는 나를 향해 요염한 미소를 지었다.

"신께서 말씀하시길, 저보고 헤라클레스의 아이를 임신하라고 하셨으니."

"......."

크레온 왕의 장녀.

테베의 공주.

메가라.

그녀는 지금, 신탁을 빌미로 나를 유혹하고 있다.

너무나도 익숙한 금발로, 너무나도 익숙한 푸른 눈동자로.

"그게, 제게 주어진 운명이랍니다?"

너무나도 익숙한 멘트로.

"저를 임신시키지 않으면, 테베가 멸망할지도 몰라요?"

누가.

보지를 벌리고 섹스하라고 협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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