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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에 나라를 팔았습니다-4화 (4/131)

#4

상황과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 긴장감이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나른한 어투였다. 그런데도 듣는 세라의 긴장감이 넘쳐흐르는 이유는 남자가 아직도 검을 들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제발 나쁜 놈 죽였으니 내 볼일 끝났다며 가 줬으면 좋았겠으나, 남자는 아직 볼일이 남았는지 피가 흐르는 검으로 세라가 든 철창을 툭 치며 명령했다.

“나와.”

너 같으면 지금 나가겠니?!

마음 같아선 그렇게 소리치고 싶지만, 이 솔직한 몸뚱어리가 벌써 남자를 향해 기어가고 있었다.

최대한 느릿하게 기어간 세라는 일단 자신이 노예상들이 환장해대던 ‘면역자’라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철창 가까이 다가간 그녀는 시체를 넘어오는 검은 구두코를 바라보며 정중하게 고개를 조아려 감사 인사를 표하….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

려고 했으나, 제 턱을 들어 올리는 남자의 손길 때문에 고개가 위로 꺾였다.

당연한 수순으로 남자와 시선을 마주친 세라의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면역자인 것을 들켜서가 아니라, 전혀 다른 의미로.

“…….”

혼란스러운 시선이 찬찬히 남자를 훑는다.

세라의 눈빛이 불꽃처럼 타오르는 새빨간 머리칼과 시린 초원을 담은 눈을 지나 겨울 하늘처럼 쌀쌀맞은 입가에 이르러 멈췄다.

아는 얼굴이다. 그럴 리가 없는데도….

쨍그랑.

그 순간, 흔들리는 시야에 균열이 일었다. 조각난 파편 위로 수백 개의 장면들이 동시에 모습을 드러냈다. 깨어져 비산한 조각들이 잠시 그 자리에 머물렀다가.

“……!”

바로 다음 순간 세라를 향해 유성처럼 쏟아져 내렸다.

그러자 또렷한 장면을 품은 조각들이 세라의 머릿속에 깊숙이 파고들었다. 빠르게 밀고 들어오는 장면들은 대부분 낯선 것이었지만, 개중에 몇몇은 세라에게도 익숙한 광경이 섞여 있었다.

황금으로 만들어진 소서 황궁, 열매가 잔뜩 맺힌 복숭아나무, 흰색의 들꽃, 참혹한 전장의 피 냄새, 시체를 태우는 새빨간 불꽃, 그리고 무표정하게 그를 바라보는….

찰나의 순간 마주친 과거의 제 모습에, 세라가 낮게 탄성을 내뱉었다.

뒤로 갈수록 빠르게 지나치는 장면들로 인해 두 눈을 멀쩡히 뜨고 있기가 어려웠다. 세라의 머릿속을 파고드는 장면들 속에는 언제나 같은 사람이 등장했다. 그는 어떨 때는 어린아이였다가, 청년이었다가, 소년의 모습을 하고 있기도 했다.

그러나 정말 이상하게도, 뒤죽박죽 뒤엉킨 장면들은 세라의 머릿속에서 순서대로 재정렬되었다.

그래서 세라는 이해했다.

지금 제게 밀려드는 이것들이 남자의 시간이었음을. 한도 끝도 없이 밀려드는 시간은 세라가 감당하기엔 지나치게 많았다. 중간 이후부터는 장면 하나하나가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빠르게 지나쳐 제대로 인지할 수조차 없었다.

배려 없이 밀고 들어오는 감각에 세라의 눈앞이 빙빙 돌았다.

세라를 집어삼킨 시간의 파도는 시야를 검게 물들이는 새카만 어둠을 끝으로 그녀를 놓아주었다.

“…….”

방금, 뭐였지…?

균열이 사라진 시야가 다시금 현실을 비추었다. 세라가 두 눈을 끔뻑이며 손으로 얼굴을 더듬었다. 눈은 현실을 바라보고 있을지언정, 아직도 머릿속은 뒤늦게 밀고 들어오는 시간을 이해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유독 열감이 느껴지는 눈가가 제 것 같지 않았다.

다만 확실한 것은 방금 자신이 남자의 시간을 엿보았다는 것이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하고, 왜 일어난 일인지 모르겠으나 그 사실이 마치 변치 않는 진리처럼 세라의 머릿속에 쾅 하고 박혀 들었다.

혼란을 거두지 못한 세라가 다시 눈앞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피처럼 붉은 머리칼, 초원을 닮은 눈동자, 딱딱하게 굳어 있는 입가.

처음 마주할 때와 마찬가지로, 아는 얼굴이다.

달라진 게 있다면 이제는 그가 누구인지 확실하게 안다는 사실이다.

세라는 자신도 모르게 상대의 이름을 뻐끔거렸다.

에녹 소서.

그녀의 심장에 직접 성검을 꽂아 넣은 혁명군의 이름.

사악한 흑마법사 세라 로젠바움을 죽인 영웅의 이름을….

“…….”

조금도 예상치 못한 인물과의 조우에, 세라의 얼굴이 당황으로 굳어졌다.

‘어떻게 아직도 살아 있지?’

벌써 300년이나 지났건만, 에녹 소서는 기억 속 모습 그대로 여전히 젊고 아름다운 채였다.

우선 그 점도 놀라웠는데, 막 지상에서 올라오자마자 만난 사람이 자신을 지옥으로 떨어뜨린 남자라는 사실이 참으로 공교로웠다.

‘재수 없게 왜 시작부터 저 얼굴을….’

에녹 소서의 존재를 확인하자마자, 기억 저편에 묻어 놓은 케케묵은 감각이 무덤을 헤집고 깨어난다. 세라가 반사적으로 비어 있는 심장께를 부여잡았다. 그곳엔 더 이상 제 심장을 꿰뚫은 검이 존재하지 않았음에도, 그녀는 이 순간 제 살을 파고드는 시린 금속의 감촉을 느꼈다.

하나가 기억나니 그다음은 봇물이 터지듯 줄줄이 터져 나온다.

곧바로 이어지는 건 불에 타는 듯한 뜨거운 통증. 코끝에 진동을 하는 피비린내. 햇빛을 받아 찬란하게 빛나는 성검의 검신. 그 빛으로 만든 길 끝에 선, 에녹 소서.

그 모든 것들이 마치 어제 겪었던 일처럼 생생하고 선명하게 펼쳐졌다. 지금은 흑마법을 쓰지도 않는데 성검에 당한 자리가 욱신거릴 정도로.

결코 유쾌하지 않은 마지막을 떠올린 세라가 못 볼 것을 본 마냥 팩 미간을 좁혔다.

“…….”

그때, 에녹에게 붙잡힌 얼굴이 휙휙 아무렇게나 돌아갔다. 배려라곤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우악스러운 손길에 턱이 다 욱신거렸다. 대체 뭘 확인하고 싶은 건지. 에녹은 세라의 눈, 코, 입, 왼쪽 얼굴, 오른쪽 얼굴, 심지어 턱 밑까지 꼼꼼히 살핀 후에야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하-.”

그러고는 뭐가 그리 웃긴지 입매를 픽 비틀어 웃는다.

…웃어?

어쩐지 비웃음당한 듯한 느낌에 기분이 몹시 좋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의 기분을 더 더럽게 만드는 일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

“이 얼굴을 여기서 다 보네.”

어이없다는 듯이 혼잣말을 읊조린 에녹이 입술만 움직여 감상을 내뱉었다.

날, 알아봤어……?

설마 했던 기억력에 세라가 입술을 반쯤 벌렸다. 그토록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 그의 머릿속에 여전히 그녀의 얼굴이 남아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재수 없게.”

물건을 품평하는 듯한 그 말을 끝으로 에녹이 내팽개치듯 세라의 얼굴을 놓아주었다.

“……?!”

그녀를 두고 일어서는 에녹을 따라 세라의 어처구니없는 시선이 따라붙었다.

예상했다시피, 세라는 에녹을 처음 본 그 순간부터 계속해서 당황하는 중이었다. 그를 이곳에서 만났다는 사실뿐만이 아니라, 그가 가타부타 말도 없이 사람의 목을 날렸다는 것, 그리고 자신이 구해 준 약자에게 이런 식으로 행동한다는 게 믿기지 않아서였다.

심지어 에녹은 저가 먼저 잡아챈 주제에 세라의 얼굴에 닿았던 손을 대놓고 제 옷에 슥 문질러 닦기까지 했다. 더러운 게 묻었다는 듯이.

진짜 재수 없네.

허, 이래서야 굳이 세라가 아니라 누구라 할지라도 빈정이 상해 마땅한 순간일 것이다.

기가 차서 튀어나온 코웃음을 들은 걸까. 세라와 에녹의 시선이 다시 마주쳤다.

에녹은 조금의 흥미도 없는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봤다. 차가운 연둣빛 눈동자에는 만성적인 권태와 경멸, 그리고 미약한 짜증이 한데 뒤섞여 있었다. 그런 주제에 입가는 즐거운 것처럼 내내 실실 미소를 흘리고 있었다.

눈은 살벌한데, 입은 웃고 있었다. 결코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지만 특유의 예쁜 얼굴 때문에 언뜻 보면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근데 그 미소를 방금 사람 목을 날려 버린 뒤에 짓고 있으니 영 꺼림칙했다. 그러니까, 어떤 느낌이냐면. 당장 무슨 짓을 저질러도 이상하지 않은 위태로운 미친놈과 마주친 기분이었다.

‘얘가 원래 저렇게 맛이 갔던가?’

그래서일까.

본인임이 분명한데도, 세라는 눈앞의 남자가 낯설기만 했다.

에녹 소서가 어떤 놈인가.

약자라면 제아무리 적국의 국민이라도 보호하고, 불필요한 살생은 최대한 자제했으며, 잘못을 저지른 이들에게도 반성할 기회를 주어야 한다며 부르짖는 짜증 날 정도로 반듯한 남자였다.

몇 없는 사비로 불우한 이들을 도와주고, 대가 하나 받지 않고 곤경에 처한 이들을 도우며, 유명세에 기대어 허튼짓을 하려고 들지도 않았다.

하늘이 내려 준 정의의 기사.

전쟁으로 고통받는 자들에게 에녹은 그런 자였고, 그 부담스러울 정도로 광적인 믿음으로 일구어 낸 찬사가 결코 거짓된 것이 아님을 세라 역시 잘 알았다.

얼마나 잘 알았는가 하면, 그가 성검의 주인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일어날 일이 일어났다고 생각할 정도로.

에녹 소서가 지닌 선한 심성은 그토록 견고하고 굳건한 것이었다.

하지만 300년이 지난 지금의 그는….

“…….”

세라는 바닥에 쓰러진 목 없는 시체와, 코끝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에녹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하찮은 벌레 한 마리 죽인 것처럼 심드렁한 얼굴에는 예전의 그 정의감 넘치던 기사가 보이지 않았다. 에녹을 탐색하는 세라의 눈매가 한층 가늘어졌다. 이 노예상이 그토록 사악한 악당인 것일까. 아니면 세월 앞에 장사 없다고, 결국 구세주 에녹 소서의 그 짜증스러울 정도로 찬란한 심성 역시 빛이 바랜 것일까.

“대장!!”

그때, 천막을 걷으며 나타난 한 무리가 에녹을 향해 달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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