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
“쓰면, 어떻게 하려고 하셨는데요?”
“…….”
조마조마한 물음에 에녹은 말없이 웃으며 검을 고쳐 쥐었다.
사르르 호선을 그리는 입매와는 달리 눈은 조금도 웃고 있지 않았다.
아까 그 노예상의 목을 날려 버리던 그때처럼 말이다. 충분하고도 확실한 대답이었다.
그 미소를 마주한 세라는 제 발밑이 저 땅끝 지하로 쑥 꺼지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좆될 뻔했다….
그리고 안도했다. 실패해서 다행이야. 영혼에 구멍이 나 있어서 다행이야. 성검에 죽어서 다행이야….
지금만큼 마법이 실패해서 기뻤던 순간이 없었다.
“켁……!”
그러나 기쁨도 잠시, 신중한 눈으로 세라를 살피던 에녹이 예고도 없이 그녀의 목을 한 손에 움켜쥐었다. 저항 없이 붙잡힌 가느다란 목덜미에서 팔딱팔딱 맥박 치는 고통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냥 이대로 죽일 수도 있을 것 같아.”
신기하다는 듯이 눈을 깜빡인 에녹이 손끝에 힘을 주었다. 정말로 목을 졸라 죽여 버릴 것처럼. 끄윽, 세라의 입에서 짓눌린 신음이 샜다. 아직 불편할 정도는 아니지만 두 손으로 제 목을 조르는 커다란 손을 붙잡아 떼어 내려 애썼다. 물론, 세라의 힘으로는 턱도 없었다.
의도한 것인지 아니면 무의식적인지, 세라의 목을 조르는 에녹의 손아귀 힘이 점점 강해졌다. 머지않아 숨통이 틀어막힌 세라가 힉힉 대며 괴로운 숨을 내쉬었다. 커다란 손에 붙잡힌 채, 그것을 떼어 내지도 못하고 켁켁 대는 여자의 모습은 누가 보아도 연약해 보였다. 에녹은 그녀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지켜보았다.
그러다 세라의 얼굴이 완전히 시뻘겋게 달아오를 즈음에야 ‘정말 아닌가?’ 하고 손힘을 풀어 주었다.
“크흡, 케헥, 콜록…!”
겨우 숨통이 트인 세라가 상체를 굽힌 채 격렬한 기침을 토해 냈다. 자연스럽게 다가온 에녹이 구부린 등을 두들겨 주다가.
찌이익.
그대로 세라가 입고 있던 옷을 찢어 버렸다.
“……?!”
그것을 인지했을 때는 이미 목 아래로 썰렁한 바람이 들이닥쳤다. 휘유-. 새하얀 알몸을 구경한 에녹이 높은 휘파람을 불었다.
“미친!”
소스라치게 놀란 세라가 가장 가까운 창가로 뛰어가 얼른 커튼으로 몸을 가렸다. 하지만 안이 비치는 레이스로 만들어진 탓에 만족할 만큼 완전히 가려 주지는 못했다.
그녀의 탐스러운 엉덩이를 본 에녹이 질 낮게 킬킬대는 소리가 똑똑히 들렸다.
“이게, 이게 뭐 하는…!”
크게 당황한 세라가 얼간이처럼 말을 더듬거렸다.
“어떻게 이렇게 똑같이 생길 수가 있지?”
그러거나 말거나, 다시금 거리를 좁힌 에녹이 세라의 고개를 휙 잡아 올렸다. 코앞에서 그녀를 훑어보는 눈동자는 오로지 흥미로 가득 차 있었다.
신기한 동물 보듯 세라를 구경하던 에녹이 세라의 허리를 잡고 빙글 돌렸다. 저항 없이 돌아간 그녀의 몸에서 마지막 보루로 둘러 둔 커튼이 순조롭게 풀려 나갔다.
아까도 그렇고, 사탕 껍질 벗기듯 자꾸 무언가를 벗겨대는 게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니었다.
흐읍, 헛숨을 들이켠 세라가 두 손으로 커튼을 꼭 움켜쥐었다. 다른 건 몰라도 앞쪽은 사수하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다행히 에녹의 관심도 그녀의 뒤태에 있었는지, 굳이 끌어안은 것을 빼앗거나 하지는 않았다.
대신, 훤히 드러난 등 어디쯤을 야릇한 손길로 쓸어내리곤 웃었다.
“여기에 있는 점까지 똑같아.”
“……?!”
들으라는 듯이 중얼대는 혼잣말에 세라의 등골을 타고 소름이 쭉 솟았다. 대체, 왜. 무슨 이유로 그걸 알고 있는 건데. 질겁한 그녀가 거칠게 그를 밀어내며 쏘아붙였다.
“보자 보자 하니까 뭐 하는 거야. 진짜! 목숨 한번 구해 줬다고 단 줄 알아?!”
“……?”
그에 두 눈을 크게 뜬 에녹이 어디 더 말해 보라는 듯이 세라의 목에 검을 들이댔다. 무신경하게 살갗을 슥-. 긁어내리는 검의 감촉에 목이라도 물어뜯을 듯이 소리치던 세라가 손바닥 뒤집듯 태세를 전환했다.
“……라고 할 줄 알았다면 오해입니다. 이 세상은 목숨이 전부죠. 다예요. 다. 너무 감사드려요.”
우스울 정도로 얌전해진 모습에 에녹이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을 지었다. 어째서인지 모르겠지만 실망한 기색이다.
“노예야.”
네! 세라는 곧장 대답했다. 아직 그녀의 목에 드리워진 칼날이 거두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랑또랑한 눈으로 에녹을 바라본 세라는 그가 시키는 일이며 뭐든지 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얼굴을 했다. 시키면 발바닥이라도 핥을 기세였다.
언뜻 충성스러워 보이는 노예를 내려다보던 주인이 느른하게 명령했다.
“세라 로젠바움 개새끼. 해 봐.”
“……예?”
그건 발바닥을 핥는 것보다는 쉬운 일이었지만, 어쩌면 그것에 비견될 정도로 굴욕적인 주문이었다. 표정이 무너지지 않게 이를 꽉 깨문 세라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느근드요?”
흑마법의 산을 넘으니 이번에는 사상 검증이냐.
세라는 참 지독한 새끼라는 감상을 뒤로하고 순진한 척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해 보라니까?”
에녹은 이번에도 마땅한 대답을 생략한 채 하기나 하라며 그녀를 재촉했다. 네가 정말 아무런 문제가 없고 떳떳하면 못 할 이유가 어디에 있냐는 듯이.
도무지 회피할 수 없는 검증의 관문 앞에서, 세라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로, 로젠바움 개새끼.”
굳이 세라를 빼고 로젠바움만 남긴 것이 그녀의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내 언젠가 이날의 굴욕을 기필코 갚아 주마.
세라는 진짜로 죽었을 때도 갖지 못했던 복수심이 이제야 깨어나는 기분이었다.
“안 들려. 더 크게.”
하지만 만족을 모르는 에녹 소서는 눈치도 없이 더 크게 너 자신이 개새끼라고 외쳐 보라 요구했다. 한쪽 귀를 후벼 파며 기다렸다는 듯이 말하는 게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니었다.
의심 가는 사람을 붙잡고 세라를 욕해 보라고 했을 것을 생각하자 짜증이 울컥 치솟아 올랐다.
“로젠바움 개새끼! 로젠바움 개새끼!”
제대로 빈정이 상해 버린 세라가 목에 핏대를 세워 쩌렁쩌렁하게 외쳤다. 어찌나 큰지 주변의 말들이 놀라 투레질을 할 정도였다. 그녀는 그 말밖에 모르는 사람처럼 호흡이 딸려서 말하지 못할 때까지 같은 말을 반복했다. 그러다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은근슬쩍, 에녹을 바라보며 자신의 진심을 외쳤다.
“개새끼!”
개새끼야! 너는 죽은 사람한테 이딴 말을 하고 싶냐!
목이 아플 정도로 부르짖은 세라가 씩씩대며 호흡을 골랐다. 이제 속이 시원하냐는 원망 섞인 시선이 에녹을 노려본 것은 그다음이었다.
“…….”
해 달라고 해 주면 좋아할 줄 알았더니. 에녹은 의외로 습관처럼 두르고 있던 미소조차 벗어던진 채였다.
“너-.”
한참의 침묵이 흐른 후, 에녹이 더없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진짜, 그 여자가 아닌가 보네.”
대체 이딴 게 어떻게 증명이 될 수 있을지 전혀 모르겠지만, 드디어 세라의 결백을 믿어 주는 분위기였다.
“하긴. 부활 같은 게 가능할 리 없지.”
마침내 의심을 거둔 영웅이 노예의 목에서 검을 거뒀다.
그리고 진심으로 기쁜 사람처럼 눈까지 사르르 접어 웃었다.
“다행이다.”
“…….”
세라는 자신을 만나지 않아 다행이라고 말하는 그 얼굴에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녀 또한 에녹 소서를 다시 만난 것이 반갑지만은 않지만, 저렇게 대놓고 자신이 아니라서 기쁜 티를 내니 영 입맛이 썼다.
그래도 너와 나 사이에 오간 불화의 역사가 있는데 아쉬운 척이라도 하지 참 정 없는 놈이 아닐 수 없었다.
검을 거둠과 동시에 관심까지 쏠랑 걷어 간 에녹이 집 안을 뒤지기 시작했다. 곧 새카만 원피스를 가지고 돌아온 그가 그것을 세라의 머리 위에 뒤집어씌웠다.
“아! 아파!”
이런 일은 많이 해 보지 않았는지 냅다 꽂아 넣기만 하는 손길이 서툴기 그지없었다.
“어우씨, 저리 가! 내가 알아서 입을 테니까!”
가차 없이 에녹의 손을 쳐 낸 세라가 빠르게 옷을 끼워 입고선 그를 노려보았다.
“자, 가자. 은혜 갚으러.”
그녀가 옷을 다 입을 때까지 기다려 준 에녹이 세라의 손목을 잡고 바깥으로 이끌었다.
세라는 에녹 소서의 앞에서 당황하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지만, 자꾸만 덥석덥석 잡아채는 손길은 도무지 익숙해지지를 않았다.
에녹에게 이끌려 간 곳은 놀랍게도 마구간이었다.
뭐야, 어디를 또 가?
이제 막 길드에 도착했는데 또 먼 길을 가야 할 것 같은 예감에 세라가 걸음을 멈칫거렸다.
에녹은 내키지 않아 하는 반응을 모르는 척 마구간에 남아 있는 유일한 말 위에 그녀를 답삭 올려 태우고는 자신도 그 뒤에 올라탔다.
그리고 세라가 제대로 자세를 잡기도 전에 고삐를 후려쳐 말을 달렸다.
“읏?!”
만약 등 뒤에 있는 에녹이 그녀의 허리를 붙잡아 주지 않았다면 지금쯤 낙마로 인해 지옥에 떨어졌을 것이다.
세라는 휙휙 스쳐 지나가는 풍경과 귓가를 스치는 바람 소리에 정신이 없었다. 에녹은 뭐가 그리 급한지 세라가 힘겨워하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끝끝내 속도를 늦춰 주지 않았다.
원래도 승마에 익숙지 않았던 세라는 쉴 새 없이 들썩이는 짐승의 등이 몹시 불편했다. 그리고 에녹이 얇디얇은 여름 원피스를 꺼내 주는 바람에 춥기는 또 더럽게 추웠다.
이것도 저것도 전부 불편했지만 가장 불편한 건 그녀의 엉덩이에 닿는 안장이었다. 너무 급하게 앉혀져서 잘못된 곳에 안착했는지 어떻게 해도 그곳이 불편했다.
“저기요! 잠깐 좀 멈춰 봐요! 엉덩이 쪽 안장이 너무 딱딱하단 말이야!”
참다못한 세라가 에녹에게 잠시만 멈춰 달라 외쳤다.
딱딱해서 불편하다는 그녀의 말에 에녹이 소리 내어 웃었다. 그리고 그 웃음기가 가시지 않은 목소리로 답했다.
“그거 안장 아닌데?”
“……뭐?”
이게 안장이 아니면, 뭐….
거기까지 생각한 세라가 자신의 엉덩이를 불쾌하게 할 또 다른 가능성을 떠올리고는 질색을 했다.
“이 음란한 새끼가 내 몸에 뭘 비벼대는…, 우웁!”
항의의 말을 쏟아 내던 세라는 예고도 없이 틀어막힌 입에 두 눈을 크게 홉떴다. 에녹이 주인이고, 그녀가 노예이니 언제든 제 입을 틀어막을 수 있는 권리가 있긴 했지만, 설마 그런 일이 진짜로 일어날 줄은.
“……!”
그것을 입술로 막아 버릴 줄은 정말이지 상상도 못 했다.
“으음!”
놀라서 반사적으로 숨을 들이켠 순간, 벌어진 입술 사이로 뜨거운 혀가 쑥 파고들었다.