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본명이야?”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걸까. 스노우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모르지. 내가 방금 지었으니까.”
“에엥?”
본명이라는 말보다 그게 더 놀라웠는지 스노우가 말도 안 된다며 입매를 비틀었다.
“아무리 노예라도 너무하네. 지어도 그런 쓰레기 같은 이름을?”
대장. 진짜로 면역자 싫어하는구나.
그런 말을 읊조린 스노우가 아직까지도 굳어 있는 세라의 어깨를 툭, 쳤다.
“힘내.”
“…….”
세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
길드라는 곳은 명칭만 다를 뿐,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도시처럼 보였다. 건물의 외양은 제법 운치가 있었지만, 어째서인지 바로 옆집이 다 들여다보일 정도로 건물 사이가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그래서 마차가 들어올 수 있는 건 입구까지였고, 안으로 들어가고 싶으면 두 사람 정도가 겨우 지날 수 있는 구불구불한 인도를 걸어야 했다.
나름 집집이 작은 텃밭이나 화분을 두어 싱그러움을 채워 보려는 노력이 돋보였지만, 안타깝게도 전반적인 인상이 빈민가처럼 보이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햇빛이 들 수나 있을까 싶을 정도로 건물이 밀집된 이유는 지상에 떨어진 검은 가시들 때문에 인간이 살 수 있는 땅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고, 처음 길드를 세울 때까지만 해도 빈 곳이 많았는데, 지금은 여기서 살고 싶다고 해도 자리가 없어서 받아 줄 수가, 씨발. 내 이름은 어떻게 알았지…?
겨우 다른 곳에 집중시켜 놓은 세라의 의식이 다시 에녹에게로 돌아갔다.
겉으론 태연한 척하고 있었지만, 그녀는 갑자기 나타난 에녹이 자신의 이름을 단번에 알아맞힌 순간부터 지금까지 그가 신경 쓰여 미칠 것 같았다.
“다들 시그너스 길드 밑에서 보호받고 싶어 하거든. 가시가 떨어진 이후에 우리처럼 규모를 키운 길드는 기껏해야 다섯 손가락 안에 드니까.”
세라의 집중력이 산산이 조각난 줄 모르는 스노우는 청산유수로 시그너스 길드에 대한 설명을 쏟아 놨다.
“이게 다 대장 덕분이지. 성검의 선택을 받아 늙지도 죽지도 않는 영웅이라니. 믿음직스럽잖아?”
세라는 자부심이 짙게 묻어나는 스노우의 말을 대충 알아들은 척 고개를 끄덕였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수준이 아니라 아예 듣고 있질 않아서, 그 뒤에 이어진 ‘그러니까 너는 노예로라도 우리 길드에 들어오게 된 것을 고마워해야 한다.’라는 개소리가 어떠한 제재도 받지 않고 얌전히 지나갔다.
세라의 집중력은 오로지 에녹을 향해 있었다.
마차 앞에서 재회했을 때, 그녀의 이름을 스노우에게 가르쳐 준 것을 제외하고 그는 내내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래도 곁에 사람이 함께 있으면 한 번 눈길이라도 줄 만한데, 그는 제 동료로 보이는 스노우는 물론, 시끄러울 정도로 족쇄를 질질 끌고 다니는 세라를 실수로라도 쳐다보지 않았다.
그래서 세라는 더더욱 에녹이 신경 쓰여 미쳐 버릴 것 같았다.
분명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모르는 여자라고 했으면서, 지금은 왜 아는 척하는 거지? 단순히 얼굴이 같기 때문에 본인이 그렇게 부르겠다는 의미였을까? 그것도 아니면, 처음부터 알아봤지만, 일부러 모른 척한 건가?
혼자만의 생각에 빠진 세라에게서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하자, 스노우가 영 흥이 안 나는 눈치로 그녀를 돌아보았다가.
“아, 맞다. 기억이 없댔지. 그럼 시그너스가 얼마나 대단한지 모르겠네?”
나름대로 원인을 찾아냈는지 손가락을 딱, 하고 부딪혀 소리를 냈다.
“…기억이 없어?”
그 말에 내내 조용하던 에녹이 처음으로 대화에 끼어들었다.
“몰랐어? 세라는 대장을 만나기 이전의 기억이 없대. 검은 가시도 모르고, 안타레스교도 모르고, 심지어 우리 길드 이름을 듣고서도 그냥 멀뚱히 있더라니까?”
스노우는 에녹이 모르는 걸 자신이 먼저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 즐거운지. 통통 튀는 어조로 세라가 짜낸 거짓말을 고스란히 읊어 주었다.
“기억이, 없다고….”
그의 말을 전해 들은 에녹이 의미심장한 눈으로 세라를 훑어보았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시원하게 믿어 준 스노우와는 달리, 에녹은 그다지 세라의 기억 상실을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세라는 까탈스럽게 구는 에녹의 태도에 속으로 콧방귀를 뀌며 스노우의 뒤를 쫄랑쫄랑 쫓아갔다.
그 저변에는 성검 덕에 300년도 넘게 목숨이 붙어 있는 너 같은 인간도 있는데, 기억 좀 잃어버린 세라 로젠바움의 얼굴을 한 사람도 있을 만하지 않겠느냐는 혼자만의 자기 합리화가 깔려 있었다.
“앗!”
혼자서 구시렁거리고 있는데 그새 또 시야가 뒤집혔다.
“먼저 간다.”
“어어? 왜? 아아-. 바로 침대로 가게?”
“그럼 너도 불렀겠지.”
정상인은 상상할 수 없는 문란하면서도 무시무시한 대화가 스쳤다.
세라는 서슴없이 주고받는 대화 속에서 두 사람이 생각보다 더 친한 사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럼 어차피 가시 쪽에 갈 거 아니야? 같이 가.”
“들를 데 있어. 먼저 가.”
아까처럼 세라를 제 어깨에 들쳐 멘 에녹이 그 말을 끝으로 성큼성큼 돌계단을 올랐다.
“잘 가~. 이따가 봐~, 세라~.”
스노우는 별다른 미련 없이 손을 흔들어 주었다. 갑자기 왜 이래?! 이런 일을 벌써 두 번째 당하는 중인 세라는 갑자기 급하게 구는 에녹의 등을 불안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뒤집힌 채 눈을 몇 번 감았다 뜨자 그녀는 어느새 전혀 다른 공간에 들어와 있었다. 달칵. 세라를 내려 준 에녹이 조명을 켰다. 그가 세라를 데려온 곳은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작은 집 안이었다. 테이블 위의 꽃병 하며, 창가의 레이스 커튼 등이 농담으로라도 에녹의 집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남의 집이라는 이야기인데. 주인이 부재중인지 나와 보는 사람이 없었다.
“저기요. 갑자기 여기는 왜-.”
경계 어린 눈으로 집 안을 둘러보던 세라가 자신을 이곳에 데리고 온 이유를 물으려던 찰나.
“……?!”
에녹이 다짜고짜 검을 빼 들어 그녀를 향해 겨눴다.
갑작스러운 위협에 세라가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가만히 있어.”
에녹은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움직이지 말라 명령했다.
‘너 같으면 가만히 있겠냐!’
입가에 맴도는 말을 꾹 참아 낸 세라가 항의하듯 에녹을 노려보았다.
목덜미에 와 닿는 금속이 유독 시렸다. 안 그래도 젖어 있는 몸 때문에 이가 딱딱 부딪힐 정도로 추운데, 달빛 아래 번뜩이는 칼날을 보고 있자니 좋지 못한 기억이 뇌리를 스쳤다.
“일단 진정하고…. 우리, 말로 합시다!”
두 손을 앞으로 내민 세라가 에녹에게 진정하라는 듯이 손짓했다.
그에 에녹이 애석한 표정으로 말하길.
“말로는 아무것도 해결할 수가 없어.”
어깨를 으쓱한 에녹이 세라를 향한 칼끝을 한층 더 깊숙이 기울였다가 뗐다.
그는 벨 각도를 재듯 그 짓을 두어 번 더 반복했다. 그러면서 실실 처웃으니 정말로 미친놈처럼 보였다.
구해 줄 땐 언제고 갑자기 왜 이래!
세라는 이제 와서 칼부림을 하려는 그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아니, 사실은 처음부터 이해되지 않았다. 자신을 왜 구해 줬고, 왜 이곳에 데려왔으며 지금은 또 왜 이 지랄인지.
“말로 해결할 수 있는 게 얼마나 많은데! 왜 이러는지 모르겠지만 이유라도 말해 주면 제가 어떻게든….”
위기의식이 밀려든 세라가 얼른 아무 말이나 지껄이며 에녹의 주의를 끌었다. 어떻게든 시간을 벌기 위해 입을 쉬지 않는 한편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며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했다.
하지만 야속한 에녹은 세라의 마음도 몰라주고 얄미운 대답을 돌려주었다.
“싫어.”
그리하여 내내 목덜미를 배회하던 검이 하늘 높이 치켜 올라갔다가.
“……!”
떨어진다.
***
죽는다.
세라는 명확하게 다가오는 죽음의 예감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검이 그녀를 향해 쏟아지는 그 찰나가 시간이 멈춘 것처럼 느릿하게 흘렀다. 더불어 죽음 뒤에 일어날 여러 복잡한 걱정들이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여기서 이렇게 죽으면 또 지옥에 가게 되나? 아직 아무것도 못 했는데, 신이 다시 그녀를 지상으로 돌려보내 줄까? 기타 등등 기타 등등….
무엇 하나 확신할 수 있는 건 없었지만, 지금 죽으면 확실하게 좋은 꼴을 당하지는 못할 것 같았다.
에녹…!
이대로 죽을 수 없다는 본능 때문일까. 생각할 겨를도 없이 반사적으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절체절명의 위기 앞에 잠들어 있던 마법 회로가 반응을 보인다.
하지만 그뿐.
언뜻 작동하는 듯 보였던 마법은 영혼 한가운데에 난 구멍을 통해 연기처럼 흩어져 버렸다. 세라의 마지막 희망마저 사라져 버린 것이다.
진짜로 죽는다.
지척까지 다가온 검에 세라는 차마 끝까지 쳐다보지 못하고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녀가 눈을 감은 것과 거의 동시에 서걱. 무언가 깔끔하게 잘려 나가는 끔찍한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어디 노예가 함부로 주인 이름을 불러.”
그리고 어이없다는 듯이 중얼대는 에녹의 목소리도 들렸다.
철컹. 발치에 묵직한 쇳덩이가 떨어지는 충격이 느껴졌다. 다행히 말끔하게 잘려 나간 건 그녀의 머리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눈을 뜬 세라가 유독 가볍게 느껴지는 손목을 내려다봤다. 검을 막느라 반사적으로 뻗어 나간 손. 내내 그녀를 성가시게 만들던 묵직한 족쇄의 이음새가 깔끔하게 잘려 나가 있었다.
종이를 베는 것처럼 순조로운 절단음이었는데, 그게 강철을 자르는 소리였을 줄이야.
후두둑. 후둑.
세라가 어안이 벙벙한 눈으로 족쇄를 바라볼 즈음 이음새만 잘려 나갔을 뿐인 족쇄가 갑자기 혼자서 조각나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
그 광경을 멍하니 지켜보던 세라는 아직도 충격이 가시지 않는 목소리로 물었다.
“방금, 뭐, 하신 거예요?”
“시험.”
넋이 빠진 물음에 에녹이 별거 아니라는 듯 간단하게 대꾸했다. 그러고는 검을 들지 않은 다른 손으로 세라의 허리를 감싸 바짝 끌어당기는 것이었다.
“……!”
급격히 가까워진 거리감에 세라가 흐읍, 하고 숨을 들이켰다. 그녀를 한 팔에 끌어안은 에녹이 새하얀 목덜미에 닿을 듯 말 듯 고개를 숙인 채 한참 동안 숨을 들이쉬었다.
“정말로 목을 날리려고 했는데 ‘목소리’도 안 쓰고.”
혼잣말을 중얼댄 에녹이 이번에는 아예 세라의 목덜미에 코를 박고 크게 호흡했다. 힉, 세라가 어깨를 바짝 움츠렸다. 정곡을 찔려서가 아니라 살갗에 닿은 감촉이 이상해서. 피부에 곧장 느껴지는 타인의 체온이란 목숨의 위협을 받던 때와는 사뭇 다른 긴장감을 조성했다.
그대로 얼어붙은 세라의 등허리에 쭈뼛 힘이 들어갔다. 살면서 누군가와 이렇게까지 가까이 닿은 적이 없던 그녀는 자신이 숨을 쉬지 않고 있다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당황했다.
그렇게 참았던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를 즈음, 세라의 몸에 고개를 묻고 있던 에녹이 마침내 떨어져 나갔다.
“흑마법 냄새가 나기는 하는데….”
의미심장한 눈으로 그녀를 훑어본 그가 정말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영-. 애매하네.”
쯧, 혀를 차는 소리와 함께 세라의 호흡이 돌아왔다. 숨과 함께 얼어붙어 있던 머리가 한 박자 늦게 방금 전 제게 일어난 상황을 이해했다. 의문과 혼란이 뒤섞인 시선이 에녹에게 가 닿았다.
“이게, 절 시험하신 거라고요?”
“응.”
“흑마법을 쓰는지 안 쓰는지?”
“응.”
넋이 빠진 물음에 에녹이 즉답했다.
여태 별다른 내색을 하지 않고 있었지만, 역시나 호락호락하지 않은 성격답게 마음속으로는 세라를 의심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 확실한 방법이기는 했다.
목이 날아갈 판국에 뭐라도 하지 않으려는 마법사는 없을 테니까. 세라 또한 방금 본능적으로 마법을 끌어다 쓰려고 하지 않았던가. 물론 실패했지만….
세라는 문득, 방금 전의 마법이 성공했으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가 궁금해졌다.
“……그러다 쓰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