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저, 요? 제가 죽은 지가 언젠데, 뭘 어떻게 책임져요?!”
세라는 다짜고짜 책임을 떠넘기려 드는 신에게 이건 말도 안 된다며 펄쩍 뛰었다. 격렬하게 손사래를 친 그녀가 다급히 변명을 늘어놓았다.
자신은 죽은 지 오래라 현재의 지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게다가 그녀는 신이 아니었기에, 누가 어떻게 운명이 뒤틀렸는지 알아보지도 못한다. 기타 등등. 기타 등등….
“그건 걱정 말도록.”
그러나 신은 결코 세라가 눈앞의 과업을 외면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남은 손으로 부드럽게 돌아간 고개를 원래대로 돌려놓은 신이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두 손가락을 세라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나의 조각들이, 너를 마땅히 가야 할 곳으로 이끌어 줄 것이다.”
“……?”
세라는 신의 손끝에 고인 빛을 자세히 살펴보기 위해 미간을 좁혔다. 밤하늘의 별빛을 그대로 모아 만든 영롱함은 고된 지옥의 불길을 견디던 죄인의 시선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문제는 그 손가락의 방향이 누가 봐도 그녀의 두 눈을 찔러 버릴 것 같다는 거다.
“신이시여? 저희 천천히 말로 해결을….”
갑작스럽게 다가온 실명의 위기에 세라가 고개를 최대한 뒤로 꺾으며 몸부림을 쳤다. 그러나 한낱 죄인일 뿐인 세라의 힘으로는 전능한 신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 신은 처절해 보이기까지 한 그 발버둥을 깔끔히 무시했다.
“만약, 네가 맡은 바 임무를 충실히 해낸다면-.”
대신, 결코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해 왔다.
“네게 부여된 504,932,781년의 형량을 모조리 사해 주도록 하지.”
영원에 가까운 형량을 모조리 삭감해 주겠다는, 어마어마한 제안을.
“……?!”
설마 그런 파격적인 조건을 내걸 줄 몰랐던 세라가 놀란 눈으로 신을 올려다보았다.
“그 말…. 진짜, 입니까? 아니, 왜요?”
기대감과 의심이 딱 절반씩 뒤섞인 물음에 신이 낮게 코웃음을 쳤다. 아니라고 해도 네가 별수 있느냐는 오만한 미소였다.
“기간은 3년. 그 안에 해결하지 못한다면 다시 5억 년이다.”
할 수 있겠지?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지, 왜 세라인지, 몇 명이나 구해야 하는지, 그걸 정말 3년 안에 해낼 수는 있는 건지. 따져 보아야 할 게 산더미처럼 많았지만 세라는 그중 어떤 것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이번 지상행은 환생으로 인한 게 아니므로, 지옥에 떨어진 너의 영혼과 죽기 직전의 육신에 그대로 부활하게 될 거다. 그 외에 더 궁금한 게 있나?”
“아니요! 열심히 하겠습니다…!”
이어지는 신의 물음에 세라는 무엇이든 해낼 수 있는 사람처럼 맹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찬물 더운물 가리는 건 남들이나 하는 짓이고, 그녀처럼 나락의 구렁텅이 저 밑바닥을 구르고 있는 사람에게는 그럴 여유가 없었다.
기회는 기본적으로 오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아무리 수상쩍은 기회라 할지라도 일단 잡고 봐야 하는 것이었다.
“세라 로젠바움.”
시원시원한 대답이 마음에 들었던 탓일까.
죄인을 부르는 신의 음성에 언뜻 다정함이 스며들었다. 네? 세라가 제게 천금 같은 기회를 내려 준 현명하고, 공정하며, 다정하기까지 한 신을 향해 저항 없이 시선을 맞추었을 때였다.
“이번에는 좀, 착하게 살거라.”
푹!
지극히 모범적인 조언을 끝으로 신의 조각이 세라의 두 눈에 깊이 박혀 들었다.
아악!
별안간 눈알을 찔린 세라의 시야에 새하얀 빛이 번쩍였다.
……처음으로 경험해 보는 부활의 감각은 눈물이 날 정도로 눈부셨다.
***
빛에 휩쓸린 세라는 어느 순간 제 몸이 묵직해지는 감각을 느꼈다. 그것은 영혼 상태였던 그녀가 이전에는 느낄 수 없었던 육신의 무게였다.
간만에 느껴 보는 육체의 감각이란 무척이나 생소한 것이어서, 세라는 당장 눈을 떠 주변을 살펴보는 쉬운 일도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다.
눈을 뜨는 방법을 잊어버린 것처럼, 눈꺼풀 하나 제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물 냄새.’
그러나 코 속을 파고드는 물비린내는 어렵지 않게 맡을 수 있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 쏴아아, 시원하게 물이 쏟아지는 소리가 들린다. 지옥에서는 결코 들을 수 없었던 청량한 소리였다.
‘정말, 지상이잖아…?’
그에 세라는 자신이 정말로, 지옥을 벗어났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정말이지 눈 깜짝할 사이였다. 동시에 이렇게 무턱대고 지상에 돌아와도 되는가 하는 걱정이 고개를 들었지만 잠시뿐, 곧 지척에 다가온 물의 존재에 모든 신경을 빼앗겼다.
한번 물의 존재를 인식하고 나니 목이 타는 듯한 갈증이 일었다. 세라는 할 수만 있다면 당장 일어나 가장 가까운 물가에 뛰어들고 싶었다. 하지만 아직 적응하려면 시간이 더 필요한지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확실한 건 바닥이 무척이나 차갑다는 거였다. 무정한 신이 대충 아무 바닥에나 그녀를 던져 놓은 모양이다.
그 순간, 드디어 천근처럼 무겁던 눈이 떠졌다.
“…….”
300년 만에 맞이하는 세상은 눈부셔서 제대로 쳐다볼 수조차 없었다.
하지만 세라는 피하지 않고 그 빛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바짝 피가 몰린 안구 주변으로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으나 그 고통마저 기꺼웠다. 오히려 두 눈이 멀어 버릴 정도의 찬란함에 순수하게 감탄할 뿐이었다.
와, 역시 태양 빛이 다르긴 다르구나.
제가 있는 곳이 더 이상 침침한 지옥 불구덩이 속이 아니라는 사실이 그녀를 기쁘게 했다. 히히. 히히히. 지상이다. 지상.
그렇게 한참을 살아 있는 인간의 감각을 만끽하던 세라는 어느 순간, 제 눈에 비치는 햇빛이 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다.
“……?”
태양이 왜 이렇게 코앞에 있는 것 같지? 자세히 보니 묘하게 바닥에 붙어 있는 것 같기도….
“으악! 차가!”
라고 생각한 순간.
얼음장처럼 차가운 물이 세라의 머리 위로 끼얹어졌다.
안 그래도 추위를 느끼던 몸에 호된 냉기가 파고들었다. 덕분에 몽롱한 정신이 한 번에 깨어났다. 다급하게 얼굴에 흐르는 물을 훔쳐 낸 세라가 그제야 주변을 살펴보았다.
“뭐야…?”
시야를 온통 가로막는 쇠창살을 발견한 세라가 얼른 일어나 앉았다.
“내가 왜 갇혀 있어?!”
겨우 지상으로 올라와 기뻤건만, 그녀가 눈을 뜬 곳은 허리도 펼 수 없을 만큼 좁은 철창 속이었다. 반사적으로 철창을 쥐려 손을 내뻗던 세라는 제 두 손목에 야무지게 채워진 족쇄를 보고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몸이 무겁다 싶더니, 그게 다 이것 때문인 모양이다.
“대체 날 어디로 보낸 거야?”
이쯤 되니 슬슬 불안해지기 시작한 세라가 다급히 철창 너머의 세상을 관찰했다.
태양이라고 생각하던 건 실내를 비추는 불빛일 뿐이었고, 철창 밖의 바닥이 온통 물바다였다. 촤악-! 멀리서 또 물소리가 들렸다. 아마 방금 세라가 겪었던 일을 이곳의 다른 누군가가 겪고 있는 모양이었다.
앞뒤 상황을 다 알고 보자 찬란하다고 느꼈던 빛은 더 이상 아름답지 않았고, 청량하다 느꼈던 비 내음이 더는 향기롭지 않았다.
차갑고, 습하고, 인공적인 조명 빛이 가득한 이곳은 어떻게 보아도 좋은 일이 벌어지고 있는 공간이 아니었다. 뒷덜미를 스치는 싸한 예감에 세라의 표정이 설핏 굳어진 찰나였다.
“이봐, 이게 말을 하는데?”
철창 바깥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나이가 좀 있어 보이는, 걸걸한 남자 목소리였다.
“뭐? 그럴 리가.”
곧이어 다른 목소리가 대꾸하더니 세라의 앞으로 길게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리고 한 번 더 가차 없이 얼음장 같은 물세례를 퍼부었다.
“악, 씨발! 왜 이래?!”
한 번 더 불쾌한 냉기를 뒤집어쓰게 된 세라가 저도 모르게 욕설을 내질렀다.
분명한 의사 표현에 그녀의 철창 앞을 서성이던 남자들이 허리를 숙여 안을 들여다보았다. 하나는 신경질적으로 생긴 빼빼 마른 남자였고, 다른 하나는 제법 근육이 두꺼운 우락부락한 남자였다.
“진짜잖아?”
또렷한 눈으로 자신들을 노려보는 세라의 모습에, 빼빼 마른 남자가 어이없다는 듯이 헛웃음을 지었다.
“어이, 이리 와 봐.”
그러다 뭔가를 발견한 사람처럼 얼굴을 굳히더니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 세라의 머리채를 거칠게 틀어쥐었다.
“아야!”
쾅! 그대로 끌려간 세라가 쇠창살에 머리를 박았다. 부딪힌 이마가 찢어지며 상처가 났다. 몹시 굴욕적인 상황에 세라가 죽일 듯이 남자들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그들은 어디서 개가 짖냐는 얼굴로 무시하며 그녀의 얼굴에 환한 불빛을 비출 뿐이었다.
“이년, 눈깔이 보라색이잖아!”
먼저 입을 연 건 우락부락한 남자였다. 그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소리치는 목소리에 숨기지 못한 희열이 섞여 있었다.
“면역자야.”
그의 말을 받는 빼빼 마른 남자의 말이 유독 세라의 귀에 내리꽂혔다.
면역자? 난생처음 들어 보는 표현에 세라가 귀를 쫑긋 세웠다.
“면역자가 왜 여기에 섞여 들어왔지?”
“무슨 상관이야. 우리한텐 좋은 일이지.”
가만히 있으면 알아서 면역자가 뭔지 떠벌려 줄 줄 알았는데, 어째서인지 자기들끼리 옆구리를 찌르며 낄낄거리기만 하고 정보가 될 만한 말은 하지 않는다. 잡고 있던 머리채를 패대기친 남자가 탐욕스럽게 중얼거렸다.
“이거 길드 놈들한테 비싼 값에 팔 수 있겠는데.”
그에 세라는 단번에 자신이 무슨 상황에 처했는지 깨달았다.
아, 이놈들 노예상이구나.
그리고 입매를 비틀어 웃었다.
300년이 지나도 저 거지 같은 족속들은 사라지지 않은 모양이지. 하고.
“괜히 다른 놈들이 눈독 들이지 못하게 잘 덮어 놔. 난 나가서 이걸 팔 만한 놈들이 왔는지 볼 테니까.”
“알았다고.”
빼빼 마른 남자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떠나갔다. 그가 떠나자 우락부락한 남자가 어디선가 커다란 헝겊을 가져와 세라의 철창 위를 덮어 버렸다.
“이봐. 잠깐, 잠깐, 잠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