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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에 나라를 팔았습니다-3화 (3/131)

#3

졸지에 완전히 갇혀 버린 세라가 다급하게 남자를 불러 세웠다. 그녀의 부름에 자리를 떠나려던 남자가 멈칫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아직 여기가 어딘지, 어쩌다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됐는지 모르겠지만 그딴 건 모르겠고 일단 탈출해야겠다는 경각심이 일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걸’ 써야 했다. 지옥에서 지켜보고 있을 신이 좋아하지는 않을 테지만, 그녀를 되살린 시점에서 이 정도는 각오하지 않았을까?

멋대로 넘겨짚은 세라는 이쯤에서 자신의 유일한 장기를 발휘해 보기로 했다.

“다, 당신 돈 때문에 그러는 거지? 나…. 모아 둔 돈이 좀 있어. 원하면 달라는 대로 다 줄 테니까, 당신이 나 좀 몰래 풀어 주면 안 돼?”

철창에 바짝 다가앉은 그녀가 겁에 질린 목소리를 꾸며 내 떠나려는 남자의 발길을 붙들었다.

“오, 그래? 돈이 있으셔?”

남자를 잡아 세우는 건 쉬웠다. 노예상이야 예나 지금이나 돈에 미친 놈들이었으니, 돈 얘기만 대충 꾸며 흘려 주면 알아서 덥석 미끼를 물어 주니까.

“얼마나 많이 모아 뒀는데?”

“……일단, 가림막 좀 치워 주면 어때? 너무 어두워서, 무서워….”

여기서 한 번 쉬어 주어야 한다. 이왕이면 작게 원하는 바를 말해도 좋고. 그래야 상대가 안달할 테니 말이다.

“나 참, 귀찮게 하는군.”

뜸을 들이는 말에 짜증을 내면서도, 남자는 순순히 덮어 뒀던 헝겊을 치워 주었다.

“자, 됐지? 그럼 어서 모아 둔 돈이 어디에 있는지 말해. 내가 액수를 확인해 보고, 널 풀어 줄지 말지 생각해 볼 테니까.”

노예상은 누굴 병신으로 아는지 어린애도 속지 않을 뻔한 거짓말을 지껄였다.

“그게…. 그걸 이렇게 큰 소리로 말하는 건 좀….”

세라는 지극히 현실적인 이유를 대며 남자에게 가까이 와 달라 손짓했다. 남자는 아주 별 지랄을 다 떤다며 구시렁거렸다.

그래도 돈은 갖고 싶은지 순순히 그녀를 향해 몸을 숙여 주었다.

하지만 여전히 세라가 만족스러워할 정도는 아니었다.

“조금만 더 가까이 와 줄래?”

거리가 조금 더 가까워졌다. 하지만 아직도 충분하지 않았다.

“조금만 더, 가까이….”

“에이, 씨팔. 너 이래 놓고 얼마 없기만 해 봐.”

그리하여 마지막, 크게 욕설을 내뱉은 남자가 한 발짝 성큼 다가와 고개를 숙인 순간.

“어억!”

철창 밖으로 손을 내뻗은 세라가 우악스럽게 남자의 머리채를 틀어쥐었다. 갑작스러운 기습에 남자의 고개가 하릴없이 끌려가 쾅! 하고 철장을 들이받는다.

“이 버릇없는 새끼. 감히 누구 머리에 손을 대. 어?!”

방금 전의 일을 보복하듯, 세라가 남자의 머리를 있는 힘껏 흔들어 재꼈다.

“씨발! 이 좆같은 년이 지금 뭐 하는 거야!”

어억! 억! 연달아 머리를 부딪힌 노예상이 곧바로 반격하지 못하고 욕설만 고래고래 질러댔다.

“이거 놔! 이 세라 로젠바움 같은 년아!”

눈을 희번덕 뜬 남자의 입에서 뜬금없이 그녀의 이름이 내질러졌다. 정말, 너무, 뜬금없었다.

당사자인 세라는 허를 찔린 듯이 잠시 멈칫했으나, 그 와중에도 문맥이 품고 있는 부정적인 의미를 알아듣고는 크게 진노했다.

“뭐?! 다시 한번 말해 봐. 어딜 그 이름을 함부로 입에 올려?!”

쾅! 쾅! 쾅! 쾅!

대충 분풀이를 한 세라는 남자가 제대로 정신을 차리기 전에 그의 고개를 꺾어 자신을 바라보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명령했다.

“개지랄하지 말고 내 눈 똑바로 봐!”

제 눈을 똑바로 쳐다보라고.

“……?!”

그에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던 남자의 두 눈이 번쩍 뜨여졌다. 혼란스럽게 허공을 구르던 눈동자가 자석에 이끌리듯 세라에게로 향한다.

그리하여 남자는 세라가 바라던 대로, 불길한 빛을 내뿜는 자수정색 눈동자를 곧장 마주 보게 되었다.

“…….”

그러기가 무섭게 남자의 몸이 힘없이 축 늘어진다. 초점 없이 흐려진 두 눈이 뭔가에 홀린 듯 흐리멍덩해졌다. 세라가 때맞춰 입술을 달싹였다.

열어.

인간의 성대로는 흉내 낼 수 없는 사이한 속삭임이 울려 퍼졌다.

“그, 그으으윽, 그윽….”

세라의 목소리를 들은 남자가 어눌하게 신음했다. 초점을 잃은 눈이 뒤로 돌아가고, 몸속의 혈관들이 세라의 손끝에서 흘러나온 저주에 물들어 검게 변색하였다. 괴로운 듯 이를 드득드득 갈던 남자가 힘겹게 대답을 돌려 주었다.

“아, 아아, 안, 안드….”

원하던 대답을 돌려받지 못한 세라가 미간을 찌푸렸다. 생각보다 그녀의 마력 회로에 흐르는 힘이 미약했다. 너무 오랜만에 해서 감을 잃은 걸까? 다시 심기일전한 세라가 아까보다 더 강한 어조로 명령했다.

열어!

그러자 회로를 뜨겁게 달군 마력이 크게 소용돌이치는 게 느껴졌다. 그럼 그렇지. 세라는 이번에야말로 제 마법이 성공했다고 확신했다.

“쿨럭…!”

무심코 내뱉은 기침에서 뜨거운 피가 쏟아져 나오기 전까지는.

“……?”

아무렇지 않게 솟구친 핏물에 세라의 고개가 모로 기울어졌다. 이게 뭐지? 내가 쏟은 건가? 하는 의문이 가장 먼저 의식을 지배했고, 고통은 그다음이었다.

“으윽….”

조금 전까지도 멀쩡하던 가슴 한가운데에서 지옥 불에 지져지듯 신랄한 통증이 작렬했다. 어깨를 잔뜩 움츠린 세라가 남은 손으로 심장께를 움켜쥐었다. 아픈 위치가 묘하게 기시감을 주었다. 내가 여길 언제 다쳤더라. 곰곰이 기억을 더듬어 보던 세라는 그곳이 죽기 직전 성검에 당했던 자리라는 걸 깨닫고는 얼굴을 굳혔다.

죽고 나서 지금까지 완전히 잊고 있던 어떤 사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성검은 악한 자를 심판하는 신의 권능을 대리하는 성물이었다. 그 검이 상처입히는 건 썩어 문드러지면 그만인 육체뿐만이 아니라, 사악함이 깃든 영혼 그 자체였다.

그리고 마법사들이 지닌 마력 회로는 육체가 아닌 영혼에 귀속된 것이다.

그러니까, 그 말은….

“…….”

망가졌다는 말이다. 위대한 흑마법사 세라 로젠바움의 마력 회로가….

“그륵, 그르르륵….”

세라가 혼란스러워하는 사이, 그녀에게 머리를 붙잡혀 있던 남자가 괴로운 듯이 고개를 비틀었다. 애매하게 걸린 흑마법이 서서히 약해지면서 눌러 놓은 의식이 돌아오려 하고 있었다.

“안 돼!”

세라는 소리쳤다.

그리고 절망했다. 마력 회로의 한가운데가 망가지는 바람에 이런 간단한 주술조차 걸지 못한다는 현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이대로면 영원히 탈출 못 해!

급격한 위기감에 휩싸인 세라가 통증을 무시하고 있는 마력 없는 마력 쥐어짜 필사적으로 남자를 향해 윽박을 질러댔다.

열어. 당장!

“크흑, 쿨럭, 쿨럭…!”

“그, 그윽, 그으으윽. 우어어….”

무리한 주술에 세라는 또 피를 토하고, 남자는 피를 질질 흘려 내고 말도 아니었다. 보기에 영 좋지 못한 광경이었으나 수확은 있었다. 내내 안 된다며 고개를 젓던 남자가 처음으로 바지춤을 더듬어 열쇠를 찾는 시늉을 했다.

그래. 넌 할 수 있어.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다시 희망을 찾은 세라가 불쏘시개에 심장이 찔리는 듯한 고통을 참아 가며 그를 응원하던 순간.

콰광!

“뛟!”

별안간 천지를 뒤흔드는 굉음에 세라가 든 철창이 크게 흔들렸다.

‘망했다…!’

그 바람에 남자를 놓친 세라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어둠이 꼭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안녕. 나는 네 미래고 너는 이제 좆됐어.

“으윽!”

굉음은 몇 차례에 걸쳐 이어졌다.

세라는 소란이 잦아든 후 밀려든 고함으로 말미암아 바깥에 뭔가 좋지 못한 일이 생겼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컥, 커헉, 어으으…. 뭐야. 내가 왜 바닥에….”

그 고함마저 익숙해질 즈음 바닥에 엎어져 있던 남자가 정신을 차렸다. 격한 기침을 토해 낸 그는 아직 주술의 여파가 느껴지는 흐리멍덩한 눈으로 주변을 돌아보았다가, 입가에 피를 줄줄 흘리고 있는 세라와 시선이 마주쳤다.

“너, 너어…. 왜 피가….”

비틀대며 손가락질하던 그의 입에서 새빨간 선혈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무심코 그것을 닦아 내던 남자는 손바닥을 흥건히 적시는 핏빛에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몇 차례 고개를 휘저은 남자는 자초지종을 묻는 얼굴로 세라를 한 번, 자신이 흘린 피를 한 번 쳐다보다가.

“이, 이, 이이이…!”

마침내 둘 사이의 상관관계를 유추해 냈는지 이상한 소리를 내며 그녀를 향해 달려들었다.

“……!”

힉, 순식간에 포식자에서 피식자가 된 세라는 철창 사이를 파고드는 팔뚝이 제게 닿기 전에 얼른 뒤로 몸을 물렸다. 등이 반대편 철창에 닿을 때까지 바짝 붙자, 남자의 손이 아슬아슬하게 코끝을 스쳤다.

“너, 이 건방진 년. 당장 이리 오지 못해?!”

원하는 것을 쥐지 못한 남자가 위협하듯 철창을 흔들며 고함을 내질렀다.

그 패악을 피해 세라가 구석에서 몸을 바짝 웅크렸다. 겉으로 보기엔 겁을 먹은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마음속으로는 어떻게 하면 이 상황을 모면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중이었다.

“……?”

그러다 문득 등 뒤를 스치는 희미한 인기척을 느꼈다.

혹시라도 노예상의 동료가 돌아온 것일까? 그렇다면 더더욱 낭패였다.

‘……아무도 없잖아?’

그러나 돌아본 뒤쪽에는 빈 복도뿐이었다. 착각인가. 아직 육체에 익숙지 않아 헛것을 들었다고 생각한 그녀가 다시 정면을 쳐다봤을 때였다.

“오늘 네년 버릇을 아주 단단히…!”

촤아악-!

잔뜩 흥분하여 꽥꽥 소리를 지르던 노예상의 머리가 눈 깜짝할 사이에 날아가 버렸다. 멱 따는 돼지 소리 같던 고함이 한 번에 멎어 버리고, 머리와 분리된 목에서 분수처럼 새빨간 피가 튀어 올랐다.

그 짧은 순간이 마치 시간을 멈춘 것처럼 느리게 보였다.

튀어 오른 핏줄기가 정면에 있던 세라를 향해 흩뿌려졌다. 반원을 그리며 넓게 분사된 핏방울 너머로 섬광처럼 빛나는 하얀 궤적이 보였다.

누군가, 있다.

“……!”

그 사실을 인지한 순간, 멈췄던 시간이 한 번에 흘러갔다.

노예상의 피가 세라의 발치를 아슬아슬하게 비껴 나갔다. 그러기가 무섭게 퍽! 저 멀리 날아간 머리가 땅에 처박히는 소리가 들렸다.

움찔, 반사적으로 어깨를 움츠린 세라가 더더욱 방어적인 태세로 상황을 주시했다.

“…….”

머리를 잃은 몸이 스르륵 옆으로 쓰러졌다.

남자가 사라진 자리에 건장한 두 다리가 보였다. 세라는 어디서 솟았는지 모르게 나타난 또 다른 누군가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가만히 숨을 죽였다.

아무리 노예상이 소리를 질렀다고는 하나, 저렇게 지척에 다가올 때까지 조금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건 아마 방금 지옥에 떨어졌을 노예상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갑작스러운 죽음이 지나간 자리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

그래서, 피 웅덩이 위에 버티고 선 남자가 읊조리는 혼잣말이 똑똑히 들렸다.

“비명을 안 지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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