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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에 나라를 팔았습니다-5화 (5/131)

#5

“……?”

그들에게 시선을 돌린 세라가 제 두 눈을 비비적거렸다.

평범함의 극치를 달리는 얼굴들이 이대로 스치면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밍밍했지만, 그들은 여태 본 적 없는 남다른 개성을 가지고 있었다.

‘저게……. 뭐야?’

그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작고 새카만 덩어리를 어깨에 올려 두고 있었다. 동그랗고, 몰캉거리는 느낌의 그 덩어리는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거리더니 이내 뿅, 하고 눈을 떠 그녀와 시선을 마주했다.

굉장히, 하찮아 보이는 생김새였으나 어쩐지 불길함이 느껴지는 존재감이었다.

“여기서 뭐 해? 다른 곳은 대충 끝났어.”

그 검은 덩어리가 아무렇지도 않은지, 무리 중 한 명이 곧장 본론부터 꺼내 들었다. 에녹은 그 덩어리가 신경 쓰이지도 않는 듯, 세라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며 대꾸했다.

“단주는?”

“도망치려던 걸 잡아서 같이 끌어다 놨어.”

“물건은.”

“놈들이 훔친 돌이라면 찾았어. 하여튼 약삭빠른 놈들. 오늘 밤에 전부 팔아 치우려고 운반책도 다 마련해 놨더라!”

“찾았으면 됐어.”

빠르게 오가는 대화로 말미암아, 세라는 그들이 어떤 ‘물건’을 되찾기 위해 이 곳에 있는 노예상의 천막을 급습했다는 사실을 끼워 맞출 수 있었다.

“봤어? 이런 천막이 다섯 개는 더 있더라. 어휴, 세라 로젠바움 같은 새끼들. 어디 할 짓이 없어서…….”

퉷, 바닥에 침을 뱉은 남자 하나가 경멸 섞인 어조로 쯧쯧 혀를 찼다. 오롯이 욕설로써의 기능만 하고 있는 그 문장 사이에는 또다시 그녀의 이름이 끼워져 있었다.

“그러게.”

그 말을 들은 에녹이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게는 남들보다 더 친숙한 이름이었을 텐데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마치 이런 말을 이전부터 많이 들어 왔다는 듯이.

“아까 밖에서 잡은 놈 못 봤지? 목이 날아가기 직전인데도 철창 열쇠 꼭 쥐고 안 내놓더라. 와, 독하대.”

“걔가 제일 세라 로젠바움 같았어.”

“아서라. 그 얘기 했더니 차라리 부모 욕을 하라면서 울던데?”

그들은 에녹과 말이라도 한번 섞어 보고 싶다는 듯이 열정적으로 이야기보따리를 풀어 나갔다.

“…….”

대화가 이어질수록 세라의 표정은 점점 기묘해졌다.

그러니까, 300년 동안 문법이 크게 바뀐 게 아니라면 지금 제 귀한 이름이 일종의 관용구처럼 쓰이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를테면, 부모를 욕하는 것보다 더 심한 수준의 최상급 욕 정도로.

전혀 예상치 못했던 상황에 세라가 복잡한 표정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내가 그렇게까지……. 잘못, 했나? 지옥에 떨어진 300년간 자신은 이런 벌을 받을 만큼 잘못한 게 없다고 철석같이 믿어 왔건만, 정작 현실을 맞닥뜨리니 굳건했던 그 믿음이 속절없이 흔들렸다.

“대장. 듣고 있어? 아까부터 뭘 그렇게 쳐다, 히이익?! 면역자잖아?”

자신을 영 쳐다봐 주지 않는 에녹의 태도가 이상했는지, 그를 따라 고개를 돌린 남자가 식겁하며 놀랐다. 마치 못 볼 것을 봤다는 그 반응은 노예상들과는 전혀 상반된 것이라서, 세라가 혼란스럽게 미간을 좁혔다.

“그 일 때문에 이래? 그렇다고 갑자기 면역자는 어디서…. 혹시, 아는 사이?”

그저 인상을 썼을 뿐인데, 남자가 은근슬쩍 에녹의 뒤로 숨으며 그의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에녹은 거의 즉답했다.

“아니.”

모르는 여자.

딱 잘라 모르는 사이라 선을 그은 에녹이 대답과 동시에 늘어뜨렸던 검을 횡으로 비스듬히 휘둘렀다.

“……?!”

그러자 검에 베인 철창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베어져 나갔다. 본능적으로 고개를 숙였으니 망정이지, 조금만 늦게 반응했으면 세라의 머리도 철창과 함께 잘려 나갈 뻔했다.

꿀꺽.

순식간에 스쳐 지나간 죽음에 세라가 마른침을 집어삼켰다. 한 번 죽어 봤던 몸이라도 그 섬찟한 감각을 또 느끼는 건 어김없이 손에 땀을 쥐는 일이었다. 예고도 없이 휘둘러진 검에 그녀는 화를 내기보다는 반항적이던 눈매를 온순하게 풀었다.

방금은 운이 좋았을 뿐이지 앞으로도 계속 운이 좋으리라는 법은 없었다. 이렇게 빠르고 소리도 없는 검격은 아무리 뛰어난 흑마법사인 그녀라 할지라도 방어할 수가 없었다. 대항할 방법이 없으니 일단 지금은 납작 엎드려야 했다.

“뭐야. 말 좀 하고 휘두르지. 깜짝 놀랐잖아…!”

정작 목이 날아갈 뻔했던 세라는 조용한데, 가만히 서 있던 남자가 놀랐다며 호들갑을 떨어댔다. 비로소 검집에 검을 되돌린 에녹이 노래하듯 쾌활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까부터 말했는데, 못 알아듣는 것 같아서.”

“……?”

에녹의 부하는 그 말의 의미를 이해 못 했지만, 슬프게도 세라는 에녹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 것 같았다. 건성으로 툭툭 옷을 털어 낸 에녹이 세라를 향해 손가락을 까딱였다.

“이리 와.”

꼭 키우는 고양이를 부르는 듯한 부름이었다.

“아, 아, 예에…….”

콕 집어 지명 당한 세라가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나 부서진 철창을 넘어가려 했다. 스르릉, 스릉. 그녀가 발길을 옮길 때마다 손발에 달린 족쇄가 나 여기 있소 하고 요란한 소리를 내었다. 사지 끝에 무겁게 매달린 감각에 세라가 땀을 뻘뻘 흘리며 겨우 바깥으로 발 한쪽을 내밀었다가.

‘아씨, 피 밟기 싫은데….’

내려설 곳을 찾지 못하고 공중을 배회했다.

이 와중에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이냐 물을 수 있겠지만 세라는 피라면 정말정말정말 질색이었다. 저기에 닿느니 그냥 영원히 이 철창 안에 서 있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달까.

“되게 깔끔 떠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세라의 사정일 뿐이다. 짜증스러운 한숨을 내쉰 에녹이 성큼 다가와 말도 없이 그녀를 제 어깨에 둘러멨다.

“억…!”

순식간에 뒤집힌 시야에 세라가 억눌린 신음을 흘리며 발버둥 쳤지만, 그것을 신경 쓰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세라를 들쳐 멘 에녹은 그대로 발을 돌려 천막의 입구를 향해 걸어갔다. 그의 등 뒤로 고개를 빼꼼 내민 남자가 소리 높여 묻는다.

“어어, 그냥 가? 상단 놈들은 어쩌고?”

붙잡아 둔 불법 노예 상인들은 어떻게 할 거냐고.

에녹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볍게 대꾸했다.

“죽이든가.”

제 알 바 아니라는 듯 건성으로 뱉어 내는 판결에 꼼지락대던 세라의 움직임이 한 번에 멎었다. 결코, 자신에게 한 말이 아니라는 걸 알았지만, 어째 제게도 똑같이 경고하는 것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눈치는 빠르네.”

세라가 반항을 멈추자, 에녹이 제법이라는 듯이 웃었다.

운이 좋았다는 혼잣말이 뒤를 이은 건 그다음이었다. 웃음기 서린 목소리는 듣기엔 좋았으나 세라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세라를 둘러멘 채 어두운 숲길을 막힘 없이 걸어 내려온 그는 웬 마차 앞에 이르러서야 그녀를 내려 주었다. 마침내 두 다리로 진짜 바닥을 딛게 된 세라가 감격한 표정을 꾸며 내며 연신 허리를 구부렸다.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에녹은 대답이 없었다.

그렇다고 뭔가를 하라고도 하지 않았다. 그냥 세라를 아까와 같은, 무슨 짓을 해도 이상하지 않을 기이한 미소를 띤 채 쳐다볼 뿐이었다.

이만 가도 좋다는 뜻일까?

“이 은혜 절대 잊지 않을게요. 그럼 저는 이만….”

느릿하게 허리를 편 세라가 그의 눈치를 살피며 슬금슬금 옆걸음을 쳤다.

“가라곤 안 했는데.”

“죄송해요. 아름답게 이별할 순서인 것 같아서….”

겨우 세 발짝 정도 떼어 본 그녀는 에녹의 말에 얼른 제자리로 돌아와 섰다. 경계가 잔뜩 실린 시선이 그의 검에 고정된 채다. 마치 그가 저곳에 손을 대면 언제든 도망갈 준비를 하는 것처럼.

“구해 줘서 고맙지?”

그런 세라의 머리 위로 답이 정해진 질문이 내려앉았다.

“예. 그럼요.”

얼른 고개를 끄덕인 세라가 힐끗, 에녹의 얼굴을 쳐다봤다.

그녀와 눈이 마주친 순간, 에녹이 기다렸다는 듯이 활짝 웃는다. 처음으로 눈까지 사르르 접어 만든 예쁜 미소였다.

“…….”

아, 이건 내가 아는 에녹이다.

과거의 선량함을 조금도 잃지 않은 그 눈빛은 그녀가 아는 그 에녹 소서가 맞았다. 그래서 안도했다. 에녹 소서가 여전히 예전 그대로라면, 자신이 구해 준 불쌍한 노예에게 해코지하지 않으리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세라가 잠시 그 미소에 신경을 빼앗긴 사이, 한 걸음 거리를 좁힌 에녹이 그녀의 두 어깨를 움켜쥐며 이렇게 말했다.

“그럼 갚아.”

제게 정말 고마우면, 그 값을 하라고.

본색을 드러낸 에녹의 미소가 변질된 건 그 순간이었다. 송곳니가 보일 정도로 쌔액, 웃어 보인 그가 세라의 귀에나 겨우 들릴 정도로 작게 속살거렸다.

“몸으로.”

“어억!”

그 말에 서린 파괴적인 의미를 눈치채기도 전에, 세라의 몸이 열린 마차 문 너머로 떠밀려 들어갔다. 짐짝처럼 마차에 실린 그녀가 어찌어찌 일어나 앉았을 때는 이미 문이 바깥에서부터 잠기고 난 뒤였다.

“저기요?!”

제가 떠밀린 문 쪽으로 달려든 세라가 항의하듯 창문을 내려쳤다.

“출발. 길드에 데려다 놔.”

하지만 그 외침은 때맞춰 마차 지붕을 두드리는 에녹에 의해 완전히 묻혔다.

“이 여자가 누군데요?”

출발 명령을 받은 마부가 호기심이 서린 어조로 세라의 정체를 물었다. 닫힌 문 너머로, 에녹이 간단명료하게 대답하는 목소리가 똑똑히 들렸다.

“내 노예.”

“……?!”

청천벽력 같은 소리에 세라가 뭔 개소리냐며 입을 뻐끔거렸다. 그리고 간절한 눈으로 마부석이 있는 쪽을 쳐다봤다. 부디 그가 노예는 무슨 노예냐고. 그런 걸 들이는 건 나쁜 짓이라고 말해 주길 바랐다.

“아아~.”

그러나 마부는 세상 이해 간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먼저 갑니다~.”

시원하게 채찍을 휘둘러 말을 재촉했다.

“어어, 어어어…!”

서서히 움직이는 마차에 세라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에녹을 바라보았다. 그는 마치 먼 길을 떠나는 친우를 배웅하듯 그녀를 향해 친절히 손까지 흔들어 주고 있었다.

다그닥다그닥, 마차가 어둠을 헤치고 숲길을 건넌다.

눈 뜨고 코 베이듯 에녹의 노예가 된 세라를 싣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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